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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칠십 인을 보내신 예수님 (눅 10:1-24)

첨부 1


지난 주일에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어떤 자세로 주님을 따라야 하는가를 배웠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70인 제자들을 전도자로 보내는 사건이 중심이 되겠습니다. 본문은 3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① 먼저는 70명의 제자들을 파송하는 것을 1-16절에 말씀하고,
② 둘째는 17-20절 이들이 선교를 하고 돌아와 선교 보고를 하고,
③ 셋째는 이 70명의 제자들의 선교 보고를 들으시고 거기에 대한 우리 주님의 감사가 21-24절에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전도인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며, 또 전도인을 맞이하는 성도의 자세가 어떠해야 함을 깊이 배워 다 함께 주님이 주시는 즐거움으로 즐거워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Ⅰ.70인 파송(1-16)

1절을 보십시오.
“이 후에 주께서 달리 칠십 인을 세우사 친히 가시려는 각동 각처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 했습니다. 여기 “이 후”하는 것은 9:1절에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들을 파송하신 이후이겠습니다. 12제자들을 파송하신 후 주님은 따로 70인을 뽑아 당신 자신이 가시려던 각동 각처로 둘씩 둘씩 짝을 지어 전도하도록 내어 보내셨습니다.
이들 70인 제자 중에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요셉과 맛디아(행1;23) 그리고 초대 교회의 일곱 집사 스데반이나 빌립, 브로고로, 니가노르, 디몬, 바메나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행6;5) 예수님께서 이들을 보내실 때, 둘씩 둘씩 짝을 지워 친히 가시려던 각동 각처로 앞서 파송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둘씩 둘씩 짝을 지어 보내신 것은 동역 하는 믿음을 심어 주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동역 하였고,(행3:1,11) 또, 바울과 바나바가 합심 동역 하여 안디옥 교회를 세웠고(행11:25,26, 30) 그리고 전도 여행을 떠날 때도 바울과 바나바(행13:2) 바울과 실라(15:40) 바나바와 마가(15:39)가 동역 하였고, 또, 유다와 실라(15:27), 디모데와 실라(17:14), 디모데와 에라스도(19:22) 등 동역의 역사로 교회가 세워지고 전도 역사가 활발히 전개되었습니다.
혼자서 가면 헛생각에 시달리기 쉽고, 사단의 시험에 들기 쉽습니다. 그러나 둘씩 전도 여행을 떠나면 서로 의지하고, 위로하고, 기도하고, 피차 힘이 됩니다. 또 성령님은 약속하시기를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나도 함께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70인을 이렇게 둘씩 둘씩 짝을 지워 보내시면서 기도할 제목을 주셨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이 적으니 그러므로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일군 달라는 것을 구하라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4:35절에 예수님은 세상 사람을 보실 때, 희어져 추수 때가 되었도다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① 12제자들을 파송하셨습니다.(9:1) ② 그러나 이 열둘이 부족하여 또 주님은 70인을 파송하셨습니다. ③ 그리고 주님께서 보실 때 이 70명으로는 부족한 것을 아시고 더 많은 추수군을 달라고 기도하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Worker Man)이 적다고 하셨습니다. 지난 시간에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하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① 머리 둘 곳 없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57,58) ② 복음 전파하는 일에 최우선을 감당해야 합니다.(59,60) ③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61,62) ④ 어린아이를 영접하듯 아무런 보탬이나 덕이 되지 못하는 이들을 영접하고 섬기고자 하는 자 ⑤ 그리고 포용성을 가질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이런 제자들이 부족한 것을 아시고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하셨습니다.
세계 187개국을 바라보십시오. 추수할 일군은 참으로 부족합니다. 모든 민족, 족속까지 가려면 일군이 택부족입니다. 뿐만 아니라 복음 전하는데 훈련되고 헌신된 일군이 너무너무 부족합니다. 지금도 이를 위해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70명의 제자들을 보내시는 예수님의 심정은 어떠합니까
“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하시며 안쓰러워 하셨습니다. “어린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하심은 12사도를 보내실 때도 하신 말씀인데(마10:16) 70인 제자들에게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복음 진리를 알지 못하는 세상을 이리와 같은 세상이라고 하셨습니다. 토마스 홉스는 세상을 이리와 같다고 공감을 했습니다. 강자는 약자를 헤치고 이용해 먹습니다. 권력을 가진 자는 힘없는 백성을 우롱해 먹습니다. 요사이 지존파며, 거기에 못지 않는 야타족, 그리고 인천 세금 횡령 사건 등 세상은 광포하고 잔인하고 포악합니다. 이리와 같이 마구 헤칩니다.

예수님은 이런 세상에 어린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어린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는 심정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은 악한데 이 70인 제자들은 너무나 순진하고 진리 밖에 모릅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보내시고자 할 때 베드로가 묻기를 “그리하면 이리가 양들을 찢으면 어떻합니까”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시기를 “양들로 한 번 죽어 이리로 무서워하지 않게 하라” 하셨다는 전설이 남아 있습니다만, 12사도이든 70명의 제자이든 전도자의 길에는 이리떼와 같은 핍박 자가 대기하고 있는 것을 각오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양과 같은 저와 여러분에게 “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하시며 “가라”고 하십니다.
① 이것은 어린양 같은 우리를 통해서 한 영혼이라도 더 추수하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이요,
② 어린양 같은 제자들을 강한 투사로 키우시기 위해서요,
③ 또, 우리를 통해서 더 많은 일군(Worker Man)을 모으시기 위해서 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이리 같은 세상에 보내시면서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1. 첫째, 사명감이 투철해야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4)
4절을 보십시오. “전대나 주머니나 신을 가지지 말며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라” 하셨습니다.(4) 예수님께서 12제자를 파송 하실 때는 ①지팡이나 ②주머니나 ③양식이나 ④돈이나 ⑤두 벌 옷을 가지지 말며(9:3) 5가지를 금지 하셨습니다만, 70명 제자들에게는 세 가지와 신이 첨가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 정신은 같다고 봅니다. 이 말씀은 전도할 때 물질을 의지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여행할 때 가장 필요한 것은 물질입니다. 특히 전도자들의 앞에는 예상할 수 없는 일이 많이 생기므로 물질이 필요합니다. 병든 자나, 갑작스런 사고를 만난 이들을 만났을 때, 입만 가지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친히 입히시고, 먹이시고, 신기심을 믿고 떠나라고 하십니다. 여기 “신을 가져가지 말라”는 말은 맨발로 가라는 뜻이 아니고 예비로 다른 신발을 가져가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하라는 뜻이고 또한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지할 때, 하나님이 필요로 할 때 채워주신다는 의미겠습니다.
또, 길을 가면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동양인들의 공통적인 풍속은 길에서 친지를 만나면 끝없는 문안으로 헛시간을 보냅니다.
어느 집사님이 심방을 가다가 친구를 만났습니다. “야 몇 해 만이냐” 길에서 이야기하다가 “이러지 말고 식사하러 가자”며 식사하고 다방에 가서 차 마시고 하다가 그냥 돌아왔답니다. 이는 1차, 2차, 3차 하지 말고, 도중에서 시간 낭비하지 말고 전도에 전념하고, 직행하라는 뜻입니다. 이는 예의적인 인사까지 금하신 것이 아니라 이 말씀은 제자의 임무가 긴급함을 말씀하신 것이겠습니다.

2. 둘째, 축복해 주라는 것입니다.(5,6)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그 집의 평안을 빌라고 하셨습니다. 모단체에서 조사를 했는데 보통 교회 장노님들이나, 권사님, 집사님, 성도들이 남의 집에 가면 눈을 감고 기도를 합니다. 왜 눈을 감고 기도하는가 그리고 무엇을 기도하는가 하는 질문을 던졌더니 대답의 80%가 아무런 생각 없이 그저 눈만 감았다 떴다고 대답을 했고 그리고 나머지는 다른 사람들, 목사님이나 장로님이나 권사님들이 남의 집에 들어가서 앉자 마자 눈을 감고 기도하니 그것을 보아서 자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남들이 하니까 한다는 것이였습니다. 믿지 않는 저의 삼촌도 우리 집에만 오시면 눈을 감고 기도를 하십니다. 그러는가 보다 하고 하신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오늘 본문 5절에 예수님은 이렇게 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이 집이 평안 할지어다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구절 때문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그냥 보내시지 않고 축복 권을 주셔서 보내셨습니다. 이 제자들이 주의 이름으로 복을 빌면 하나님이 축복해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 빈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하셨으므로 누구를 만나든지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기도는 많이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에게 주님이 부탁합니다. 제자들은 지금 전대나, 주머니나, 돈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어느 집에 들어가 유해야 될지, 뭘 먹을지,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제자들을 영접해 먹이고 입히고, 마시우고, 잡재우고, 신을 신기고, 선교할 수 있도록 돈을 대주라는 것이겠습니다. 이렇게 하면 제자들이 가서 빈 평안이, 그 집에 축복이, 그 집에 머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눅6:38절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약속하셨습니다.

한국 기독교 초창기 때, 백사금 집사님이라고 하는 남자 집사님이 계셨습니다. 어느 날 이 집사님이 나가는 교회에 부흥사경회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미국 선교사님이 오셔서 부흥사경회를 인도하게 되었습니다.
백집사님이 나가는 교회는 조그마한 오막살이 교회였습니다. 패가가 된 것을 수리해서 예배당으로 쓰고 있었습니다. 부흥회를 하면서 선교사님이 “이 교회도 성전 건축을 해야겠습니다. 주님은 희생할 자를 찾고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서 주님을 위해서 희생할 사람은 없습니까 여러분이 주님을 위해서 얼마큼 희생하느냐에 따라서 주님은 여러분의 앞날을 복되게 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을 했을 때. 이 백집사님이 그 말씀을 듣고 마음이 뜨거워졌다고 합니다. 눈물이 쏟아졌다고 합니다. ‘나를 위해 희생 제물이 되시고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주님에 대해서 내가 무슨 희생인들 못하겠느냐’ 이렇게 결심을 하고는 집회가 끝난 다음에 선교사님을 찾아가 물었습니다. “선교사님 땅이 얼마나 있어야 합니까” 하고 물었더니 선교사 말씀이 천 평의 땅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그 미국 사람들은 교회를 지을 때, 땅을 넓게 차지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천 평을 이야기 했나 봅니다. “또 성전 건축을 하는데는 돈이 얼마나 들겠습니까” 하고 묻자 “예 얼마 얼마쯤 들겠습니다”하고 대답해 주시더랍니다.
그 백집사님이 집에 돌아와서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했답니다. 다짐하는 기도를 했어요.
‘그래 이번에 내가 주님을 위해서 희생하자, 주님께 한 번 멋지게 희생하고 그리고 내가 주님께 가자, 하루 세끼야 못 먹고 살겠느냐’ 그렇게 생각하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밭 중에서 제일 좋은 위치의 천 평을 떼어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논과 밭을 팔아서 성전 건축비로 내놓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님! 다른 사람들은 바치고 싶어도 없어서 못 바치는데 제겐 바칠 것이 있어서 이렇게 바치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주여 감사합니다.” 그렇게 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교회 건축이 시작되었습니다. 교회를 건축하다가 보니 건축비가 모자라게 되었습니다. 결국 할 수 없어서 백집사님이 갖고 있는 집도 팔아서 그것을 건축비로 내놓았습니다. 이 백집사님이 순진해 가지고는 그 선교사님의 말에 그대로 순종해서 있는 집까지 팔아 가지고 그만 교회 건축비로 내놓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자기가 살 것은 남겨 놓고 바쳐야 되는데 그만 순진한 마음에 몽땅 다 바치고 말았습니다.
성전은 멋지게 지어졌는데 그만 이 백집사님이 농사를 짓고, 살집이 없게 되었습니다. 있을 거처도 없습니다. 교회를 아름답게 짓고 목사님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이 부임해 오셔서 보니까 교회는 아름답게 지어졌는데 이 백집사님의 형편이 말이 아닙니다. 살길이 막막한 것입니다. 할 수 없이 목사님이 백집사님 부부를 불러 놓고 “그러면 집사님, 교회에 들어와서 사시지요”라고 해서 백집사님이 교회 사찰로 들어와 살게 되었습니다.
자기 땅을 다 바치고 자기 집을 다 바치고 이제 교회 사찰로 봉사하면서 완전히 희생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동네 사람들이 욕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를 믿어도 적당히 믿어야지 저렇게 미쳐서야 되겠느냐”고 “저렇게 빈 털털이가 되가지고 저거 무슨 꼴이냐”며 동네 사람들이 백집사님을 상대해 주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외로웠겠습니까 그런데도 백집사님 부부는 사찰로 살면서 두 부부가 교회 마루에 엎으려서 매일매일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날마다 엉엉 울면서 어깨를 들먹거리면서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그 우는소리를 들으니까 얼마나 가슴이 뜨끔뜨끔하겠습니까 백집사님 부부가 교회에서 엎드려 울면서 기도할 때마다 목사님 간이 콩알만해지는 것입니다. “아이고 저 부부가 옛날 집과 농토를 다 바치고 저렇게 살길이 막막하니까 그게 안타까워서 우는가 보다 얼마나 그게 생각날까” 하고 그 기도하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저 간이 콩알만해지는 것입니다. 그 부부가 무엇을 기도하는가 알고 싶어서 한 번은 몰래 가서 들어봤답니다.
이렇게 기도를 드리더랍니다. “주님! 우리는 이대로 살다가 천국을 가면 됩니다. 주님 만나면 거기서 우리는 행복합니다. 그러나 하나 밖에 없는 이 아들을 공부시킬 길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 부모 때문에 이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공부시킬 길을 막아만 놓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공부시킬 길이 없겠습니까” 하며 울면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전 재산을 하나님께 몽땅 바치고 나니까 자식을 공부시킬 길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 부모 때문에 자식의 장래를 막아 놓은 것 같아서 그게 안타까워 이 부부가 하나님께 울면서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이 이 기도 소리를 듣고서는 너무나 감격해서 “그러면 내가 이 일을 해결해 주어야 겠다”고 생각하고서 친구 목사님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했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그 옛날 기독교 초창기 때만 하더라도 목사님들의 생활이 다 어려웠습니다. 다 가난하고 그래서 아무도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소문이 결국 목사님의 입을 통해서 어디까지 퍼졌느냐 하면 결국 서울까지 퍼지게 되고 연세 대학교 뒤에 선교사들이 살고 있는 곳까지 퍼졌습니다. 마침 백집사님이 있는 교회에 와서 부흥사경회를 인도했던 그 선교사님의 귀에까지 이 소식이 들리게 되었습니다.
이 선교사님이 마침 안식년이 되어서 미국으로 들어가려고 귀국 준비를 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님이 급히 평양으로 가서 그 백집사님을 만나 보게 되었습니다.
“집사님 참 큰일을 하셨습니다. 주님이 크게 기뻐하고 계실 것입니다. 천국 가셔도 집사님 내외분께는 큰 면류관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집사님 소원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예, 선교사님 제게 하나 밖에 없는 이 아들을 공부시키는 것입니다.”라고 대답을 합니다. 그래서 선교사님이 미국에 데리고 가서 공부를 시켜 주기로 하되 공부하는 동안 서로 절대 편지 왕래를 하지 않기로 하고서 보내기로 했습니다. 선교사가 이 백집사님의 외아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공부를 시켰습니다. 미국에서 중,고등학교, 대학교까지 공부를 시키고 대학원까지 보내서 박사 학위를 받게 되었습니다.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프린스턴 신학대학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세월이 19년이 흘렀습니다.
서울에 있는 연세 대학교에서 한국인 총장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때까지는 미국인 총장 언더우드 박사가 총장으로 계시다가 이제 한국에서의 일을 끝내고 미국으로 들어가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후임자로 총장 감을 찾고 있었는데 한국에서는 총장 감을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총장이 되는 조건이 첫째, 목사이어야 되고, 둘째는 교수 신분이어야 하며, 그리고 박사 출신이어야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한국에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연세 대학에서 세계 각지로 수소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마침 프린스턴 신학대학에서 한국인 목사로서 교수로 있고 박사 학위를 취득한 분이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연세 대학교에서 사람을 보내어서 그분을 모셔 오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바로 백낙준 박사였습니다. 바로 그 백사금 집사님의 외동아들이었습니다. 이분이 초대 연세 대학교 총장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신실하십니다.
“주라 그러면 그러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주님은 이런 이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 제자들에게 “어느 동리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 놓은 것을 먹고”(8) 자고 마시고, 유하라(7,8) 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병자를 고쳐 주라고 하셨습니다.(9)
예수님은 70인에게도, 12제자들처럼(9:1) 병을 고치고,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하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복음의 핵심인 동시에 하나님의 통치하는 세계를 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권을 선포하는 것이겠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않으면 사단의 통치를 받습니다.
지금 70인 제자들이 전하는 복음을 영접하지 않으면 어떻게 된다고 하십니까
① 12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 날에 소돔이 그 동네보다 견디기 쉬우니라” 하셨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소돔성은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악하고 음란한 도시였습니다.(창13;13) 이런 이 도성을 하나님은 유황불로 멸하셨습니다.(유7)
지금 예수님께서 보내신 제자들을 배척하고 제자들이 전하는 복음을 영접치 않으면 소돔성이 견디기 쉬웠으면 쉬웠지 멸망을 면키 어려울 것이다고 했습니다.

② 또, 제자들이 전하는 복음을 영접치 않으면 두로와 시돈이 오히려 견디기 쉬우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고라신과 벳세다에 많은 이적과 권능을 행하셨습니다. 이 두 도시에 행한 이적과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 행했다면 이들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하셨습니다. 두로와 시돈은 이방 땅이요, 부패의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구약에는 자주자주 저주의 대상이 되던 도시였습니다.(사23장) 그래도 오히려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견디기 쉽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요, 목이 곧고 말씀을 받아 드리지 않는 자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이겠습니다.

③ 또, 15절을 보십시오.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까지 낮아지리라”
가버나움은 예수님의 본거지요, 예수님이 3년 동안 활동하신 설교의 무대였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예수님은 가장 많은 이적과 기적 그리고 표적을 보시고 말씀을 많이 남기신 곳인데 이 가버나움 사람들이 교만하고 말씀에 면역이 생겼는지 말씀을 받아 드리지 않고 예수님의 이적이나 축복을 당연한 것처럼 여기고 회개치 않았습니다. 믿음으로 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음부까지 낮아지리라 지옥까지 떨어지리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16절을 보십시오.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의 전권대사를 맡기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양이 이리 가운데 보내신다 하시면서도 어마어마한 특권들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각 동네 각처로 다니다가 복음을 거절해도 하나님 나라의 전권대사라는 것을 심어 주셨습니다.(16)
그러므로 보내심을 받은 사도로서의 확신(Apostle Ship)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추수하는 주의 일군이 얼마나 귀하고 존귀하기에 “너희 말을 듣는 것이 내 말을 듣는 것”이라고 하셨겠습니까

Ⅱ.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17-20)

70인 제자들은 선교를 하고 돌아왔습니다. 선교의 기간은 얼마였는지는 모르지만 상당한 시간이 걸린 것으로 봅니다. 이렇게 선교 활동을 하고 돌아와 선교 활동 보고를 하는 것이 17-20절까지 입니다.
이 칠십 인이 기뻐 돌아와 말하기를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17)

제자들의 말 한마디에 귀신들이 쫓겨가는 것을 보고 신이 나고 기뻐서 예수님께 선교보고겸 자랑을 하는 것이 였습니다. 병을 고치는 능력과 귀신들이 떠나가는 신기한 능력들이 자기들에게 있는 것을 보고 제자들은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70인 제자들이 나가서 전도하는 동안에 사단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셨다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한사람 한사람 전도하면 사단은 물러가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전도로 사단의 세력이 거꾸러지는 놀라운 승리의 역사를 목격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셨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능력을 행하고 마음이 들떠 있는 제자들에게 제자들이 잘라서 무슨 일을 행한 것이 아니고 19절에 그런 권세를 하나님이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몇 해전에 이 선이 성도님이 귀신이 들어 횡설수설하고 눈까지 어두울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니 당장에 귀신이 나가고 이 분이 기뻐하며 “목사님 내 눈이 밝아졌습니다”하고 그 자리에서 성경도 읽고 찬송도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 때, 집으로 돌아오면서 얼마나 신이 났는지. 그러나 이것보다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즐거워하라”는 이 성경 구절이 생각나서 더더욱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 것을 기억합니다.

Ⅲ.예수님의 감사(21-24)

70인의 보고를 받으신 예수님은 심히 기뻐하시고 감사하셨습니다.
이 기사는 마태11:25-27절의 말씀과 문자적으로 거의 동일합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이 때에> 선교 보고를 받으신 때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기뻐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천지의 주제이신 하나님이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옵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하나님의 뜻이니이다”
스스로 지혜 있다 하던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하나님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어린아이와 같이 단순히 믿고 순종하여 떠났던 제자들은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체험했습니다. 이렇게 하심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님은 기뻐하시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셨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의 보는 것을 보는 눈이 복이 있도다” 하셨습니다.
여기서 제자들이 보는 것이란 예수님의 이름 앞에 귀신들이 굴복하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오셔서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죄인들을 구원하는 역사입니다.
이 일은 많은 선지자들과 임금들이 보고자 했으나 보지 못했고, 듣고자 했으나 들을 수 없었던 것이었습니다.(24)
그러나 제자들은 지금 이 놀라운 그리스도의 구속의 역사를 보고, 듣고 지금 동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복음의 일군이된 것이 얼마나 축복된 일인가를 깨우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나 모세나 이사야나 다윗 왕이나 솔로몬 왕보다 더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이 축복은 바로 우리가 현재 누리고 있는 축복입니다.
선지자들이 예언했고, 열왕들이 사모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비밀을 깨닫게 하시고 마귀의 권세에서 벗어나 천사도 흠모하는 복음의 일군을 삼으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찬양합니다. 이 주신 사명을 겸손히 잘 감당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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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0.

2. 주일 낮 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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