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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할례의 언약 (창 17: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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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람의 신앙 문제는 언약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이 언약을 잊어버리고 휘청휘청하니까 지난 시간에 하나님은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하시며 찾아 오셔서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 하라” 좀 신앙생활을 똑똑히 하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도 아브라함이 언약을 잘 지키지 않으니까 그 언약을 지키도록 할례의 언약을 주십니다. 이 할례를 하므로 이것을 볼 때마다 언약을 기억하며 언약을 지키며 살도록 하셨습니다.
17장에서는 언약이란 말이 13번이나 나옵니다. 그 중에 “내가 내 언약”이라고 한 말이 9번이나 나옵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일방적으로 주도적으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게 하시고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는 것도 하나님의 일방적인 부름에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아브라함이 남보다 더 의롭고, 깨끗하고, 정결하고, 도덕적인 삶을 어느 수준에 도달한 다음에 윤리 생활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주도적으로 아브라함을 먼저 부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75세 때,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에 대하 아브라함의 응답은 바로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떠나라는 말씀을 믿고 그대로 고향을 떠납니다. 갈 곳을 알지 못하고 떠납니다.
그리고 너로 큰 민족을 이루리라는 말씀을 믿고 그대로 나서게 됩니다. 이제 아브라함은 오직 하나님만 믿고, 이방 땅에서 유리 방황하면서 나그네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주신 이 약속을 그(아브라함)가 굳게 지키지 못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했으면 흉년이 들든지, 태풍이 불든지, 홍수가 나든지, 전쟁이 일어나든지 상관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 땅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땅이다, 하나님이 주리라고 약속한 땅이다 하며 그 땅에 그대로 거(居)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흉년이 들 때, 하나님 앞에 기도하거나 의논 한 마디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애굽으로 내려 가 버립니다. 그러나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아니하고 애굽으로 내려간 것은 잘한 것입니다. 만약 고향으로 돌아갔다면 다시 고향을 못 떠날 것입니다. 그러나, 이방 땅에 잠시 갔다 돌아오리라 생각했는데 어쨌든 이것도 그는 잘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지키지 못하고 휘청거린 것입니다.
또, 그런가 하면 하나님께서 자식을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식을 주리라고 하신 그 약속을 믿고 10년을 기다렸습니다. 그 10년이란 시간이 긴 시간입니다. 이렇게 기다렸지만 그는 결국은 그 약속을 지키는데 있어서는 굳건하지 못했습니다. 그만 사라와 의논해서 이스마엘이라는 서자를 낳게 됩니다. 이게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실수입니까 그리고 또 13년간 이스마엘에게 빠져서 허우적거리니 하나님이 이대로 두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셨는지 아브라함이 99세 때 찾아 오셔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 하라”(17:1) 어찌하여 이렇게 휘청거리느냐 하시며 책망을 하시고, 다시 언약하시기를 17:4절에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 국의 아비가 될지라” 자식을 주겠다고 한 번 더 말씀을 하십니다. “나라들이 네게로 쫓아 일어나며 열 왕이 네게로 쫓아 나리라” (17:6)
그리고 “너의 우거하는 땅 가나안 일경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겠다” 하십니다. 하나님이 땅을 너와 네 후손에게 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17:8)
17장에는 하나님께서 자식을 주마, 땅을 주마 한 것을 한 번 더 확인하시고 그것을 이룰 것을, 그 증거로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꾸어 주시었습니다. 자식을 낳아 “열 국의 아비”가 될 것을 이름으로 확인시켜 주셨습니다.(17:5)

처음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아브라함의 신앙 문제는 언약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언약하신 것을 잊어버리고 휘청휘청하는 것이고, 왜곡되게 생각해서 자꾸 곁길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그의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다시 한 번 더 약속을 하시며, 나는 약속을 지킨다 네가 100세가 되면 자식을 준다 하시면 주시고, 가나안 땅에 사람이 살고 있든지 이 땅을 준다면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니까 휘청휘청하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줄 수 있는 하나님으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하십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9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했습니다. 언약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나는 지킬테니 너도 지키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일방적으로 주도적으로 한 전능한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못하고 흔들흔들하니까 9절에 “하나님이 또” 하는 “또”가 나옵니다. “또”는 아브라함이 잘 안 들으니까, 잘 지키지 않으니까 또 하고, 또 거듭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전능한 하나님이 몇 번 말해서 안되니까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이름을 바꾸어 주시다가 이제는 살에다 새기도록 해서 잊어버리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누군가가 아브라함에게 “아브라함, 아브라함” 하고 그의 이름을 불러 주면 ‘아이쿠, 하나님이 나로 열 국의 아비가 되게 하고 나에게 자식을 준다 하셨지’ 라고 기억하게 하시고, 이름으로 인하여 언약을 기억하고 믿고 지키도록 하셨습니다. 또, 할례를 하도록 해서 아브라함이 소변을 볼 때마다 ‘하나님이 나에게 땅을 주신다고 하셨지’ 하며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토록 한 것입니다. 이렇게 표를 준 것은 휘청거리지 않도록 준 것입니다. 이름을 바꾸고 그래도 안되니까 살에까지 새겨 가며 언약을 기억하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찬양 찬양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할례의 약속을 주시는데 어떻게 지켜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하셨습니다.
할례(割禮; Circumcise)란
남성 생식기의 끝 부분을 덮고 있는 표피를 자르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포경 수술을 말합니다. 이 할례는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을 이방인들로부터 구별한다는 의미가 있고, 이스라엘이 된다는 표로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표시이겠습니다. 오늘은 이 할례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혈통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혈통이라고 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자손이라고 할 때 꼭 내 몸에서 난 것, 내 젖을 먹이고 내가 키우고, 내 피가 석이는 혈육적인 것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됨은 혈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언약의 후손이라고 하는 것은 혈통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고, 언약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에 그 혈통적인 계승을 깨고, 언약적 계승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할례입니다.

11,12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양피(陽皮)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에 언약의 표징이니라 남자는 다 할례를 받는데 집에서 난 자든지, 돈을 주고 사 온 종이든지 상관없이, 까맣고, 희고, 노릿장하든지 상관없이 누구의 자손이냐,어느 족속이냐 물을 것 없습니다. 혈통적으로는 상관이 없고 문제는 이 언약을, 이 약속을 믿고 이 약속의 표를 받으면(할례) 유대인이 되는 것입니다. 여긴 엄청난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날도 이스라엘에 가보면 이게 이스라엘인이다, 전통적인 이스라엘인이 이런 것이다 하고 구분을 잘하지 못합니다. 코는 매부리코 같이 쑥 나오고, 눈은 쑥 들어가고, 키는 서양 사람보다는 조금 작고하는 등의 이야기를 합니다만, 절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유대인들의 숫자는 많지 않습니다만, 까만 사람, 흰 사람, 희지도 검지도 않은 사람, 꼭 한국 사람과 같은 사람, 하여튼 여러 가지 유형입니다. 어떻게 말하면 잡종입니다. 혈육적으로는 잡종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이스라엘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 약속을 받고 그 약속대로 할례를 받은 자는 다 이스라엘인입니다. 그러므로 할례가 이스라엘이고, 혈통이 이스라엘이 아니라는 말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란 할례의 표에 의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받아야 합니다. 난지 팔 일 만에 못했으면, 지금이라도 받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99세 때 할례를 받았고, 이스마엘은 13살 때 할례를 받았습니다.(17:24-25)

또, 12절에,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17:12) 했는데, 그 의미는 윤리 이전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됨은 윤리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인 언약에 있는 것을 말합니다. 난 지 팔 일이 된 갓난 아이는 윤리에 의해서 이스라엘 됨이 아니고, 윤리 이전에 하나님의 사람으로 지명되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대대로 지켜라 했습니다.
할례를 받은 자손이라 해서 자동적으로 이스라엘이 되는 것이 아니오, 그가 또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해서 계속 이스라엘 자손이 되는 것이 아니고 할례를 받아야 이스라엘 자손이 됩니다.

또한 할례의 의미는 복음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될 그 백성에 대한 상징적인 것입니다.
이것은 표요, 하나님의 사인을 뜻합니다. 몸에 새기는 것입니다. 너는 내 것이라고 하는 사인으로의 의미입니다.
이와 같이 그 할례의 의미가 그대로 이제 와서 세례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유아 세례라고 하는 것은 할례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의식과 형식은 다르지만 내용은 할례적입니다.
할례의 뜻은 “수치스러운 것을 끊어 낸다”는 의미입니다.
세례 역시 “죄악을 장례 지낸다”는 뜻입니다. 유아 세례는 아주 어릴 때 받습니다. 윤리가 있기 전에 먼저 세례를 줍니다. 그리고 그 세례에 합당한 생을 살도록 키워 갑니다. 그래서 ‘내가 유아 세례 교인이다’라는 것을 항상 기억하고 그 언약을 기억하여 멀리 가지를 못하고 갔다 가도 돌아오게 합니다. 그래서 이 표가 중요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할례의 표를 몸에 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나와 가나안 땅에 살 때 하나님께서 좀 표를 주어서 땅에 금을 긋는다든지, 말뚝을 박아 둔다든지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아니면 성(城)이나 비석을 세워 놓고 여기서부터 몇 km는 너의 땅이라고 하였더라면 좋겠는데 넓은 벌판에 이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준다 라고만 하셨습니다. 표가 없이, 눈에 보이는 표가 없으니까 흉년이 되면 에라! 하고 애굽으로 내려간 것입니다.
또, 자식을 준다고 하시고는 몇 년 후라고 하시는 말씀이 없어서 10년을 기다리다 씨만 아브라함의 씨면 되겠지 하는 왜곡된 생각을 하여 첩을 두고 이스마엘을 낳습니다. 어떻게 보면 땅에다 지정표를 만들어 주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요, 땅에다 줄을 긋고 성을 쌓아 놓고 이 안의 것은 다 네 것이다 하였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또, 너에게 자식을 주는데 몇 년 뒤에 준다든지, 꼭 사라를 통해 준다고 했으면 좋았겠는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으시고, 하나님은 표를 몸에다 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휘청휘청하니까 영원히 언약을 기억하도록 가장 가까이 하루에도 몇 번이고 언약을 기억하도록 몸에다 표를 주었습니다. 이것이 할례입니다.

우리는 결혼을 할 때 서로 사랑한다는 표로 반지나 예물을 서로 주고받습니다. 이 반지를 끼워 주는 것은 사랑한다는 표시이기 보다 서로 변하지 않는다는 언약의 증표로 줍니다. 그래서 이것을 늘 끼고 다닙니다. 끼고 다니면서 자신도 나는 누구의 사람이다, 사랑해야지, 변하면 안되지 하며 언약을 기억합니다. 이 반지는 세수할 때 빼기도 하고, 일할 때 빼 놓기도 합니다. 뺏다가 끼웠다가 합니다. 하나님은 끼웠다 뺏다 하지 못하도록, 잊어버리지 않도록 아예 몸에다가 표를 주셨습니다. 아예 영원히 살에 새겨 버렸습니다. 지울 수 없도록 하셨습니다.
사실 이 표가 중요합니다.
독일 사람인 히틀러가 유대인 600만을 죽일 때 이스라엘 사람들을 잡아다가 놓고 바로 이 표를 증거로 죽였습니다. 너 이스라엘 사람이지 하면 아니라고 하니까 바지를 내려 표를 보고 죽였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이 표가 없으면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했습니다.
그가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했습니다. 이 표 때문에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합니다. 아주 지워지지 않는 표, 영원한 표를 가지길 원합니다. 그리고 이 약속을 자랑하고 살기를 원하십니다. 영적으로 말씀을 드리면 우리는 구원의 표를 받고 삽니다. 그것이 십자가이기도 하고 세례이기도 합니다. 그 표는 지워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주도적으로 세운 언약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십자가 구속 사건을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는 표는 “십자가”로 세우셨습니다. “세례”로 세우셨습니다. 그것을 보며 구속의 은혜를 늘 지니며, 자랑하며 살기를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1996.

3. 2

4. 주일 낮 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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