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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하나님 (창 2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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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제가 살았던 집 건너편은 대장장이의 집이었습니다. 무딘 농기구를 모아서 일년에 한두 차례씩 벼름을 합니다. 녹이 쓸거나 이빨이 빠졌거나 부러졌거나 날이 무디어진 농기구를 풀무에 넣고 시뻘겋게 달구어 끄집어내어서 망치로 때리면 불순물이 떨어지고 쇠가 강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찬물에 집어넣고, 이러기를 여러 차례 합니다. 이렇게해서 낡은 농기구는 대장장이의 손에서 다시 만들어지게 됩니다. 때론 잘리고, 늘구고, 붙이기도 해서 쓰기에 좋은 농기구로 만들어 냅니다.
하나님께서는 갈대아 우르에 사는 아브라함을 75세에 부르셔서 여러 가지 시련을 통해서 성숙한 믿음의 사람으로 키우셨습니다. 그리고 약속하신 아들 이삭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방 나라들이 두려워 하리만큼 아브라함을 축복하시고 높여 주셨습니다.
오늘 말씀도 역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이 될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시키기 위해서 시험(Test) 하시는 대목입니다.

Ⅰ.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하나님(1-2)

1절을 보십시오.
“그 일 후”란 말이 나옵니다. 그 일이란 앞서 20장의 그랄 왕 아비멜렉과의 사건이 있은 후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부름을 받고 여러 가지 시련을 겪고 모든 약속이 성취되어 축복을 받고, 아브라함의 소원이 모두 성취된 후를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모든 문제를 해결 받고 행복하게 된 때입니다.
이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하셨습니다.
시험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이 있고 사단이 주는 시험이 있습니다. 사단이 주는 시험(temptation)은 우리로 하여금 죄에 빠지게 하는 것으로 유혹이라 하겠습니다. 또 하나의 시험(test)은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시련을 겪게 하여 믿음을 더욱 키우고,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해서 우리를 단련시키는 것입니다.
예컨대 중. 고등학생들이 학교에서 시험을 자주 봅니다. 이는 학생들을 테스트(test) 하기 위해서입니다. 얼마나 실력이 향상되었나, 어느 과목이 쳐지느냐를 알기 위해서 시험을 봅니다. 그래서 부족한 부분을 시험(test)해 봄으로서 자신의 실력을 자신이 알고 또 교사가 알아서 부족한 부분을 보충해 갑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시험(test)하시므로 아브라함과 더욱 더 깊은 사랑과 순종의 관계를 맺고, 받은 축복을 감당하는 믿음으로 성장하게 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어떻게 시험하셨습니까
2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山)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언약의 씨요, 축복으로 주신 독자 이삭을 다시 하나님께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네 아들”, “네 독자”, “이삭”이라고 하는 것은 아브라함의 분신이라는 것입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그의 모든 것의 전부입니다. 그런 그 아들을 하나님은 모리아 땅으로 데려가서 “내가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했습니다.
번제(燔祭)란 무엇입니까
제물을 죽인 후 각을 떠서 불에 태워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입니다. 원래 율법의 제물은 소나 양이나 비둘기를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이삭을 소나 양이나 염소처럼 죽여서 각을 떠서 불 위에 올려놓고 태워서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번제로 드린다는 것은 전적인 헌신과 사랑의 봉헌을 의미합니다.(레 1:3-17, 6:8-13)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표시로 바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가, 축복으로 주신 이삭을 더 사랑하는가 시험해 보시려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축복을 주신 하나님이냐 축복으로 주신 이삭이냐 를 선택하는 문제였습니다 우리는 축복을 받았을 때 축복을 주신 하나님보다 복을 더 사랑하기 쉽습니다. 이것은 돈을 주신 아버지보다 지갑을 더 좋아하는 아이와 같습니다. 축복 그 자체만 사랑하다 보면 하나님을 잊어버리기가 쉽습니다. 이삭을 사랑하다 하나님을 잊어버리면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그러므로 축복을 주신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삭은 이브라함이 100세에 낳은 유일한 피붙이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25년 동안 훈련하신 후 믿음의 열매로 주신 약속의 자식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별처럼, 땅의 티끌같이 많은 자식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삭을 바치라니... 이 때 아브라함은 다음과 같은 이유를 제시하고 안 바칠 수 있습니다. ①‘양이나 소나 염소를 번제로 바치라면 모르겠지만 어찌 사람을 번제로 드리라는 것입니까 이방 종교에서는 사람을 불에 태워 제사를 지내는 경우는 있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에게 이런 것을 요구하시다니, 율법에도 없는 것이 아닙니까’ ②‘이삭이 약속의 자녀인데 이것을 바치면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되는 겁니까 하나님은 어째서 이랬다 저랬다 하십니까’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③ 또 아브라함은 이삭을 위하여 이스마엘을 쫓아내라 하실 때 쫓아냈습니다. 이스마엘을 쫓아 낼 때도 살을 도려내는 아픔이 따랐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심히 근심되었다’고 했습니다.(21:11)
그런데 이제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린다면 아브라함 편에서는 두 자식을 한꺼번에 잃는 것입니다. “그렇게는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도 입장 바꿔 놓고 생각해 보십시오” 라고 하며 안 바칠 수 있지 않았겠습니까

Ⅱ. 순종하는 아브라함 (3-10)

그러나 아브라함은 어떻게 했습니까
3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하나님이 지시하신 곳으로 떠났습니다. 그것도 아침 일찍이... 딴 일할 겨를도 없이 맨 먼저 하나님의 일을 최우선으로 했다는 것입니다.
브엘세바에서 모리아 산까지는 사흘 길이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망설이거나 우물쭈물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지자 아침 일찍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함께 이삭을 데리고 떠났습니다. 곧바로 순종했습니다. 그는 떠날 때 아내 사라와 상의하지 않았습니다(

3. 갈 1:16). 성경에는 의논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그의 아내를 무시해서라기보다도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을 우선 순위로 놓았기 때문이요 또 아내와 의논하면 하나님 앞에 순종하지 못할까봐 의논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지면 순종할 환경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처럼 “예(Yes)"만 있도록 했습니다.(고후 1:17-19)
아브라함은 두 사환과 이삭을 데리고 사흘 길을 가서 눈을 들어서 먼 곳을 바라보니 하나님이 지시하신 산이 눈에 들어 왔습니다. 그러자 어떻게 했습니까 종들을 떼어놓습니다. 두 종들을 보며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며 못 따라 오도록 했습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아브라함은 사흘 길을 가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이삭을 시험 들지 않고 바칠까 생각했을 겁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종들을 산기슭에 떼어놓고 갑니다. 행여나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고 할 때 종들이 달려들어 이삭을 제물로 못 드리게 방해를 할까 봐서 떼 놓고 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할 수 있는 영적 환경을 미리 미리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삶의 방법을 우리 성도가 배워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종들이 지금까지 지고 오던 번제 나무를 취하여 아들 이삭의 지게에 옮겨 지우고 아브라함은 불과 칼을 손에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부자(父子)가 모리아 산(山)을 향해 올라갑니다. 정상까지 올라가려면 얼마만큼이나 더 가야 하는데 산 중턱에 이르렀을 때쯤 이삭이 아버지를 부릅니다.
“아버지!”
“오냐. 내 아들아 듣고 있다 말해 봐라.”
“아버지! 불과 나무는 있는데 번제할 어린양은 어디 있습니까”
이삭은 지금까지 아버지가 드리는 제사를 많이 보아 왔습니다. 적어도 제사를 드리려면 소나 양이나 염소나 비둘기나 아니면 곡식이나 가루라도 있어야 하는데 제물이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고, 또 제사를 지내려면 일거리가 많은데 종들은 다 돌려보내지... 이삭으로서는 좀 낌새가 이상해서 가던 발길을 돌아서며 아버지에게 묻습니다.
“번제할 나무도 있고 불도 있는데 제물은 없지 않습니까 제물은 어디 있습니까”
이렇게 묻는 아들을 바라보는 아브라함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그런데 이 무서운 질문은 이삭의 입을 통해서 사단이 말하고 있는 겁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속에 잠재되어 있는 인간적인 정과 욕심에 호소하여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게 하려는 의도였습니다. 이것은 사단의 최후 발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같은 경우가 마태복음 16:22에 나옵니다. 가이샤라 빌립보 도상에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있은 후 비로소 예수님은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고난을 받아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고 하시자 베드로가 주님을 붙잡고 말립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가장 가까운 베드로의 입을 통해 사단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못 지게 호소합니다. 예수님의 정과 욕심에 호소하고 매달렸습니다.
사단은 이삭의 입을 통해 지금 불과 나무는 없거니와 번제할 어린양은 어디 있냐고 호소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도록 하려고 합니다. 이 소리를 듣는 아브라함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조금도 요동치 않고 “아들아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대답은 그렇게 했었지만 제물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이삭’이라고 찍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제물이 달리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다만 히브리서 11:19를 보면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 한지라’고 했습니다. 이삭을 번제로 드리면 전능한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렇게 이삭을 드릴 수 있었던 것은 부활 신앙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지시하신 곳에 이르러 그 곳에 단을 쌓고 장작을 벌여 놓고 아들 이삭을 묶었습니다. 그리고는 그를 단 위에 올려놓고 손에 칼을 잡아 손을 들어 내리치려는 순간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히브리서 11:17을 봅시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더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드렸다고 하면 드린 것입니다. 칼을 들어 내리치는 아브라함을 가만히 두면 내리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드렸다”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처럼 진정으로 복의 근원이 되려면 받은 축복보다 복을 주는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사랑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한 것은 시험(Test)을 한 것입니다. 이 시험에 아브라함은 합격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치라 하는 이삭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다 이 시험(Test)에 합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마디-내가 드릴 이삭은 무엇입니까

1996. 6.

9. 주일 낮 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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