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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불가항적 용기 (행 04: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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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우리는 전에 별로 듣지 못하던 말을 많이 듣습니다. 옛날사람들에게 이 말을 한다면, 아마 설명를 해도 한참은 해야 될 것입니다. ‘오렌지족’--무슨 말인지 당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입니다. 누구인가 여기에 이런 해설을 붙였습니다. 갖고 싶은 것 다 가지고,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하고 싶은 일 다 하는, 그런 아이들을 오렌지족이라고 한답니다. 일리가 있는 해설입니다. 또하나, ‘마마족’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마마족에 속하는 아이들은 비교적 멀끔하게 생기고, 제법 공부도 잘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용기가 없다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어머니에게 물어보아야 되고, 어머니의 간섭이 없이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홀로 설 수 없는 나약한 인간을 말합니다. 또, 옛날부터 쓰이는 말로 영어에 ‘chicken’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chicken’은 어디까지나 ‘닭’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용기없는 사람을 가리켜 ‘chicken’이라고 부른다는 것입니다.
현대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용기입니다. 그런데 용기에 대하여 착각이 있습니다. 돈이 있으면 용기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다 아는 바와 같이, 오렌지족이 가장 용기가 없습니다. 또한 지식과 환경이 용기를 준다고 착각합니다. 공부를 많이 하면 용기가 생기가 생길 것이라고, 환경이 좀 좋아지면 용기가 생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찌 보면 이것은 정반대입니다. 결코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또한 사람들의 성원과 지지를 받으면 용기가 생길 것이라고 여깁니다. 이것도 큰 오해입니다. 지식은 근심을 더해줍니다. 전도서 1장 18절을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많이 공부하고 많이 알면, 그에 따라서 용기의 사람이 될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막연한 소원일 뿐이요, 사실은 그와 같지 않습니다. 돈이 많으면 걱정거리가 많습니다. 또, 경험이 많으면 용기가 있을 것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점점 더 소심해집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말씀합니다.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시 121:1)”--내가 무엇으로부터 용기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냐고 부르짖는 것입니다.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 121:1)”--오직 하나님께로서만 용기가 있는 것이라 하심입니다. 여러분, 이제 생각을 정리해보세요. 돈이 있어서, 지식이 있어서, 환경이 좋아져서, 일의 여건이 잘 조성되어서, 그럼으로써 내가 용기의 사람이 될 것이라고, 아니, 내가 용기가 없는 비유는 바로 이 환경 때문이라고--더는 그렇게 스스로를 속이지 맙시다. 그것은 변명입니다. 오히려 더 어렵고, 더 가난하고, 더 고통스러울 때에 역설적으로 용기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여러분도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새삼스러울 것이 없습니다.
또한 사람들은 도덕성에 기대합니다. 깨끗한 사람에게 용기가 있고, 의로운 사람에게 용기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이 그러하기도 합니다. 성경도 그렇게 증거합니다. 무릇 죄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쳐야 합니다. 아무도 자기를 보지 않아도 그는 두려움 속에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고로 도덕적 정결이나 의가 용기의 근본이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율법적 용기, 율법이 주는 이러한 용기에 의지함이 이론적으로는 가능합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마침내 용기를 얻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지도 않을 뿐더러, 하나님 앞에서 의롭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의가 용기의 근본인 것까지는 알고 있으나, 내 의가 바로 세워지는 때가 없으니 내 용기도 없을 수밖에요. 용기가 실종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또다른 깊은 의미에서 성경으로 돌아가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은혜 안에 참용기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 오직 하나님의 사랑--이것을 바로 깨달을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용기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초대교회 당시의 베드로와 요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지금 산헤드린 공회 앞에 섰습니다. 바로 이 자리에서 며칠 전에 예수님께서 재판을 받으셨습니다. 재판이란, 바른 법과 범(汎)이해와 의에 서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산헤드린 공회가 의를 떠난 지는 이미 오래됐습니다. 빌라도 법정이나 산헤드린 공회는 결코 믿을 수 없는 법정입니다. 겉으로는 빌라도 법정를 빙자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마는 그실 여기 산헤드린 공회에서 먼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을 것을 결정했습니다. 그런고로 베드로는 이 법정이 어떤 곳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이 공회는 생사권을 쥐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베드로는 바로 며칠 전에 예수님께서 재판받으실 때, 예수님께서 어떻게 되시는가 보려고 이 법정 한쪽 구석에서 불을 쬡니다. 그러다가 한 여자가 ‘너는 갈릴리 사람이다’할 때에 아니라고, 나는 예수를 모른다고 합니다. ‘당신은 예수의 제자같다’할 때에 아니라고 합니다. 부인하고, 맹세하고, 저주까지 했습니다. 이른바 베드로의 ‘3중 부인(否認)’입니다. 참으로 비겁했습니다. 비참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겠다고 맹세한 게 바로 몇 시간 전인데, 그 용기와 그 의지가 여지없이 무너져버립니다. 정말 그러합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예수님을 부인했던 바로 그 시간을 생각하며 일생을 두고 마음아파하고 괴로워했다고 합니다.
유럽을 다니다보면, 특별히 독일에서는 어디를 가나 신교 예배당의 종탑을 보게 됩니다. 우리네 교회의 종탑 꼭대기에는 십자가가 세워져 있는데, 독일의 교회는 닭 한 마리의 모양이 올려져 있습니다. 종탑 꼭대기에 닭이 있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여러 사람들에게 몇 번이고 물어보았지만, 아무도 그 정확한 이유를 모른다고 합니다. 그저 그것을 보고 생각하는 대로 생각하라고 그럽디다. 자, 예수믿는 사람이 그 닭 한 마리를 보면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이 베드로 사건입니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마 26:75)”하신 주님의 말씀을 되새기면서, 그 비참했던 시간을 베드로는 죽을 때까지 아파했습니다. 어디서 닭소리만 들려오면, 어쩌면 내가 그렇게까지 비겁했던가 하고 자신을 새삼새삼 일깨웠다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지 않겠습니까 베드로에게 닭 한마리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어디 베드로뿐이겠습니까 깊이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그런 순간이 있었을 줄로 압니다. 나를 각성케 하는 결정적 사건이 있는 것을 압니다. 나약했고, 비겁했고, 비참했던 바로 그 현장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바로 그 자리에, 오늘 이 시간에 베드로가 섰습니다. 지금은 당당한 사람으로 섰습니다. 용기의 사람으로 섰습니다. 그리고 산헤드린 공회 앞에 큰소리를 칩니다. 달라진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성령의 충만입니다. 성령으로 인하여 중생하고, 성령으로 인하여 성화되고, 성령으로 인하여 증거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행 1:8)”입니다. 권능, 이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권능이 곧 용기로 통하는 것입니다. 권능이라고 해서 원수를 죽인다는 것도 아니고, 나라를 빼앗는다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성령을 받으면 권능을 받는다’입니다. 권능은 바로 용기로 통합니다. 지식과 경험과 환경과 여건은 그대로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전보다 더 악화된 상태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에게는 용기가 있습니다. 불가항적 용기입니다. 누구도 말리지 못합니다. 신비로운 용기입니다. 불가지적 용기입니다. 그러니,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은 이를 이상하게 여길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의 본문을 보니, 사람들이 의아해 합니다. ‘이상하다, 저 비겁하던 사람이 어떻게 저렇듯 똑똑한 사람이 됐느냐’--이상할 수밖에요.
성령으로 인하여 베드로와 요한이 가진 이 용기--그것은 무엇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입니까 성령이 임하여서, 베드로는 지금 자기가 하나님 앞에 있는 것을 의식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있고, 하나님 앞에 있다는 자아의식을 가지게 됩니다. 전에도 마땅히 그러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욱 더 영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성령을 받음으로 사람은 보이지 않고 하나님이 보입니다. 지금 산헤드린 공회에서 있다고 하지만 그 장로와 제사장들이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하겠느냐,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겠느냐, 너희의 말을 들어야 하겠느냐, 하고 당당히 말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어느 정도 보입니까 하나님을 어느 정도 의식하고 있습니까 베드로는 순간순간 내가 하나님 앞에 있다는, 바로 그 의식이 강해지고, 확대되고, 완전해졌다는 것입니다. 모든 일들은 다 희미해지고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것만 강하게 극대화하여서 그 마음에 느껴졌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을 듣고,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의 시선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서 고문을 당했던 한상동 목사님--한 경찰한테 죽지 않을 만큼의 모진 고문을 당한 한 목사님은 그만 정신을 잃어버렸습니다. 얼마 후, 간신히 정신을 차린 한 목사님은 자기를 고문한 경찰을 향하여 조용히 그리고 의연하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나를 고문했으니, 훗날 하나님 앞에 설 때에 그분께 무엇이라고 대답할 것인지 생각해 두어야 할 것이오.” 이 말을 들은 경찰은 그 후로 다시는 한 목사님을 고문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위대한 용기입니까 하나님 앞에--나는 지금 하나님 앞에서 고문을 당하고, 너는 지금 하나님 앞에서 나를 고문했다 그 말입니다. 이것이 성령받은 사람의 바른 의식입니다. 이 의식 속에 참된 용기가 있는 것입니다.
좀더 깊이 생각해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성령 충만해서 지금 깨닫고 달라진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즉 그 생명력의 체험입니다. 이제껏 그들은 예수는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것만으로만 생각했습니다. 멀리 계신 그리스도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는 순간에, 살아계신 그리스도,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여기에 나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나를 찾아오시는 것을 알았습니다. 보십시오. 제자들이 모두 도망하여 지하실에서 문을 꼭꼭 걸어잠그고 숨어 있는데 그 속에 주님께서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평안할찌어다’ 인사하십니다. 이제는 어디에나 계십니다. 전에는 여기에 계시거나 혹은 안계시고, 전에는 갈릴리에 계시면 예루살렘에는 안계셨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은 어디에나 계실 뿐 아니라, 굳게 문을 잠근 그 안에도 계시더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저들은 놀라운 것을 생각했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거기에 주님의 생명력이 나타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 불쌍한 환자를 보면서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불렀더니, 예수님께서 몸소 나타나시사,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되었던 사람이 벌떡 일어나는 것입니다. 일어나 사람만 놀란게 아닙니다. 구경한 사람만 놀란 게 아닙니다. 사실은 베드로 자신도 놀랐습니다. 이럴 줄 몰랐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 때, 거기에 생명의 역사가 있고, 구원의 역사가 있고, 중생의 역사가 있고, 이적과 기적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의 이름--그 위대한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것을 이름하여 표적이라고 부릅니다. 주님이 함께하시는 표적,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하시는 표적, 이것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고로 두려움이 없습니다. 무서울것이 없습니다.
오늘의 본문을 좀더 같이 읽어보면, 베드로는 나를 통해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그 역사에 대하여 감격하고 있습니다. 사실, 베드로는 좀 부끄러운 사람입니다. 부끄러울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아마도 그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에 이렇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나같은 것을 제자로, 그것도 수제자로 삼았다가는 끝내 좋은 일이 없으실 것이다.’ 그리고 도망을 쳤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갈릴리로 다시 물고기 잡으러 간 것이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저를 따라가셔서 부르십니다. 베드로는 불려 왔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나같은 게 무슨 쓸모가 있을까 이렇게 형편없는 인간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담’하고 생각 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역사하신다, 실수 많은 나를 통해 역사하신다, 허물 많은 나를 통해 오늘도 살아 역사하신다’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크고 놀라운 역사를 이루십니다. 예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던 나인데, 그런 나를 통하여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된 사람이 벌떡 일어났다--놀랍지 않을 수 없어요. 감사, 감격하지 않을 수 없어요. 가장 부족하고 미련한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오늘도 역사하시고, 내가 그리스도께 고용되어 있고,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사역이,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 엄청난 역사가 오늘 나를 통해서 계속 확장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그는 이제 용기의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에 베드로는 성령의 역사와 함께, 지난날 그처럼 연연했던 세속적 욕망이 다 사라집니다. 베드로가 원래 우쭐하기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앞서기 좋아하고, 앞에 서서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자기 존재가 없습니다. 놀라운 이적이 나타날 때에 많은 사람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쳐다보았으나 베드로는 담대히 말합니다. ‘나의 경건이, 우리의 경건이 마치 이 사람을 낮게 한 것처럼 왜 나를 쳐다보느냐 다만 예수의 이름이 저를 낫게 한 것이니라.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세속적 욕망이나 자기 자랑 같은 것은 싹 지워버렸습니다. 자기 경건도 이제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은혜 안에 사는 인간의 참모습입니다. 자기의 경건이나, 자기의 의나, 자기의 충성이나, 자기의 진실이 인정을 받아서 오늘이 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시작도 끝도 오직 은혜입니다. 오직 은혜로 내가 있는 것을 알기에 그는 용기의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1920년에 김인서 장로가 독립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갇혔습니다. 감방에는 또 한 사람의 독립운동가가 있었는데, 바로 그 유명한 윤병구 선생입니다. 이 사람은 비폭력과 무저항주의에 대해서 비난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김인서 장로를 만나게 되자, 대뜸 한마디 합니다. “성경에 보면, 누구든지 네 오른빰을 치면 왼뺨을 돌려대라 했는데, 그따위로 해가지고 어떻게 독립운동을 하겠소 폭력을 쓰는 자는 폭력으로, 무력을 쓰는 자는 무력으로 대항해야 될 게 아니오” 그 때에 김인서 장로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뺨을 치는 자에게 마주 대하여 치는 것은 혈기의 용맹이요, 소인의 용맹이요, 필부의 용기일 뿐입니다. 또, 한 사람밖에 대적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오른빰을 치는 자에게 왼뺨을 돌려대는 것은 거룩한 용기요, 만인을 감복하게 하는 대용(大勇)이요, 영적 용기입니다.” 이 말을 듣고 감동해서 윤병구 선생은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오른빰을 치는 자에게 왼빰을 돌려댄다면 얼핏 무능한 사람으로 보이기 쉽습니다. 여기에 사랑을 운운하고 용서를 말하는 것은 바보같은 짓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진정한 용기라는 것을 성령받은 자만은 알 것입니다.
좀더 나아가서, 베드로의 이 용기의 근본은 죽음의 문제에 대한 해결을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통하여 그는 생명 문제의 해결을 봅니다. 이제는 언제 죽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미래가 보입니다. 종말이 보입니다. 부활의 아침이 보입니다. 그런고로 그는 생사의 문제와 관계없이, 당당한 용기의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용기란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성령이 이것을 가능케 합니다. 그것은 오직 은혜에만 있는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보는 자, 성령 안에서 듣는자, 성령 안에서 깨닫고, 성령 안에서 체험하는 자만이 이 은혜를 압니다. 이 은혜 안에 진정한 용기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력, 그 크고 놀라운 능력, 그리고 하나님의 크고 위대하신 사역안에 내가 고용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것을 알 때, 이러한 세계관 속에 새 하늘과 새 땅이 보일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며 사는 사람은 결코 비굴할 수 없습니다. 조용하지만 천하를 흔드는 용기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어리석고 우둔하여 비겁하고 처참하게 살아가야 했던 저희들을 불쌍히 여겨주시옵고 이제는 성령안에서 참용기의 사람, 참믿음의 사람, 참담력의 사람이 되어서 이 거칠고 어려운 세상을 항상 승리하며 살게 하옵소서. 베드로와 요한에게 있었던 그 용기를 우리에게도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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