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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불신의 웃음 환희의 웃음 (창 2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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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자식에 대한 약속을 마침내 성취시키셨습니다.

본문에서 강조되고 있는 핵심은 하나님의 약속은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과연 하나님은 "말씀대로 사라를 권고하셨고-말씀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며"<1절>, "말씀하신 기한에"<2절> 정확하게 아들을 낳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잠언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은 모두 진실하시다" <잠30:5> 라고 선포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믿음이 적은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의 약속들이 흔히 불신의 웃음과 실망을 자아내게 합니다.

아브라함은 17:17에서 출생에 대한 약속을 받고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라고 말하며 믿지 않았습니다. 사라도 18:12에서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어찌 낙이 있으리오" 라고 불신하였습니다. 하나님 이 '열국의 아비'란 뜻으로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개명해 주셨을 때도<17:5> 실상은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불임증 아내를 가진 사람이 한 자식 의 아비가 되는 것은 고사하고 열국의 아비라는 이름을 붙이고 다녔기 때문입니 다.

아브라함은 자식이 있게 된다는 말을 사라에게 했다가 몽상가라는 핀잔도 자 주 들었을 것입니다. 믿음의 길은 자기와 가장 가까운 자도 이해해 주지 않는 고독한 길인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해가 거듭될수록 아브라함에게는 자식에 대한 가능성은 더욱 멀어지고 '열국 의 아비'란 이름은 자신을 우롱하는 말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백세"<5절>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은 불가능의 장벽을 깨 고 사라를 잉태시켰습니다. 하나님은 한 순간의 결정적인 능력의 행위를 통해 인간의 의혹에 종지부를" 찍고 불신의 웃음을 환희의 기쁨으로 역전시킬 수 있으십니다.<6절> "아브라함 노경에 내가 아들을 낳았도다"<7절> 이 일은 아브라함 생애에서 최대의 희소식이었음에 틀림 없읍니다. 그렇지만 그가 이 약속의 성취를 보기까지에는 25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이 흐른 뒤였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반드시 약속을 지키십니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들의 스케줄에 따라 서둘러대는 분이 아닙니다. 그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육체적인 노쇠를 염려해서 '말씀하신 기한'<2절> 전에 아이를 낳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우선적인 관심은 아브라함 부처가 그의 약속을 신뢰하고 그의 능력을 의지하는 영적 성장의 훈련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이삭은 우리들이 받아야 할 충분한 영적 원리를 깨우치기 전에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교과과정에는 속성과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달련의 맷돌은 서서히 돌아갑니다.

내게서 잘라지고 깨어져야 할 모든 거친 것들을 고운 가루로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그 과정은 파쇄되지 않으려는 육신의 발버둥이 있을 때에는 한없이 고통스럽습니다. 그럴지라도 내 몸을 주 앞에 "고운 가루로 예물을 삼아" 드리려면 주님의 맷돌에 빻아져야 합니다. 그런 자들에게 하나님은 믿음의 환희를 체험케 하십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실제로 체험할 때 받는 영혼의 만족보다 더 큰 환희가 있습니다. 그 기쁨의 농도는 고난과 역경의 기다림에 비례합니다. 그래서 하박국 선지자는 "비록 더딜지라고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합2;3> 고 격려하였습니다. 우리들도 아브라함처럼 약속의 실현을 바라고 사는 자들입니다. 주님은 우리들에게 다시 오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교회는 이 천년 동안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려왔습니다.그런데 주의 강림 도 불신의 눈으로 보면 황당무계한 웃음거리입니다.

하지만 백세에 아들을 낳게 하신 아브라함의 하나님과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예수님을 태어나게 하신 능력의 하나님을 믿는다면 주님의 재림도 말씀대로 성취될 것을 확신하며 기다릴 수 있습니다.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잠시 잠간 후면 오실 이 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히10:36-37>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아라"<10절> 아브라함은 이삭이 젖을 떼는 날에 큰 잔치를 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삭의 출생을 놓고사라와 함께 기쁨의 웃음을 나눌 수 없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하갈과 이스마엘에게는 이삭의 출생은 더없이 나쁜 소식이었습니다.

사라는 이제 이삭을 낳았으므로 여주인으로서의 권위를 완전히 회복한 셈이었습니다. 그녀는 한치의 양보도 없이 하갈과 이스마엘의 추방을 남편에게 강경히 요구하였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또 하나의 위기가 반복 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그아들을 위하여깊이 근심"<11절>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때처람 욱체를 위하여 뿌린 씨앗의 쓰라린 열매를 통감한 적이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인간적인 편법으로 조급하게 처리하는 것은 정력과 시간 낭비 이상의 손실을 초래합니다. 그런 불신의 행위들은 복잡한 고민거리들을 불러 일으킴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 커다란 장애 요인으로 조만간 반드시 등장하게 됩니다.

다행스럽게도 아브라함은 25년 후에 성취된 약속의 이삭을 무릎에 앉혀놓고 대연을 배설 한 의미를 잊지 않았습니다. 그 잔치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증명하고 아브라함의 뜨거운 감사를 드러내는 경배의 축제였습니다. 참 예배는 하나님께 모든 일을. 의탁합니다.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어라"<12절> 하나님은 내 기도를 나의 소원대로만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아브라함 은 하갈과 이스마엘을 위해 하나님께 어떤 묘안이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을 것입 니다. 그런데 사라의 요구를 그대로 다 따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무정한 사라의 편을 드는 것으로 보여 아브라함에게는 퍽 섭섭하였을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들은 대개 감정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하나님이 정말 내 고민을 이해하시는 것일까 그렇다면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을까 사실은 사라 때문에 이 모든 괴로움을 당하는데 왜 그녀에게 따끔하게 한 말씀 해주시지 않을까 이런 식으로 생각하다 보면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까지 들어가게 됩니 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제 그런 자기 중심적인 사리판단에서는 벗어나 있었습 니다.

아브라함은 약속의 아들을 육신의 방법으로 낳으려고 하갈과 동침하여 이스마엘을 출산시켰습니다.

그래서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방법과 능력에의한 구속 의도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자였습니다. 따라서 이스마엘은 구속의 성취로 인정 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믿음으로 사는 의인의 삶과 역행되므로 제거되어야 했습니다. 바울은 이 점을 들어 하갈이 낳은 이스마엘을 자력 구원을 시도하는 율법의 행위에다 견주어 비유하였습니다.<갈4:21-31> 반면 이삭은 하나님이 상속자로 주시겠다고 약속한 자식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약속을 믿고 마침내 이삭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자기 힘과 재주로 낳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신령한 능력과 방법으로 받은 것이었습니다.원래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셨던 의도는 자기 노력이나 공로가 아닌 하나님의 약속과 능력을 믿음으로써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참 후손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서 받은 이삭이지 자력생산에 의한 이스마엘이 아니었습니다.

이 원리는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문제와 직결됩니다. 오래 전부터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메시야에 대한 약속을 해 주셨습니다. 이 메시야는 이스마 엘이 아닌 이삭의 혈통을 타고서 태어났습니다. 즉 믿음의 혈통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이삭을 기다렸고 믿음으로 그 약속의 성취를 받았습니 다.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예수님이 약속된 메시야라는 것을 믿음6으로 영접해야 합니다.예수님은 죽은 것과 다름 없던 아브라함에게 이삭의 생명을 안겨 주었듯이 죄로 죽어가는 우리들을 희생시키기 위해서 거져주는 구원의 생명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내가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받아들이면 나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지게 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 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다시 말해서 '새로운 피조물' 로 구원되는 일은 이스마엘을 낳듯이 자력에 의한 육신의 방법이 아니고 하나님이 마련하신 믿음이라는 수단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이스마엘과 이삭은 공존할 수 없습니다. 이스마엘은 반드시 내쫓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주신 나의 새 생명입니다. 나의 죽을 몸에서 생산된 자력에 의한 이스마엘은 나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이스마엘은 자기 노력으로 죽어가는 몸을 소생시키려는 부질없는 율법의 행위들입니다.오직 이삭이라야만 내 생명의 씨가 됩니다. 하니님의 약속으로 주신 예수님을 나의 생명의 원천으로 믿고 살 때에만 성령의 능력으로 내가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스마엘을 내 쫓고 약속의 주님을 믿음으로 모시며 살고 있 습니까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13절>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같은 영적 원리가 포함하는 다른 한 측면도 알 려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비록 이삭을 선택하셨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스마엘을 아예 죽도록 내버리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믿음의 원리를 설명하기 위해서 이스마엘과 이삭이 한지붕 밑에서 사는 것을 허락지 않았을 뿐입니다. 이 삭은 약속과 믿음을 이스마엘은 율법과 행위를 대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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