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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말을 따라 삽시다 (약 01: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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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야고보서 1장의 가장 중요한 대목으로 그리스도인의 자기 점검입니다. 요사이 우리가 사는 이 사회에 환경이나 생활 조건이 우리의 건강을 해치는 요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건강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깊어진 것이 사실입니다. 건강하게 살 수 있는 생활 환경을 찾게 되고 건강에 도움이 되는 음식을 구합니다. 무엇보다도 건강에 대한 진단을 받아 미리 알고 치료하는 것이 지혜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몸의 건강만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데도 자기 자신에 대한 올바른 진단을 받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오늘 주신 말씀 22절에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자기 자신에 대한 올바른 진단을 하라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기자는 자기 마음을 속이면 그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마귀에게 속아서 죄를 짓는 것보다 더 무서운 일은 자기 자신에게 속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주변에는 자기 착각에 빠져 있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구원받지 못했는데도 구원받은 줄로 착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니면서도 그리스도인으로 생각하며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비극이 마태복음 7장 22절 이하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신다고 말씀했습니다. 이것은 말하자면 자기 자신을 제대로 알지 못한 비극의 한 장면입니다.

그런가 하면 내 믿음은 성장하지 못했는데 자기 믿음이 성장한 것으로 착각하는 오류를 범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갈라디아서에 보면 사도 바울이 그런 사람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6장 3절에 “만일 누가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 했습니다.

요한 계시록 3장 17절에 보면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며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자기 자신으로 바로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참된 성장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알고 하나님과 바른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야고보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말씀따라 사는 생활을 세 가지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1. 말씀을 받으라고 하십니다.(19-21) 오늘 주신 말씀 19절 이하를 보세요.

“내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버리고 능히 너희 영혼을 구원할 바 마음에 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 야고보는 우리가 참으로 자라기를 원하고 시련을 이기고 성숙한 인격을 갖추려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야 한다고 말씀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수 있습니까 우선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합니다. 이것은 훈련이 필요합니다.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어떤 이야기를 하든지 우리가 잘 경청할 수 있는 훈련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에도 “형제들아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라”고 말씀했습니다.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일수록 잘 듣지를 못합니다.

제노라는 유명한 찰학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두 개의 귀를 주셨음에 반하여 입은 한개 밖에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듣는 것을 말하는 것의 갑절로 하라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의미있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듣기보다는 말하기를 즐겨합니다. 이렇게 듣지는 아니하고 말히기만을 좋아하는 사람에게서 인격의 성장이나 신앙의 성장을 기대하기가 어렵습니다. 말을 많이 하는 것은 우리의 인격이 성장하는데 커다란 방해물이라는 것을 야고보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사람은 말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존재입니다. 말함으로써 우리의 의사를 전달하지 않습니까 말을 할 수 없다면 이것처럼 답답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말이란 이렇게 요긴하고 중요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인만큼 이 말을 가려서 바로 사용해야 유익이 되고 덕이 됩니다. 사람이 말을 한 마디 잘못함으로 인해서 오는 어려움이 얼마나 많은 것을 우리 생활 주변에서 얼마든지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삶의 지혜를 다루고 있는 구약 잠언에 보면 말에 대한 교훈이 많이 있습니다. 잠언 17장 27절에는 “미련한 자라도 잠잠하면 지혜로운 자로 여기우고 그 입술을 닫히면 슬기로운 자로 여기우느니라” 했습니다.

우리가 언어생활을 통제하며 다스리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입을 지키지 못하므로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곤 합니까 우리가 말을 조심하지 못함으로 우리의 가정을 우울하게 만들고 우리의 교회를 어지럽게 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성경은 여러곳에서 말을 조심하지 않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말을 조심하지 못하면 드디어 이 말에 의해서 성질을 폭발시킵니다.

성내는 일에 대해서도 잠언에서는 여러 가지로 교훈하고 있습니다. 잠언15장 1절에 보아도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했습니다. 사람의 말이란 “툭해서 다르고 탁해서 다르다”, “아해서 다르고 어해서 다르다”는 말이 있습니다. 같은 말이라도 남의 기분을 좋게 하는 말이 있고 남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하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나는 더이상 정복할 땅이 없다”고 말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의 혀를 다스리지 못해서 큰 불행을 겪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어렸을 때부터 같이 자란 막연한 친구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이름이 클레토스였습니다. 클레토스는 알렉산더 대제의 휘하에서 장군으로 알렉산더를 돕고 있어습니다. 한번은 클레토스가 술에 취해서 알렉산더의 많은 군졸들 앞에서 대제를 모욕하는 발언을 했습니다. 순간적으로 격분한 알렉산더는 옆에 있던 병사의 창을 빼앗아 클레토스에게 던졌습니다. 물론 죽이려고 시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창은 클레토스를 죽이고 말았습니다. 나중에 알렉산더는 얼마나 후회 했는지 모릅니다. 심지어 그 후회로 자신의 목숨을 끊으려다가 옆의 사람의 만류로 실패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알렉산더는 전 세계를 정복했지만 자기의 분노를 다스리는 일에 실패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얼마나 자주 우리의 성질을 다스리지 못해서 삶의 어두운 그림자가 지게 하곤 합니까 그래서 성경은 우리의 언어생활을 조심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나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지만 분한 마음이 치밀어 오를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분노의 감정을 잘 조절하는 것은 가정 생활이나 교회 생활 사회생활에서 얼마나 필요한지 모릅니다.

분노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정확하게 정의 내리기는 어렵지마는 찰스 스윈돌은 “분노란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불쾌감을 주는 적대 감정에 대한 감정적인 반응이라”고 말했습니다.

분노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면 격분으로 변합니다. 그것이 조금 더해지면 마지막 단계는 광분이 됩니다. 이것은 인간의 분이란 감정 가운데 가장 위험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광분하면 이성을 잃게 되고 무책임한 행동을 하게 됩니다. 영어에서 화가 났다는 말을 ‘mad’라는 말을 쓰는 데 이 뜻은 ‘미쳤다’는 말과 같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화가 잔뜩 난 사람의 모습을 보세요. 미친 사람과 다를게 없습니다. 성났을 때 거울을 한번 보세요. 아마 자신의 모습을 보시면서 깜짝 놀라실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4장 26-27절에 보면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화가 날 수 있습니다. 성낼 수 있습니다. 분노라는 감정 그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그러기에 “그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성이 납니다. 그 성내는 것이 죄로 변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도 화를 내실 때가 있었습니다. 성전에서 돈바꾸는 장사꾼들이 우글거리는 것을 보시고 채찍으로 그들을 몰아 내셨습니다. 위선적인 바리새인들을 향해 “이 독사의 자식들아 화 있을 진저 회칠한 무덤같은 자들아” 하면서 책망하셨습니다. 이것을 의분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분노의 감정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했습니다. 분을 품고 있으면 마귀가 틈을 탑니다.

여러분, 우리 마음속에 마귀가 틈을 타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분을 품지 말아야 합니다.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잠언16장 22절에 보면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성내는 것에 대하여 야고보는 인내함으로, 그리스도인의 인격으로 성숙해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1장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인내’입니다. 인내는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가져야 할 인격의 소중한 한 부분인데 성을 냄으로 이 귀한 것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일에 실패합니다.

그리고 마음에 말씀을 심어야 합니다. 21절에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버리고 능히 너희 영혼을 구원할 바 마음에 심긴 도(말씀)를 온유함으로 받으라” 했습니다.

말씀을 받으려면 잘 들을 뿐만 아니라 말씀을 마음에 잘 심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씨뿌리는 비유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말씀은 들었으나 마음에 심지 않아서 그럽니다. 씨를 뿌리려면 먼저 잡초를 제거해야 합니다. 더러운 것,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구원할 바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고 했습니다.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은 우리가 부질없는 말을 많이 하고 다투다 보면 쏟아져 나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상태를 로마서 3장 13절에 “저희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라”고 했습니다. 열린 무덤에서는 썩은 송장 냄새가 날 것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까 잡초를 제거해야 합니다. 잘못된 말을 고쳐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심어야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심기 위해서 말씀과 가까이 해야 합니다. 시편 기자처럼 “주여,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속에 두었나이다”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온유함으로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온유는 성내는 것과 대조적인 말입니다. 성령의 열매 가운데 온유의 열매가 있습니다. 예수님도 “온유한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지배를 받을 때 우리의 인격은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온유한 심정과 온유한 태도로 받아야 합니다.

 2. 말씀을 실행하라 하십니다.(22-25) 설교를 듣고 성경을 공부하는 일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설교를 듣고 성경을 공부하는 일이 사람을 변화시키지는 못합니다. 말씀을 듣고 공부한 성경이 우리 생활 속에 적용될 때 비로소 우리 인격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야고보서를 통해서 실행의 중요성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서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 가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가령 22절에서는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라”고 했습니다. 23절에서는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마치 거울로 자기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했는데 여기서는 말씀을 거울에다 비교했습니다. 거울은 주님도 보여주고 우리 자신의 모습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두 가지를 제일 많이 보여 줍니다. 흠과 티가 없이 거룩한 주님의 모습을 보다가 상대적으로 자신의 추악한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사야 선지는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성전에 들어 갔습니다. 그는 거룩한 주님 앞에서 추한 자기 자신을 깨닫고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자라”고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주신 말씀 24절에서는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린다”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읽고 공부했지마는 그대로 살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 비유한 말입니다.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은 놋으로 된 거울을 사용했습니다. 그 당시 제사장이 장막에 들어가면 첫번째로 번제단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제물을 드리고 지나면 물두멍이 놓여 있습니다. 그 물두멍이 놋대야 비슷한 것입니다. 거기에 서면 자기의 모습이 다 보입니다. 그러면 거기서 씻고 난 후 성소로 들어갔습니다. 이 광경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의미가 아주 깊습니다.

우리는 말씀 앞에 서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더러운 것을 씻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교제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 보고”, 다시 말하면 바짝 곁에 서서 어떻게 말하는 가를 주의해서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자신의 삶의 상태와 인격의 상태를 말씀 앞에 비추어 보는 것을 말합니다.

그 다음에 뭐랬어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한 일에 복을 받으리라”했습니다. 참된 축복이 어디서 옵니까 말씀을 실행에 옮길 때 비로소 찾아옵니다. 예수님께서도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그의 계명,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내려오는 말에 ‘서자서 아자아’라는 말이 있습니다. ‘글은 글이고 나는 나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좋은 글을 배웠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 좋은 글대로 살아야 내게 유익이 있는 것이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을 주신 후에 결론으로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 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생활에 적용되지 아니 할 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시편 128편에 보세요.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요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했습니다.

잠언 16장 20절에 보면 “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좋은 것을 얻나니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복이 있다는 말씀이 일곱 번 나오는데 그 첫번째가 요한계시록 1장 3절입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마지막 장인 22장 7절에서도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했습니다.

누가복음 11장 28절에더 “예수님께서 가라사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했습니다. 요한복음 8장 5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 하셨습니다.

요한 1서 2장 3절 이하에 이런 밀씀이 있어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죄를 아는 줄로 알것이요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 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대를 이어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가 되어 여러 가지 해야 할 과업을 앞에 놓고 주저하는 여호수아에게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여호수아 1장 8절을 보세요.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따라 행하면 좋은 것을 믿습니다.

 3. 말씀의 축복을 나누라고 하십니다.(26-27) 26절 보세요.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자신을 거룩하다 자부하면서 혀 하나 조심하지 못하고 입술을 마음대로 놀리는 사람의 경건의 헛것입니다. 우리의 인격과 경건이 절제하지 못한 언어 생활 때문에 파괴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혀로 망한 가정, 혀 잘못 놀려 깨진 교회가 많습니다. 정말 경건한 인격이 되려면 먼저 혀를 절제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이 세상에 살면서 자신을 거룩히 구별하는 성결을 말씀했습니다. 아브라함은 구별되게 살았고 롯은 구별되지 못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모든 것을 얻었고 롯은 탐욕으로 택했던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적극적인 경건은 불쌍한 사람을 돌보는 것입니다. 무엇을 안하는 것이 경건한 삶이 아니고 무엇인가 거룩한 일을 해야 합니다. 이런 실천이 우리를 주님이 기뻐하시는 참된 인격으로 성숙시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신 말씀을 통해 우리 자신을 보면, 우리가 얻은 놀라운 축복을 나누십시다. 그럴 때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아가는 인격의 성정과 신앙의 성숙이 이루어 질 것을 믿습니다. 아멘 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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