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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위대한 계획 (요 20: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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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무덤에 나타난 천사-(1)심볼리즘:죽음을 이겼다,어둠을 물리쳤다,죄를 이겼다.

(2)하늘의 관심:탄생,광야 시험,세례(하나님),부활,재림 하나님의 관심이 집중된 사건들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복이 있을 줄 믿는다.그런데는 관심이 없고 엉뚱한데 관심을 집중하여 살아간다면 그 삶 자체가 비참한 것이요 저주다.

 여기 무덤 밖에서 한 여인이 너무 슬피 울고 있다.마리아 혼자인지 여럿인지 본문에서는 분명치 않으나 마태복음을 참조해보니까 아마 다른 여인들과 같이 있었던 것 같다.막달라 마리아가 그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제자였던 것 같다.사실 초대 교회 에서 그가 뛰어난 제자 였던 것이 "베드로 복음서"라는 책에 기록되어 있다.

 그녀의 울음은 예수님의 죽음 때문이 아니라,이제 그 시체를 도적 맞았기 때문에 우는 울음이었다.더 기가막히게 슬픈일이었겠죠

어떤 사람은 마리아가 처음에 예수님을 몰라본 이유가 그녀가 너무 울어서 눈물이 앞을 가리워 알아보지 못했을 거라고 말할 정도로 그녀의 슬픔은 대단했던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그녀의 마지막이 18절에 소개되는데 대단히 놀랍게 달라져 있다.

18절-가서,말하니라(기쁨이 충만하더라-!까지 읽어낼 수 있어야 성경을 좀 읽을 줄 안다고 할 수있다)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바꾸어 놓았는가 주님과의 재회가 그녀를 변화 시켜 버렸다.

 오늘은 마리아와 주님과의 재회--비록 3,4일 만의 재회였지만 그 만남이 얼마나 위대한 것이었는지를 생각해본다:

1.주님이 먼저 찾아오셨다.

아니요,마리아가 먼저 찾아갔지요 어니다.예수님이 먼저 찾아오셨다.

 마리아는 죽은 예수님을 찾았다.

마리아가 찾아 온것은 무덤이었다.시체였다.

마리아가 만나러 온것은 절망이었다.

 그러나 그녀를 부활의 주님,생명의 주님께서 찾아오셨다.

"여자여 네가 왜 우느냐,네가 누구를 찾느냐"

누가복음의 탕자 비유그 비유의 주인공은 돌아온 탕자가 아니라,탕자를 만나주시고 맞아주신 아버지가 주인공.탕자의 생각대로 되었더라면 탕자는 겨우 그 아버지의 종중의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그러나 아버지는 다시 그를 아들로 만나주시고 맞아 주신 것이다.

 우리들은 죄와 허물로 죽어 어둠에 빠져 있기 때문에 아무도 부활의 주님을 스스로 찾아 만날 수 없었다.그런 우리를 주님이 찾아와 만나 주신 것이다.

 여러분에게 주님이 그렇게 관심과 사랑을 갖고 찾아오셨다는 사실을 믿는가

생명의 주님께서 아직 무덤 가장자리에서 방황하며 절망의 눈물에 젖어있는 나의 사랑하는 가족,부모 ,이웃들에게 금년에는 넘기지 마시고 찾아오시길 간구드리자.

 2.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이다.

어려운 구절,17절--.

 승천하시기 전에 몸을 더럽히지 말라,부정탄다-곧 도마에게는 만져보라, 생선을 잡수시며,엠마오 두제자와 동행 식사를 함께 나누시기도 하셨다.

 "올라 가기 전" 요한은 올라간다를 승천으로 딱 떼어 생각하지 않는다.

올라간다=십자가에 달린다부활승천성령으로 다시 오리라 내 때가 왔느니라 그 '때'에 일어난 모든 일을 포함

세가지 도움을 받아 해석:(1)문법적으로 '만지지 말라'=계속하여 붙잡지 말아라/마28:9 다리를 붙잡고 라보니여,"크라테인".부정과거(단회적 타치)가 아닌 현재형.

(2)요한의 신학:아직 올라가지 아니했다=아직 약속이 다 성취되지 않았다=성령으로 다시 찾아 와서 영원히 너희와 함께 하리라는 약속의 성취를 아직은 좀더 기다려야 하느니라.

(3)문맥상의 강조점:예수님의 몸이 얼마나 영광 스럽게 되ㅆ느냐 아니야 하는 것이 아니라,예수님의 부활로 새롭게 된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에 그 강조점이 있다.

17절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17절

그러므로 본절이 구분하는 것은 승천하기 전의 예수님과 승천 후의 에수님의 몸의 영광이 아니라 성령으로 다시 오시기 이전의 임시적인 존재 방법과 성령으로 오신 이후의 영원한 존재 방식과의 차이이다.

 그리고 본절이 강조하는 것은 예수님의 승천 전의 영광과 승천 후의 영광의 구별이 아니다. 강조하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로 이제 새롭게 맺어진 그와 제자들과의 관계이다.

 약속=요14:16-20, 16:16,22

부활하사 마리아를 찾아오신 주님께서 장차 약속대로 주실 성령으로 말미암아 맺어질 새로운 관계를 미리 선포하고 있다.

내아버지가 너희 아버지가 되고 내 형제가 도희 형제가 될 것이라이미 오래된 약속이었다,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성령으로 여러분을 찾아 오신 주님께서는 세상 끝날 까지 여러분을 고아처럼 살게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

 영원토록 여러분과 함께 하신다.여러분을 하나님 안에 하나님을 여러분 안에 두사 함께 거하게 하신다.

 금년에는 날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고아처럼 살던 삶을 다 버리고 하나님의 자녀요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로서 부요한 삶을 사시길 축원한다.

 그런데 이 새로운 관계는 하나님과 나뿐 아니라,우리끼리수평관계에서도 맺어진다.둘 중에 하나가 없으면 거짓이다.

 마리아야,이 기쁜 소식을 내형제 네 형제에게 가서 전하라!!! 예수님의 관심이 지금 누구에게 있는가 내 형제에게 가서 전하라,곧 너희 형제에게 가서 전하라.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들에겐 새로운 아버지,새로운 형제들이 생긴 것이다.

천국은 그 형제들 가운데 임한다.임마누엘 하나님도 그들 중에 거하신다.

세상이 뺏지 못할 기쁨도 형제들 가운데 주신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가장 비참하고 빈곤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형제들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고 그들을 가난하게 대하는데서 온다.

 생명의 주님을 만나셨는가 하나님 아버지와 새로운 형제들이 생긴 것을 의미한다.

 그 사실이 여러분에게 기쁘게 여겨지길 축원한다.

이 복된 소식은 우리 중에 들려진다.

임미누엘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

세상이 뺏지 못할 기쁨은 우리 중에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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