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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말씀이 있을 곳 (요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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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을 눈앞에 둔 중년의 남자 환자가 자신이 10년이 넘게 출석하였던 교회의 목 사님을 보기 원했습니다. 목사님은 그에게 다가가서 진정으로 간절하게 예배를 드 렸습니다. 목사님의 말씀이 끝날 무렵에 환자가 눈물을 흘리며 회개기도를 하였습 니다. 그는 기도를 마친 뒤에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목사님, 전 이제껏 단 한번도 목사님의 설교를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오늘, 처음으로 말씀을 들은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목사님은 10년 동안이나 교회에 출석하였던 그 환자를 놀란 눈으로 쳐다 보았습니다. 이제 그가 임종을 앞두고 정신분열 증세를 보이는가 보다 라고 여겼습 니다. 그래서,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그 환자 성도는 "저 는 단지 교회에 출석만 했을 뿐이었습니다. 일단 교회에 가서 앉기만 하면 앉기가 무섭게 설교는 듣지않고 그 시간을 온통 지난 주의 사업정리를 하였고, 다가올 주 간의 사업을 구상하고 계획하느라 몰돌하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 있었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는 많은 좋은 말씀이 시간마다 풍성하게 흘러 나오고 넘치고 있 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 말씀이 흘러가야 할 곳으로 가지 못하고 허공을 맴도는 메아리 처럼 공전하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정작 말씀이 떨어져야 할 곳에 떨어 지 지 못하고 무관심의 길가에 수북하게 떨어지고 이내 사탄의 사자 까마귀 귀신들이 날라와 모든 말씀들을 쪼아먹어 치워버리는 것입니다.

말세에는 기갈의 시대입니다. 말씀을 먹지 못하여 기갈 당한 영혼들이 말라 비틀 어진 앙상한 몰골로 허덕이는 시대인 것입니다. 육신은 잘먹고, 잘입고, 잘놀아서 기름기가 철철 흐르고 점점 더 비대해져 가고 있습니다. 물질 문명은 점점 발달하 여 살기에는 너무도 편리해진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육신적으로 세상 적으로 잘 되어가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점차 기아로 병들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무었이 이렇게 영혼들을 약하고 병들게 만들었습니까 그것은 영혼이 섭취할 말씀 이 없어서가 아니라 무관심이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말씀은 풍성한데 들을 귀가 없 습니다. 몸은 말씀이 있는 교회에 나왔으나, 마음은 학교에 가있고, 집에 가있고, 친구에게 가있고, 오락실에 가있고, 콩밭에 가있는 것입니다. 누구 책임입니까 바 로 요 나 때문입니다. 내 탓입니다. 누구를 원망해야 합니까 목사님입니까 선생 님 입니까 친구 입니까 아닙니다!! 바로, 나 때문입니다.

나는 과연 주의 말씀이 내 발에 등이요, 내길에 빛이 되고 있습니까 아침에 주님 께서 나를 깨닫게 해 주시는 말씀이 있습니까 순간 순간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인 도하시고 생각나게 해 주십니까 아니면, 우리도 임종 앞에서 크게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이시간에 말씀에 대한 나의 자세를 다시 정립하고 뜯어 고칠 것은 고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I.말씀이 있어야 할 곳은 사람의 마음입니다.

 1.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 있어야 합니다.

 시119:11절에서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 나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은 사람의 마음 깊은 곳이 바로 있어 야 할 자리입니다.

1)사상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면서도 진화론을 믿고있고, 공산주의 사상을 찬양 하고 있다면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할 곳에 없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신 앙과 실제을 떼어 놓고 각각 다르게 생각하는 그야말로 신앙이 비과학적이고 비현 실적이지만, 인간의 심리적 안정제로서 그런데로 필요한 것이니 나쁠것이 없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도 말씀이 사상의 자리에 있지 않는 경우입니다.

한국 원자력연구소 초전도체 연구실장으로 있는 원동연 성도는 모태 신앙인으로서 어렸을때 부터 말씀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은 정말 있어야할 마음 의 자리에 자리 잡지 못하고 거저 습관을 쫓아 별로 깊은 생각없이 교회를 왔다 갔 다하는 습관성 신자였습니다. 말씀의 체험이나 거듭남의 체험이 없이 형식적인 신 앙인에 불과했습니다.

마침내, 대학 입학과 함께 그의 관심이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사 물에 대해 이성적 판단을 앞세우고, 논리적인 해석을 요구하는 그에게 성경의 '창 조론'과 '노아 홍수'같은 이야기는 도무지 이치에 맞지 않는 신화에 불과했습니다.

오히려 인간의 잠재의식과 초능력을 개발하는 것이 훨씬 바람직해 보였습니다.

그로부터 그는 최면술, 수면학습법 등을 배우기 시작했고, 자연하 하나님과의 관 계는 점점 멀어져 갔습니다. 찬구들과 어두운 찾집에 앉아 인생토론을 가졌을때 하 나님은 안계실지도 모른다는 결론을 얻기도 했습니다.

대학의 한학기가 지났을때, 휴학계를 내고 서울대학에 재도전을 하기로 하였습니 다. 다시 어려운 시절이 시작되자 간사한 인간의 마음이 금방 주판알을 튕기더니 ' 하나님, 서울 대학에만 합격시켜주면 신앙생활을 다시 열심히하며 교회 봉사도 하 겠습니다.'라고 서원 기도까지 했습니다. 하나님이 안계실지도 모른다고 하며 불성 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던 그가 절실한 처지에 직면하자 지푸라기라도 매달리려는 연 약한 마음이 되어바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합격을 하였으며, 그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려고 중등부 교사 까지 하며 교회 출석을 열심히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직 그 마음 가운데 있어야할 말씀은 없었습니다. 그러니, 자연히 이전에 몰두하던 두뇌개발, 명상법, 초월적 명 상(T.M)에 다시 몰입해 들어갔습니다. 심령과학 점서인 주역과 도교 서적인 회남자 인도의 요가, 선도술과 신선술까지 파고 들었습니다. 차력을 배운답시고 웃통을 벗 고 고된 훈련까지 받기도 하였습니다.

방학 중에는 유명하다는 '도사'를 찾아가 수련을 받으러 떠났습니다. 어렵게 어렵 게 그분을 만났습니다. 그 도사는 '모든 잡념을 버리고 수련에 정진하여 식사는 가 볍게 두끼만 하라'고 명령 했습니다. 3일째 되던 날, 기진하여 다시 그분을 찾았을 때 그 도사는 대야같은 그릇에 국수를 말아 정신없이 먹고 있었습니다. 그 광경을 목격한 그는 너무나도 실망이 커 그날로 당장 수련이고 도사고 다 집어 차우고 집 으로 올라와 버렸습니다.

대학 4학년 무렵에 오빠의 방황하는 모습을 안타깝게 여기던 여동생이 느닷없이 질문을 던져 왔습니다. '오빠, 예수 믿는다는 것이 뭐예요'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이 무었이냐는 여동생의 질문이 방황하던 그에게 적지않은 충격을 주 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늘 내 곁에 있는 것이라고 믿었지만 정작 그 핵심과 본질 적인 물음 앞에서는 뾰쪽한 대답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이 무었인 지 제대로 알려는 노력은 조금도 기울이지 않는 주제에 다른 잡다한 것을 위해서는 그렇게 열성적 열성적이었던 것입니다.

머뭇거리는 그에게 여동생은 차분히 '오빠, 로마서 10장 9절과 10절을 읽어보세요 기독교 진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거예요. 그리스도를 좀더 자세히 안뒤 다른 종 교나 학설에 관심을 가지세요.' 동생의 그 말에 한 대 맞은듯 무었에 좇기듯 로마 서를 찾아 읽어내려 갔습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주를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에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9-10) 그는 무었에 홀린듯 그 본문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순간, 뜨거운 전류같은 것이 가슴 속을 타고 흘렀습니다. 그리고는 뉘우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예수 믿는 방 법이 이렇게 정확히 기록되어 있건마는' 그저 이곳 저곳에서 들은 단편적인 성경지 식 만으로 성경을 알고 하나님을 안다고 판단하고 살아왔던 자신을 발견하였습니다 '주여, 용서하소서! 이제는 당신을 진정으로 알기 원하나이다' 그후 성경을 체계 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건성으로 말씀을 듣고 습관적으로 교회에 왔다갔다 하던 생활을 청산한 것입니다. 그의 마음 깊은 곳에 말씀을 담기 시작하자 하나님 의 섭리와 기독교의 진리가 서서히 깨달아 지기 시작했습니다. 진리를 깨달으면 깨 달을 수록 기쁨이 충만해 갔습니다. 신앙의 눈이 점차 떠짐으로써 내 생애를 섭리 하시는 하나님의 존재가 이성이 아닌 가슴으로 느껴졌습니다.

그후 그는 한국과학 기술원(KAIST)에서 석.박사과정을 하면서 신앙 좋은 많은 믿 음의 선배들을 만났습니다. 누구보다도 논리와 정확성, 확고한 사실을 토대로 하 는 과학자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며 창조론을 오히려 과학적으로 입증하는 모습을 보 고 신앙에 큰 도전과 용기를 얻었습니다.

이제 그는 과학자로서 진화론의 허구성과 하나님 창조론을 널리 알리며, 하나님의 피조세계를 연구하는 모든 학문이 기독교적인 해석으로 이해 되도록 하는 일에 나 머지 생애를 걸고 있습니다. 이제, 그의 사상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이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2)양심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할때 부터 인간의 양심에 하나님을 알만한 가능성을 심어 놓았습니다. 그러기에 아무리 무신론자고 공산주의자라 할지라도 다급하면 하 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양심 속에는 선 악을 구별하는 재판소가 있 습니다. 이것은 누가 가르치지 않더라도 날때부터 갖고있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양 심이 곧, 다급한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을 찾게 만들고, 영생과 영원을 사모하는 마 음을 가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양심은 죄악으로 말미암아 오염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침 받지 않으면 스스로 속임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는 사탄적인 사상이 활개치며 사람들의 양심을 어지럽혀 악을 저지르고도 가책을 느끼지 못하는 화인 맞은 양심으로 변질시키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이 올바른 판단과 생활을 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이 그 양심에 있어 야 하는 것입니다.

 2.하나님의 말씀은 존귀한 마음의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요8:47절에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 씀을 귀하게 여기며 존중하는 마음으로 경청하는 자입니다. 말씀을 존중하는 마음 으로 경청한다는 것은 그 말씀을 듣고 순종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고 순종치 않는 것은 말씀을 마음의 존귀한 자리에 두고 있지않 다는 증거입니다. 눅6:46절에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 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고 주님은 순종이 없는 우리에게 반문하십니다.

말씀을 존중히 여겨 마음으로 그것을 지키는 자는 복된 자요, 지혜로운 자입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를 존귀한 자로 여길 것이요, 넘치는 상급으로 채워 주실 것입니다 마7:24-25절에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위 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 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인생을 든든한 반석 위에 세워 놓고자 하는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때, 주의와 경외하는 마음과 신앙과 순종으로 받아야 합니다.

 3.하나님의 말씀은 진실한 마음의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때, 비 과학적이며 비 이성적이라는 생각으로 받아 서는 안됩니다. 그것이 비 과학적이든 비 이성적이든 상관 없이 전적으로 확실한 진리로 받아 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거짓말 하실 수 없으시며, 오류도 변화도 없으신 분이십니다.(딛1:2) 삼 상15:29절에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 시므로 결코 변개치 않으심이니이다."고 했습니다. 이같은 하나님의 속성은 그 말 씀 가운데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진실성을 믿을 때에 마침내 하나님의 존 재하심까지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4.하나님의 말씀은 사랑의 마음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매일같이 우리를 지켜줍니다. 마치 음식물이 우리의 육신의 건 강을 지켜 주듯이 말씀은 우리의 영혼의 건강을 지켜 줍니다. 음식물은 유한된 육 신의 생명만을 지켜 주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영혼을 영원한 생명으로 지켜줍 니다. 나아가 이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한 부활체의 신비한 몸을 보장해 줍니다.

말씀이 육신의 생명보다 더 소중한 영혼의 생명을 지켜주는 것이므로 우리가 하루 세끼니 음식을 사모하고 사랑하는 그 이상으로 친근히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 입니다.(유1:3) 욥23:12절 말씀처럼 "내가 그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일정 한 음식보다 그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구나"하는 고백을 할 수 있게 되기를 축원합 니다.

 II.말씀이 있어야 할 사람의 마음에 없는 이유.

 1.사람들이 너무 바빠서 말씀을 마음에 받아 들이지를 못합니다.

 공부에 몰두하여 그것에 바빠서 쫓겨가는 생활을 하는 학생들은 복습과 예습, 중간고사 준비, 주초고사 준비 등등 온통 빡빡한 공부 스케쥴을 따라 잡을 궁리에 주일날 예배시간의 목사님의 말씀과 공과시간의 선생님의 말씀이 귓전만 울리고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 정도로 밖에 관심을 가지기에는 마음이 조급한 것입니다.

사업에 바쁜 사람은 사업의 문제점 분석과 새로운 전략 구상으로 이미 마음이 뜬 상태로 몸만 말씀이 있는 성전에 앉았을 뿐입니다.

 2.말씀이 새로운 것으로 들려오지 않기 때문에 말씀을 마음에 두려고 하지 않습 니다.

 어린 시절부터 줄곳 귀가 닳도록 들어온 그 말씀, 10년 전부터 들어 왔던 그 말 씀, 이제는 하도 많이 들어서 성경 본문과 제목만 보면 무슨 설교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를 거의 적중 시키는 상당한 이력이 붙어 있기에 어지간히 새로운 말씀이 아 니고는 귀가 열려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 유행처럼 즐기는 것인 줄로 아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즐기기 위해서 듣는것이 아니라, 지키기 위해서 듣는 것입니다.

새로운 각도에서 새롭게 전개하는 말씀을 많이 듣는 것이 많이 지키것으로 착각하 는 자도 있습니다.

말씀은 우리가 날마다 먹는 음식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나이들어 늙는 것을 싫 어하고, 오래토록 반복해서 같은 이야기를 듣는 것을 싫어한다고는 할수 있으나 밥 을 싫증 낼수 있은며, 공기를 싫증낼 수 있으며, 물을 싫증낼 수 있으며, 생명을 싫증낼 수 있습니까 바로 말씀은 기호 식품이 아니라, 반드시 먹어야 하는 생명의 양식입니다.

 3.복종하기 싫어하는 교만함이 말씀을 마음에 두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너무 많은 것을 배워 많이 알고 있으며, 세련된 현 대 지성을 소유하고 있다고 자만하는 자들은 그 교만 때문에 말씀을 마음에 둘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무리들은 자신이 대단한 존재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같은 자들에 대하여 요5:44절에서 말씀하기를;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 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이같은 인간의 알량한 자랑 거리로 교만함에 빠진 무리를 가리켜 롬1:22절에서 "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 느니라"고 그 어리석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4.마음의 죄악이 말씀을 두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죄를 좋아하는 경향은 마음에 죄를 지적해 내는 가시 같은 말씀을 두려하지 않 는 것입니다. 마음이 변하여 죄를 멀리하고 깨끗하게 살아가는 것보다 지금이 더좋 다고 생각하는 패역한 마음이 말씀을 마음에 허용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또한, 게으르고 나태한 생활 양식이 말씀을 마음에 두는 것을 거부합니다. 말씀이 마음에 들어오게 되면 지금까지의 모든 리듬이 깨어지고 그야말로 번거러워질 것으 로 보는 것입니다.

 III.하나님의 말씀이 있을 곳에 없으면 그 결과는

1.말씀을 거절한 그 부분은 곧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2.말씀은 더 이상 마음에 있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로서 곧 인격입니다. 말씀을 거절하는 것은 곧, 예수 그리 스도를 거절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배격하고 거절한 동네에서는 주님께서 말씀도 이적도 많이 베푸시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환영하지 않는 곳에 적극적으로 역사 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마음에 두기를 등한히하고 싫어하면 성령의 감화가 소멸되고 은 혜는 멀리 사라져 가버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말씀을 등한히 하는 자가 은혜를 받 을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사모하는 심령에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3.마지막 심판날에 정죄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말씀의 끊임없는 감동과 감화가 주의 종들과 성령으로 통하여 있었건만 자신의 무지와 완악함으로 허송 세월만 하였다면 심판대 앞에서 결코 편치 못할 것입니다 요12:47-48절에 "주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 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결론>

성도와 말씀은 떨어 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성도는 말씀 없이 잠시라도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이것을 모르고 무시하며 살아왔다면 얼마나 어리석고 잘못 살아온 것인지를 깨달 아야 합니다. 그리고는 마음의 자세를 바꾸어야 합니다. 물을떠난 고기는 혹시 살 지 몰라도 말씀을 떠난 성도는 결코 살아갈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육신의 양식을 하루라도 건너 뛰면 허기지고 음식이 간절해 지듯이 영의 양식을 하루라도 지나치면 당장에 영혼의 맥이 빠진다는 사실을 명심하여 영혼의 양식을 섭취하는 열심이 간절하게 되기를 주의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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