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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무에서 유를.... (눅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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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분이라고 우리가 늘 고백한다. 정말 하 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분이고, 우리 그리스도인은 역시 하나님의 뜻 을 따라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나가는 사람들이다. 없는데서 있는 것을 만들 어간다는 것이다. 우리가 없는 데서 있는 것을 만들어간다는 것에 앞서 먼 저 생각되어야 할 것은 우리에게 뭐가 없는냐 하는 문제일 것이다. 우리에 게 뭐가 없는가 우리는 우스개소리로 이런 얘기를 종종한다. 뭐가 없다, 뭐가 없다.... 늘어놓지 말고, 다만 한가지 돈이 없다고 하면 된다고. 자본 주의, 황금만능주의 세상이니 이 말도 그럴듯 하다. 하지만 우리 신앙인들 에게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성서에서 3가지로 요약해주고 있다.

 첫째는 믿음이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돈없고 힘없고 빽없는 한 과부와 재판관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본문의 이 내용과 비슷 한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전해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이 이야기를 보면 본문을 이해하는데 약간은 도움이 될 것이다.

메소포타미아 지방 니시비스 법정에서 입구 맞은편에 선 재판관이 반쯤 쿠션에 묻힌채 앉아있고 그의 주위에는 서기들이 둘러앉아 있다. 법정 앞부 분에는 주민들이 몰려들어 각기 자기의 사건을 먼저 처리해 줄 것을 요구 한다. 약싹빠른 자들은 서기들과 귓속말로 흥정을 하고 뇌물을 그들에게 슬 쩍 넣어주면 즉석에서 처리된다. 그러나 그러는 동안에도 한쪽 구석에서는 어떤 가난한 여인이 큰 소리를 질러 공정하게 처리할 것을 요구하면 재판 절차가 중단된다. 그 여인은 조용하라는 엄명을 받는다. 그리고 그 여인은 매일 온다는 비난을 받는다. 그러나 그 여인은 큰 소리로 외친다. "나는 재판관이 내말에 귀를 기울일 때까지 오리라." 결국 폐정시간 직전에 재 판관은 참다 못해 물었다. "저 여인은 무엇을 원하는가 " 그 여인의 사건 이 곧 설명된다. 그 여인의 독자가 군대에 끌려갔는데도 징세관은 그 여인 에게 납세를 강요했다. 이 사건은 신속하게 처리되었다. 이렇게 하여 그 여인의 끈기는 보답되었다. 만일 이 여인이 서기에게 뇌물로 줄 돈을 갖고 있었다면 이 여인은 훨씬 빨리 승소했을 것이다.

과부는 고아와 마찬가지로 사회적 약자였고 그래서 성서에는 항상 과부 와 고아를 돌보는 것이 참 경건의표현으로 인정되어 왔다. 재판관은 과부 로부터 아무런 선물이나 뇌물을 기대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의 문제를 들은 척 하지 않았다. 이러한 경우 이 과부에게 남아있는 유일한 무기는 무엇이 겠는가 그것은 집요한 요구, 끈질긴 간청이었다. 본문 3절의 "와서"라는 말의 그리스어 "엘케토"는 반복적인 미완료과거형인데 "끊임없이 되풀이하 여"를 뜻한다. 이 이야기의 중심은 재판관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과부에게 있는데 강조하는 내용이 되는 것은 과부의 집요함이 재판관의 마음을 돌리 게 했다는 내용이다. 이 이야기가 끝난 뒤에 예수께서 덧붙인 말은 "인자가 올 때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 였다.

정말로 21세기를 사는 오늘 우리는 우리 자신이 봐도 믿음이 없다. 믿음 이란 여러가지 각도에서 해석되어질 수 있겠으나 지금 여기 본문에서는 과 부의 집요한 간청, 끈질긴 요구에 대한 이야기 후에 나온 것이니 믿음은 끈 질긴 행동, 뭔가 결판이 날때까지 한번 붙어서 해보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 겠다. 정말 편리함을 추구하는 오늘의 세상에서는 집요함을 찾기 힘든 것 같다. 요즘은 한우물 파면 안되는 세상으로 이해되어가고있다. 온갖 요령 주의가 우리 마음을 장악하고 있다. 신앙이란 미련스러우리만큼 우직할 필 요가 있다. 여기저기 찝적거리는 삶은 신앙적 내용과도 일치되지 않는다.

믿음이 없는 오늘의 세상에서 우직한 믿음을 창조하자.

 둘째는 희망이다. 약 4:13 이하에 보면 한 돈많은 부자가 하는 말이 내 일은 어디쯤 가서 장사를 해 돈을 잔뜩 벌어야겠다고 한다. 그런데 그 옆에 서 누가 말하기를 내일 네 생명이 끝나면, 죽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반 문한다. 그러면서 허영에 들떠 장담하지 말라는 경고를 하고 있다. 어찌 보 면 이 부자는 매우 희망에 차 있는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내일의 계획을 잘 세우고 있는듯 하다. 하지만 그가 가진 것은 희망이 아니라 망상에 불과한 것이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보면 죽어서 천당만 가면 되니까 오늘의 현실에서는 어영부영 그럭저럭 살면 된다고 생각할 때가 많다. 그래서 오늘 의 삶을 소홀히 할 때가 많다. 물론 천당에 가야지. 하지만 오늘을 불성실 하게, 진지하지 않게 살면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오늘날 세태를 볼때 가진자는 남들보다 많이 가졌으니 앞을 더 내다볼 데가 없고, 없는자는 가진자에 비해 자신을 바라볼때 너무도 비참하니 절망 가운 데 빠질 수 밖에 없어 모두가 희망을 잃어버린 세상이 되고 말았다. 희망이 가졌다 해도 기껏 김치볶음밥을 잘만드는 여자 정도다. 우리는 예수처럼 작 은 씨앗 속에 잉태하는 하나님나라를 볼 수 있어야 하며, 겨자씨 속에 깃드 는 울창한 그늘을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예수가 분명 십자가에 죽었다가 다시 부활할 것을 제자들에게 누차 이야 기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내일의 부활을 믿지 않았기에, 품은 희망이 없 었기에 부활의 그 자리에 동참할 수 없었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가장 비천 한 직업을 가졌고, 천대받는 여인이었던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 부활의 희망 을 가지고 무덤가를 찾지 않았던가 사실 희망은 소외된 자, 가난한 자를 통해 나타난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위한 희망을 희망없는 세상에서 창조 해내야 한다. 영원한 생명은 무엇인가 언젠가도 이야기했지만 영원이란 무엇인가 영원은 어느날 갑자기 우리에게 임하는 것이 아니다. 영어로 영원을 ETERNITY라 하는데 이것은 TIMELESSNESS와는 다르다. 시간을 초월한 다는 뜻이 아니다. 작은 티끌이 모여서 태산을 이루듯이 티끌을 무시한 영 원은 있을 수 없다. 예수는 작은 티끌을 뻥튀기해서 태산을 만들라고 하지 않았다. 티끌로 태산을 만들려고 하는 것은 마치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 는 유혹을 했던 것과 같은 마귀의 방법이다. 우리는 너무 지금의 현실에 집 착하지 말자. 올바르게 살려는 사람이 별로 눈에 안띄는 것처럼 보여 때로 는 안타깝게 여겨지기도 하겠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 자기 혼자 남았다고 생각하는 엘리야를 향해 바알신에 무릎꿇지 않은 자 7 천을 남겨두었다고 한 말씀을 기억하자. 참된 희망은 우리가 오늘을 성실하 게 살때 다가오는 것이다. 결과에 집착하지 말고 우리의 책임을 감당해 나 가는데서 하나님나라의 희망은 구체화되어 가는 것이다.

 셋째 사랑이다. 계시록 2장 1절 이하에 에베소교회에 보내는 말씀이 있 다. 에베소교회는 악한 자들과 절대로 타협하지 않는 교회로 알려진 교회 다. 그럼에도 에베소교회는 책망을 받았다. 뭔가 바로 처음 가졌던 사랑 을, 열정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식어졌다는 것이다. 다닥다닥 붙은 아파 트에 살면 살수록 이웃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세상이다. 그러나 그 사람 들 개인개인을 나무랄 수도 없다. 모두가 사는데 바빠서, 살기가 힘들어서 옆집에 관심가질 겨를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우리 자신도 보면 뜻과 목표는 좋으나 너무나 복잡다단한 세상에서 이리저리 얽히고 설켜있는 일들 로 분주하여 사실상 가장 가까와야 할 사람들끼리는 무관심해지고 있는 것 이다. 관심이 없는 세상이 사랑이 없는 세상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러한 사랑이 없는 세상에 사랑을 만들고 키워나가는 것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신앙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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