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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역설적인 진리 (마 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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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마을에 한 농군이 소를 길렀습니다.그런데 이 소가 어찌 나 거칠고 사나운지 농군은 이소로는 밭을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농군은 이 소로는 농사일을 지을 수 없으니 무거운 짐 이나 실어나르는 우차를 끌게했습니다.그러나 이것도 어찌나 세 고 사나운지 우차도 끌수가 없었습니다.화가난 농군은 이 소를 팔아버리기로 하고 내어 놓아도 누구하나 사가려는 사람이 나서 지를 않는 것이었습니다.성질이 사납고 생김새 마져 흉칙해서 주 위 사람들이 겁을 냈으며 모두가 거들떠 보지도 않았습니다.그런 데 건너 마을에 자수성가 한 농군이 이 소식을 듣고 호기심도 나 고 구미에 당겨 소를 한번 보기로 생각하고 왔습니다. 과연 듣던 대로 이 소는 성질이 매우 사납고 극성스러웠습니다. 오히려 그 는 이점이 마음에 끌러 소를 사서 자기집으로 끌고 왔습니다.집 에 소를 몰고 와서는 외양간을 말끔하게 치우고 먹이도 듬뿍 넣 어주었습니다. 그려면서 소의 머리와 목을 부드럽게 그리고 정답 게 쓰다듬어 주었습니다. 농군은 소의 비위를 맞추어주며 지극히 소를 돌보아 준 것입니다. 며칠을 계속해서 소를 잘 돌보아주고 밭에 데리고 나가 일을 시켜 보았습니다.그런데 왠 일인지 소는 성질을 부리지 아니하고 일을 잘 해냈던 것입니다.농군은 기특해 서 다시 집에 와서 여물을 잘 넣어주고 잘 다듬어 주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이 농군과 소는 정이 들게 되었습니다.그후로 이 농군은 이 소로 농사를 잘 지어 부자가 되었다고 하는 옛 이야기 입니다.

이성없는 짐승이라고 할지라도 먼저 도와주고 섬겨줄 때에 그 주인을 도와 부자가 되게 해 주었다는 교훈을 되 새겨야 할 것이 다.

우리는 이러한 이야기에서 진리의 역설성을 일러주신 주님의 말씀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세상의 사람들이 추구하는 생 각과는 달리 우리 주님은 진정 우리 인생들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생명이 되는 귀한 진리를 들려 주셨습니다. 그 말씀이 우리가 생 각하기에는 아이러니칼한 역설성인 말씀인 것입니다. 세상적인 사고로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세상적인 사고로는 반대되 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크고자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마20:26-27)말씀하셨다.

진리의 첫번쩨 역설성은 곧 크고자, 높아지고자 한다면 도리어 섬기는 자가 되고 낮은 자리에 이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예수님의 심정 은 아랑곳하지 아니하고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누구 더 높아져야 하겠는가에 티격태격할 때에 들려주신 예수님의 말씀이 셨다. 바로 진리의 역설성이 여기에 있다.사람들이 어떤 위치에 거하느냐가 중요하기 보다는 진정 사람을 섬기고 도와주려고 하 는 종의 의식을 가지느냐로 지도자의 모습을 찾아야 할 것이다.

섬기는 자가 되면 자연히 높아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섬기려는 하지 않고 자신을 섬기라고 하기 때문에 많은 문제들이 야기되는 것입니다.

중국의 격언에 스스로 크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추한 냄새 가 풍긴다. 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수건을 두르시고 그의 사랑하는 제자들의 발 을 씻어 주셨습니다. 민망히 여기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너희 도 이와같이 서로 봉사하고 섬기라." 일러 주셨습니다.

 진리의 두번째 역설성은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 7:12)는 말씀입니다.

이 말은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있다고 하신 말씀과 같은 말씀입니다. 사랑을 받기 원한다면 먼저 사랑을하라는 말씀입니 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도 곱다는 옛 성현들의 말씀과 같 이 먼저 남을 대접하는 사람이 되어야 자신도 대접을 받게 된다 는 것입니다. 대접을 받기 보다는 대접하기를 기뻐하는 사람이 인생의 삶을 풍요롭게 합니다.

아브라함이 길가던 나그네를 대접할 때에 우연한 기회에 하나 님의 사자를 대접하고서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계시를 알게 됩니다. 그는 이 대접으로 백세가 되어 아들을 얻는 축복을 받은 것을 성경을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점심 한 끼 대접하고서 그는 아들을 얻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 경은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 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히13:2) 사르밧 여인의 이야기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 여인은 자신과 아들이 함께 마지막으로 빵을 구워 먹고 죽으려고 했던 그 마지 막 떡 한 덩어리 엘리야에게 대접하고서 그는 3년 6개월의 극심 한 가뭄과 기근속에서 배 굶지 아니하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 입니다.

성경 사무엘상 25:2-22에 보면 나중에 다윗의 후궁이 된 아비 가일의 이야기가 기재되있습니다.

본래가 아비가일의 남편 나발은 부자요 형편이 좋았던 사람입 니다. 그는 양을 칠 때에 다윗이 도와주어서 그의 재산이 하나도 축이 나지 아니하고 다윗의 부하들도 나발과 다투지 아니하여 나 발은 부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세가 바뀌어 다윗이 사 울왕에게 쫓기는 몸이 되었습니다. 다윗은 사울왕에게 도망하는 신세가 되어 기진맥진하여 그의 부하들과 함께 쫓기다가 나발이 갈멜에서 양털을 깍는다는 소식을 듣고 그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나발은 말하기를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뇨 근일에 각기 주인에게 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 내가 어찌 내 떡과 물과 내 양털 깍는 자를 위하여 잡은 고기를 가져 어디로서인지 알지도 못하는 자들에게 주겠느냐" 그러나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은 급히 떡과 마실 것을 만들어 다윗에게 가 그를 극진히 대접을 했습니다. 먼저 대접한 그 결 과가 어떠하였습니까 나발은 그 일로 그만 놀라서 기함이 되어 아까운 생명을 잃고 말았습니다. 떡과 물을 아끼고 대접하기를 거절하던 그는 그의 생명을 잃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아비가 일은 어려운 때에 도움울 주고 대접한 것으로 왕의 후궁이 되었 던 것입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윤리적으로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해 주는 말 씀이지만 우리가 이 본문에서 중요하게 생각할 것은 남에게 대접 하는 자가 자신도 그 대접을 진정으로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번째 진리의 역설성은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치고 죽고자 하는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진정 살 고자 하면 죽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자신의 이기적 인 목적만을 위해 살고자 한다면 그는 죽는 자가 되고 맙니다.

진리를 위해 죽고자 한다면 그는 진리와 함께 사는 자가 되는 것 입니다. 죽고자 한다는 것은 비장한 결심의 표현입니다.

무엇을 위해 죽고자 하는가 자신이 살기위해 다른 사람들을 해치고 원망하고 죽이는 사회가 아니라 서로가 돕고 사랑하고 이 해하며 자신을 죽여가며 살아가는 사회가 되어질 때에 더욱 밝은 사회가 될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신 예 수님의 말씀도 자신이 죽는 자가 되어 생명을 얻는 생명의 길을 걸어가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시리라는 말씀은 계시록에 아시아 일곱 교회에게 성령으로 말씀하실 때에 주신 말씀인 것입니다.

 네번째 진리의 역설성은 나중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된다는 것입니다.(마태복음 19:30,20:16)

먼저 된 자로서 어찌하여 나중 된 자에게 뒤 떨어지게 되겠습 니까 그것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된 자들이 영적으로 자만심에 떨어지게 되면 나중된 자 보다 못한 자가 되어 버리고 맙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도 역시 영적인 자만심을 가진 자가 잘못 된다는 것을 비유로 지적하시고 일러주신 말씀인 것입니다.

먼저 되었다고 교만하면 진보하지 못하고 퇴보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영적 교만은 뒤 떨어지게 만들어 버립니다.

세속에 것들에서 놓임을 받지 못하고 세속의 것에 구속될 때 먼저 되었다 할지라도 그는 나중된 자가 되고 맙니다. 마태복음 19장에서의 말씀은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에게 와서 예수님을 따 를 것을 말씀 드리며 생명에 들어가려면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 지를 물었던 말씀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 부자 청년은 세상에 있는 자신의 물질 때문에 예수님을 온전히 따르지 못했습니다.

세상의 것에 그만 자신이 붇들려 예수님의 권고의 말씀을 따르지 못했던 것입니다.

과감한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뽕나무에 올라가서 바라보다가 예수님의 부 름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삭개오의 집에 가서 유하여야 하 시겠다고 그에게 청을 넣으셨습니다. 그 때에 삭개오는 기꺼이 예수님을 영접합니다. 그리고 그의 집에서 예수님을 위하여 잔치 를 베풀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시지도 않 았지만 토색한 일이나 남의 것을 갈취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 으리라고 예수님에게 말씀을 드립니다. 그때에 예수님은 "오늘 구원이 이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눅 19:9) 위와같은 진리의 아니러니칼한 면을 살펴보면 공통적인 요소를 발견하게 됩니다. 크고자 하는 자 낮아지라, 대접을 받고자 하면 먼저 대접하라,살고자 하면 죽으라 나중된 자로 먼저 된 자와 같 이 되려면 결국은 인생을 대하는 태도에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 니다. 즉 철저한 자기 희생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희생 없이 무 엇인가 이루려고 한다는 것은 거짖된 삶이 되고 맙니다. 높아지 고자 한다면 낮아진 자가 되어야 하는 것 희생없이 어찌 낮아질 수 있겠습니까 살고자 하는 자 죽는 자가 되라는 것 곧 희생하 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남을 먼저 대접하는 것 그것도 희생입니다. 빕립보서에서 사도 바울이 모든 무릎이 예수의 이름 에 끓게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먼저 예수님이 하 늘의 영광의 보좌를 버리시고 인생을 구원하시기 위해 나무에 달 리시기 까지 자신을 희생하셨으므로 하나님은 그 예수님을 높이 사 모든 무릎이 그의 앞에 끓게 하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진리의 역설성은 무엇입니까 희생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 의 생명의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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