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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뭘 보고 뭘 들을까 (요 19:4-5, 마 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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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피건데 사람이 세상을 사는 동안 평생듣고, 보면서 배워서 살아간다.
사람의 생활속에 들을 것이 있고, 듣지 않을 것이 있게 마련이고, 보아야 할 것과 보지 않아야 할 것이 있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내세우면서 빌라도라는 이방인 그것도이스라엘 지배국 로마황제가 파송한 총독의 입을 벌려 "빌라도가 다시밖에 나가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을 데리고 너희에게 나오리니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다"(요19:4)라고 했으며, 하늘에서 소리가 있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내 기뻐하는 자니 자의 말을 들어라"(마17:5).

어떤 소리 있어 "들으라" 할때 그 말씀 하시는 분이 누구냐, '보라할 때 보라는 이가 누구냐를 먼저 알고 지명하는 그것을 바로 보고,바로 들어서 판단을 옳게 해야 그 다음 단계가 잘 된다는 평범한 이야기다.

1. 빌라도가 보리한 예수 그리스도
빌라도가 유대인들 앞에 나서서 그의 감옥 안에 갇힌 예수 그리스도를 고소, 고발한 그들에게 보라고 하면서 그에게 죄(罪) 가 없음을 선고했다.

시기와 질투에 가득한 눈에 비췬 유대인들에게 있어서의 예수는 정적의 대상이었기에 고소, 고발했지만 심판을 해야 하는 세계적 힘의 나라 로마황제의 파송을 받은 빌라도 총독은 자기의 법을 상식선에서 예수에게 죄가 없음을 시사했다는데 우리는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함께 먹고, 마시고,동고동락한 이웃에 대한 바른 평가를 못하고 처음만나 이웃에 대한 평가에는 후한 것이 우리 인생사에 얼마든지 있는것이다. 너무 잘 알기 때문에 공인이 됐더라도 존경하질 못하는 우리네풍토, 공인이 되어서 권위가 주어졌건만 자기와 소년시절, 청년시절함께 하였다는 이유 한가지 때문에 평가 절하를 함부로 하는 못된 버릇을 가지고 일국의 총독의 선고를 무시하고 오히려 자기들의 고소,고발의 목적 성취를 위해서 물리쳐 시위를 하던 예수님 당시 유대인과오늘을 사는 우리는 무엇을 얼마큼 다르냐는 것이다.

비록 적국의 지배자였더라도 예수님의 무죄 선언을 당시 유대인들이받아들였더라면 오늘의 유대 역사는 어떤 쪽으로 흘렀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빌라도가 아무죄도 찾지 못했다고 한때 사용한 헬라어는 아이티안(aitian) 인데 그 말은 "원인" "이유" 즉 근원적인 죄를 논할때 사용하는 법을 용어하므로 "고소의 원인고발의 이유"를 찾지 못했다는말로 이해 해도 과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죄의 원인도 고소,고발의 이유 성립도안되는 기소유지 불능의 이유로 끝까지 물고 늘어진 결과였다는 점이다.

당시 세계를 제패한 대 로마제국이 세운 총독 빌라도의 "무죄" 선언

은 예수 그리스도의 죄 없으심의 그 선언은 죄의 근원이 없다는 선언이고 보면 인류의 대표자로서의 예수교 밖에서의 선언문 낭독의 소리였던 것이 명백하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되심을 보라
로마서 3장 10절에는 "의이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락도 했는데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죄없으신 의인이신데, 하나님의 거록하신 뜻 인류 구원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자기 희생의 십자가 죽음에 성큼 다가 서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우리를 위해 다시 사셨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그러기에 진정한 화목의 제물이 되신 것이다.

죄 범한 인간, 원죄적 인간과 공의의 하나님 사이에서의 중보자 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볼수 있는 눈을 떠야 한다.

그 모습의 예수님은 이상적인 참 인간이신 것이다.
이사야 선지는 53장 3절에서 예수님의 초라한 모습을 말했다.
비록 초라해지는 한이 있더라도 주어진 사명을 완수하시기 위해 비하의 신분되신 그 모습은 참 인간모습이었다.

세상이 아무리 예수님을 멸시, 저주와 조롱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3. 우리가 들어야 할 소리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데리시고 산에 올랐을 때에 B.C 16세기 경의모세 B,C 9세기경의 엘리야를 만나는 초월적 신비의 체험을 하는 베드로 비롯한 제자들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저의 말을 들으라"(미17:5)고 하는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우리 인간이 듣지 않을 소리를 들으면 망한다는 교훈을 이미 에덴에서의 뱀의 소리를 들은 하와 사건에서 배웠다.

현대를 타락한 양심의 시대라고들 말하지만 우리들은 양심의 소리르듣지 않기 때문일 뿐이지 양심의 소리가 없어진 것은 아니란 것을 잘안다.

세상이 아무리 망했다 해도 양심의 소리를 들을 수 있기만 한다면 그세상은 희망이 있는 것이다.

양심은 살아 있기 때문에 선과 악, 전과 위, 의와 불의, 사랑과 미움을 분별할 수 있으므로 그 양심이 바로 도덕적 분별력이므로 인간이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에만 바른 생각으로 바른 행동으로 살수 있는 것이다.

4. 하나님의 사자의 소리를 들어라
하나님께서는 인간 세상에서 사자를 보내셔서 그때그때 마다 적절한말씀을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주셨고 이사야를 통하여 예수그리스도를 메시야로 듣게 했으며, 오늘에도 하나님이 세우신 신자들을통하여 말씀하고 계신다.

다윗의 경우는 천하를 한손에 잡은 대왕이었으니 하나님의 사자 나단의 소리를 듣고 왕좌에서 내려앉고, 무릎을 꿇고 대인이 되었으니 그것은 나단을 본게 아니라 그를 보내신 하나님의 권위를 보았다는 결론

이다.

죄를 지적 받을 때 무릎을 꿇었기에 대성한 그 모습을 본받아야 한다. 그러나 사무엘의 소리를 가볍게 여긴 사울왕의 멸망을 우리는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역사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도도히 흐르는 역사의 수레바퀴가 굴러가는 소리를 듣지 못하면 망할 수밖에 없음을 들을 귀가 있어야 한다.

순간은 속일 수 있어도 역사는 속일 수 없는 것이다.

성경은 역사를 포함했으므로 역사서로 보면 안된다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의 말씀이란 안목으로 보는 역사관이 되어야만바쁜 역사의 소리를 듣게 된다는 공식을 첨언하는 것이다.

그 역사의 소리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소리를 들어야 할것이다. 하나님의 소리를 말씀이라고 했고, 그 말씀의 정의는 로고스(logos) 의 개념으로 정의짓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안목에 비쳐진 역사관이 바로된 역사관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말씀 그것은 하나님 경외하는 것과 인간사랑이셨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 역사의 수레바퀴 소리가 양심을 통해서 들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의 소리를 통해서 바로 듣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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