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행복한 사람들 (시 01:1-6)

첨부 1


행복한 삶을 원하는 것은 모든 생명체의 공통된 욕구입니다.행복을 바라고 기대하는 태도나 방법은 각각 다릅니다.사람은 마음을 몸짓과 언어로 표현합니다.그러나 다른 생물체는 언어 표현은 불가능합니다.짐승들의 경우 꼬리를 흔든다든지 몸을 흔듭니다.그리고 소리를 지르기도 합니다.
행복의 척도 역시 다양해서 한가지만을 행복이라고 말하기는 곤란합니다.남이 볼때는 행복해 보이지만 불행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무척 불행해 보이는 사람이지만 자신은 행복에 넘쳐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행복한 조건을 골고루 갖추고 사는 사람이면서도 불행에 우는 사람이 있는가하면,산더미같은 불행의 조건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행복해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행복은 편한 것,즐거운 것,좋은 것,만족한 것입니다.
독일의 자연주의였던 「알렉산더 흄볼트」는 “행복이나 불행은 삶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의 본질보다는 그 사건을 대하는 방법에 따라 죄우된다”고 했습니다.
행복을 바라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행복을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들은 행복을 알고 말하고 가르칩니다.그러나 자신은 불행합니다.자신은 행복의 외곽지대를 맴돌고 있습니다.
어떤 유명한 철학자가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책을 썼습니다.그의 책이 출판되자 베스트셀러가 되면서,정신의사들까지도 환자 치료에 그 책을 이용하거나 추천하게 되었습니다.어느날 초췌한 환자 한사람이 정신과 의사를 찾아왔습니다.중증환자였습니다.의사가 그를 만나 면담후에 계속 치료할 것을 약속했습니다.그리고 그에게 책 한권을 소개했습니다.
“당신에게 도움이 될 만한 책 한권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어떤 책인데요”
“유명한 철학자가 쓴 책입니다.현재 공전의 베스트셀러입니다.”
“그 책을 소개해 주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책에 대해 들어 본 일이 있습니까”
한참만에 환자가 모기소리만하게 대답했습니다.
“제가 그 책을 쓴 저자입니다.”라고
둘째는 행복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느날 행복이 제발로 걸어서 찾아와 주기를 바라는 사람들입니다.이들은 점치러 다니는 사람들이고 사주팔자에다,그 해,그 달 운세를 보러 다니는 사람들이고 복권 사놓고 철야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저 산너머 행복이 있다기에 님과 함께 찾으러 갔다가 눈물만 글썽하여 돌아왔네”라는 헷세의 시가 생각납니다.
행복은 발이 없습니다.제발로 걸어서 찾아 오는 것이 아닙니다.길가다가 줍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인은 요행을 바라면 안됩니다.
오래전 교회 나온지 3개월된 교인한테서 전화를 받았습니다.정초에 친구들과 함께 미아리에 있는 「당갈봉사 처녀도사」를 찾아가 점을 쳤다는 것입니다.교회 나오기 전에는 년중 행사처럼 매년 정초가 되면 점을 보았다는 것입니다.그런데 금년 점괘는 너무 불길하고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목사님,점괘를 바꿔 달라」는 요청을 하는 것이었습니다.저는 그분에게 점자체가 헛된 것이라는 점과,점으로 드러난 예견된 운명이라도 신앙인은 뒤바꿔 놓는다는 점,그리고 성경은 점치는 일이나 점장이를 용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얘기하면서 신앙의 힘이 모든 걱정을 물리칠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가 받은 점은 무서운 것이었습니다.남편은 죽거나 다치고,8월 안에 사업이 망하고,그리고 자식중 하나가 변고를 입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그러나 신앙으로 승리했습니다.남편도 사업도 자식도 탈이 없었고,지금은 집사가 되었습니다.
만일 자신의 삶을 점이나 역학에 매달고 사는 사람이 있다면 빨리 돌아서십시오.
셋째,행복을 깨뜨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행복은 사람을 골라서 찾아가지 않습니다.모든 사람에겐 행복의 기회가 주어집니다.그러나 그 행복을 스스로 저버리거나 깨뜨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천재 시인 괴테는 「나는 일생 중 일주일 밖에는 행복해 본 적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넷째,행복한 사람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건강하고 오래 살고 부를 누리고 귀하게 살고 대를 이어가는 것들은 행복한 것으로 이해합니다.그러나 그런 것들만으로 행복이 성립되는 것은 아닙니다.앤드류 카네기는 “행복이란 외계의 정황에 따라 결정되기 보다는 마음의 상태 여하에 따라 결정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정말로 행복한 사람들이 누구인가를 만나게 됩니다.

1.지혜로운 삶을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1절을 보면 “복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라고 했습니다.인생을 꾀로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진실과 성실과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꾀는 악한 꾀가 있고 선한 꾀가 있습니다.그러나 대부분 꾀는 악하게 사용되기 마련입니다.꾀로 인생을 살고 세상을 살면 결국 자기 꾀에 넘어지게 마련입니다.악한 꾀로 출세하고 돈벌고 떵떵거리며 사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40대 중반의 샐러리맨들이 병에 걸리는 확률이 많다고 합니다.그것은 과도한 경쟁과 정신적 부담 때문이라는 것입니다.이런 현상을 정신의학에서는 스트레스 증후근이라고 합니다.악한 방법을 마다하지 않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몸부림쳐 돈벌고 큰 집을 산다고 하더라도 그 집에서 몇년 동안을 살 수 있겠습니까
악인의 꾀를 좇지 않고 살려면 가족간의 협력이 필요합니다.
남편은 바르게 벌고 바르게 살기를 원하는데 아내가 보챈다면 남편의 처신이 어려운 것입니다.
돈을 못번다는 둥,출세를 못한다는 둥,남을 빗대서 조롱을 한다든지 구박을 한다면 그 남편은 바보가 되든지 도둑놈이 되고 말 것입니다.반대로 아내는 바르게 살고 떳떳한 삶을 원하는데,남편이 도둑질하고 협잡한 돈을 가져다 주면서,그 돈으로 자식을 가르치고 살림을 살라고 한다면 그 아내의 정신적 고통이 어떠하겠습니까
부부가 손발이 척척 맞아 함께 공모하고 악을 좇아 산다면,그 끝은 뻔합니다.
시편 10:2을 보면 “저희로 자기의 베푼 꾀에 빠지게 하소서”라고 했습니다.그렇습니다.결국 악한 꾀를 좇는 사람은 그 꾀에 빠지게 됩니다.
악한 꾀는 인생을 사는 악한 방법과 수단을 의미합니다.
잠언 15:26을 보면 “악한 꾀는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이라도 선한 말은 정결하니라”고 했습니다.
머잖은 장래에 우리는 줄을 서게 될 것입니다.악한 꾀를 좇아 산 사람들이 서는 줄이 있을 것입니다.그리고 선을 좇아 산 의인의 줄이 있을 것입니다.어느 줄에 서야 합니까

2.겸손하게 사는 사람입니다.
1절에 보면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히브리어 가운데 주드(zud)라는 단어가 있습니다.그 뜻은 ‘끓어 오르다,오만하다,거만하다,우쭐대다’라는 것입니다.
헬라어 가운데 튑포오(tuphoo)라는 단어가 있습니다.그 뜻은 ‘연막을 치다,자기 기만에 부풀다,교만하다,자고하다’라는 것입니다.두 단어가 뜻을 설명해 줍니다.교만한 자는 거품이 끓어 오르듯 우쭐대지만 그 실상은 별 것이 없습니다.
교만한 사람일수록 자신의 약점을 감추기 위해 연막을 칩니다.
정말로 학식이 풍부하고 인생 경험이 있는 사람은 거들먹 거리지 않습니다.돈 있다고 거들먹거리고 돈 자랑하는 사람은 대개가 졸부들입니다.
행복한 사람은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습니다.
성경을 보면 교만한 사람이나 성읍은 한결같이 심판을 받았습니다.
사울왕도 교만하다가 왕조가 끝났습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나 벨사살도 교만하다가 심판을 받았습니다.
에스겔 16:49을 보면 일찌기 유황불 심판을 받은 바 있었던 소돔의 죄를 교만이었다고 했습니다.
교만 가운데 가장 무서운 교만은 무신론입니다.
시편 10:4을 보면 “악인은 교만한 얼굴로…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잠언 16:18을 보면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고 했고 야고보 4:6에서는 “교만한 자를 하나님이 물리치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계신 사실을 인정하고 하나님 떠나선 살 수 없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그리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살아야 그것이 참 행복임을 믿고 살아야 합니다.

3.믿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본문 2절을 보면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라고 했습니다.율법을 즐거워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즐거워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싫은 사람은 그 말씀을 좋아 할 까닭이 없습니다.그러나 하나님을 좋아하고 사랑하고 섬기는 사람이라면
그 말씀을 즐거워하고 아침 저녁으로 묵상할 수 밖에 없습니다.
설교 듣기가 거북한 사람,성경을 펴서 읽기가 겁나는 사람,십계명을 펼치면 얼굴 색이 변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는 사람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묵상한다는 것은 그 말씀을 신뢰하고 순종하고 실천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중요한 것은 「주·야」라는 것입니다.
주는 낮이고 야는 밤입니다.낮은 밝고 밤은 어둡습니다.밝을 때나 어둘때,기쁠때나,슬플때,좋을때나,나쁠때,성공이나 실패에도 주의 말씀을 묵상하고 실천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이 본문의 가르침입니다.그러면 그들이 누리는 행복이 무엇일까요 본문 3절이 그 해답입니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그 잎사귀가 마르지 않음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형통이란 막힘이 없는 삶을 말합니다.
고속도로를 달려 본 사람은 이해할 것입니다.시속 100km로 2시간 달리다가 4시간 동안 차가 밀려 그 자리에 서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시속 60km로 계속 막히지 않고 달리는 경우가 있습니다.막히지 않고 계속 달리는 것이 훨씬 편하고 유쾌합니다.
형통이란 막히지 않고 달리는 것입니다.조금 느릴 수 있지만 가다가 쉬는 것보다는 훨씬 좋습니다.
본문은 형통한 삶을 시냇가에 심은 나무에 비기고 있습니다.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고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않는 나무처럼 된다는 것입니다.시드는 나무,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는 제 구실을 못하는 나무입니다.
죠지 갤럽이 어떤 사람들이 행복한가를 알아보기 위해 여론조사를 실시했다고 합니다.
어떤 텔레비젼 인터뷰에서 조사결과에 대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조사결과 가장 행복한 사람은 생생한 종교적 체험을 가진 사람들이었고,가장 불행한 사람은 밤낮으로 술집을 드나드는 사람이었다”고 했습니다.
본문 6절을 보면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라고 했습니다.
결론이 되는 말씀입니다.
가장 행복한 사람은 하나님이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가장 행복한 삶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삶입니다.
가장 행복한 일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일입니다.
지금 내가 하는 일과 살아가는 삶이 하나님이 인정할 만합니까
나는 지금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니라면 불행한 사람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