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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을 기다리라 (시 13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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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은혜로 이번 미국 전도 집회를 무사히 끝내고 돌아오게 된 것을 감사드립니다. 그 동안 부족한 이 종을 위해서 기도해 주신 여러분에게 또한 감사드립니다.
몇 해 동안 세계 경제의 불황으로 인해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마는 미국의 경제가 다소 회복되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이 영향이 우리에게도 미치게 되면 이 어려움에서 벗어나게 될 것을 기대하게 됩니다.

이미 봉독하신 말씀 가운데서 5-6절을 다시 받들어 읽겠습니다. “나 곧 내 영혼이 여호와를 기다리며 내가 그 말씀을 바라는도다 파수꾼이 이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이사야서 21장 11-12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두마에 관한 경고라 사람이 세일에서 나를 부르되 파수꾼이여 밤이 어떻게 되었느뇨 파수꾼이여, 밤이 어떻게 되었는뇨 파수꾼이 가로되 아침이 오나니 밤도 오리라”
선지자 이사야 때 북방이 강대국 앗시리아가 일어나서 중동 일대를 침략하며 약탈하고 압박하였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이러한 국제적인 대 혼란기에 역사의 망대에 서서 파수꾼으로서의 사명을 다한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두마는 에돔을 의미한 것이고 세일 산은 에돔의 산입니다. 그 당시의 사정을 정확하게 말하기는 어렵지만 이 예언은 세기를 통해서 인간의 깊은 심금을 울리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신령한 가운데서 역사의 높은 망대 위에 서 있었습니다. 그는 신령한 눈으로 열국을 살피며 신령한 귀를 열어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응답하는 것입니다. 밤이 깊었습니다. 멀리 유다 나라 남방인 에돔이 세일 산에서 부르짖는 소리가 은은히 들려옵니다.
“파수꾼이여, 밤이 어느 정도 되었습니까 파수꾼이여 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왜 파수꾼이 아침을 이처럼 기다립니까 적이 밤을 이용해서 어두운 틈을 타서 습격을 하기 때문에 밝은 낮보다 어두운 밤이 그렇게 위험한 것입니다.
중한 환자가 시간을 다툴 때 밤이 그렇게 길게 느껴질 수가 없습니다. 환자를 돌보는 사람은 밤을 지새우면서 새벽이 오기를 기다립니다. 캄캄한 밤에는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지만 아침이 되면 어딘지 모르게 마음이 놓일 것 같은 기분입니다.
저는 한국 동란 때 북한에서 피난을 나오다가 군에 입대해서 서해안 백령도에서 훈련을 받고 용매도라는 조그만 섬에서 군복무를 했습니다. 용매도라는 섬은 황해도에 속해 있는 섬인데 밀물이 들어오면 섬이 되고 썰물 때가 되면 육지와 연결이 되어 걸어다닐 수 있는 섬이었습니다. 갑자기 밀어닥친 피난민이 3만명 이상이나 되어 그 조그마한 섬이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목욕물은 고사하고 식수조차 구하기 어려웠습니다. 저는 군에서 보초를 서는데 낮에는 별로 어려울 것 없지만 문제는 밤이었습니다. 요새 같으면 전기를 환하게 켜서 상대편을 비추면 괜찮을 터인데 그때는 어느 섬에 전기라는게 있었습니까 아주 캄캄한데, 그것도 물이 들어와 잠겨 있으면 되는데 썰물 때가 되어 물이 다 빠져 나가면 적군이 어디서 어떻게 습격할는지 모르는 형편이다 보니 새벽이 그렇게 기다려 질 수가 없었습니다. 먼동이 터서 온누리를 환하게 밝혀 오면 그때 안도의 한숨을 내쉬곤 했었습니다.
“파수꾼이여, 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하는 말씀이 이해할 수가 있었습니다. 파수꾼에게는 밤이 가장 책임 감당이 어려운 때이므로 이 때가 빨리 지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밤은 다른 사람이 다 잠 속에 들어간 조용한 때이므로 사람들이 깨어서 활동하는 낮보다 밤에 혼자 깨어 있는 사람에게는 더 외롭고 피곤합니다.
여행을 하다 보면 남과 북으로 다닐 때는 시간의 차이가 없어서 비교적 괜찮은데 동서로 여행을 해서 미국엘 가던지 구라파에 가면 시차 문제로 당하는 어려움이 큼니다, 이번에 첫 집회가 미국 동부 뉴저지에서 있었는데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미국 동부와 우리 나라는 열한 시간 차이니까 낮과 밤이 완전히 바뀝니다. 그러니까 몸은 그대로인데 시간은 바뀌니까 여기에 적응하는 고통이 있습니다.
피곤해서 잠을 청해도 눈만 아프지 잠이 오지 않고 잠이 들었다가도 새벽 두시 세시가 되면 깨게 됩니다. 남들은 다 깊이 잠을 자고 있는데 혼자 깨어 있자니 밤이 괴롭습니다. 밤에 잠을 자지 못한 경험이 있는 사람은 새벽을 기다리는 마음을 이해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오늘 주신 이 말씀은 이번 미국에 전도 집회에 가서 잠 못 이루는 밤에 준비한 것입니다.
영적으로 말하면 환난은 어두운 밤입니다. 핍박도 어두운 밤입니다. 실패도 어두운 밤입니다. 환난의 밤, 핍박의 밤, 고통의 밤, 실패의 밤이 깊습니다. 이 밤이 얼마나 더 계속되겠습니까 이 밤이 지금 몇 시나 되었습니까
여기 환난의 밤에 아침을 기다리는 영혼의 부르짖음이 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신령한 망대에서 이 부르짖음을 들었습니다. 이 부르짖음은 옛날에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옛날에도 있었고 오늘도 있습니다. “파수꾼이여, 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자유를 잃고 철의 장막 속에서 허덕이는 내 겨레의 부르짖음이 들려 오지 않습니까 요사이 북한에서 귀순한 분들의 말을 들어 보셨지요
“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얼마나 더 기다리면 새벽의 여명이 밝아오겠습니까 이 핍박을, 이 괴로움을, 이 억울함을, 이 배고픔을 얼마나 더 참고 견디고 기다려야 하겠습니까”
여러분, 이 부르짖는 소리가 들리십니까 민족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깊은 밤같은 처지에서 헤매는 외로운 영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환난의 밤이 있습니다. 질병의 밤이 있습니다. 고통의 밤이 있습니다. 재난의 밤이 있습니다. 실패의 밤이 있습니다. 고독의 밤이 있습니다. 가난의 밤이 있습니다. 시험의 밤이 있습니다. 이 밤에 부르짖는 소리가 얼마나 처절하게 들립니까 우리가 듣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사야처럼 밤중에 부르짖는 울부짖음 소리를 들어야겠습니다. 그리고 이 깊은 밤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겠습니다.
이 깊은 밤에 부르짖는 사람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아침이 온다”고 말씀하십니다. 캄캄한 밤중에 고생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오래지 않아 아침이 온다”고 하십니다.
멀리 갈 것 없이 우리 나라를 보세요. 사실 그 동안 태양은 밝게 빛나고 전깃불은 환하게 밝았었지만 30여년 동안을 군사 독재의 어두운 밤에서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나 밤일 수만은 없습니다. 새벽이 옵니다. 먼동이 터옵니다.
그렇습니다. 어두움은 빛에게 설 자리를 내어놓아야 합니다. 여러분, 어두운 밤이 지나고 밝은 아침이 다가옵니다. 이것이 역사의 수레바퀴입니다. 이것을 역행할 때 이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려 죽습니다. 우리 조국, 대한민국도 새아침이 밝아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더 밝아지기를 기대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랜 질병에 시달리며 어두운 밤에 부르짖는 분이 계십니까 얼마 전에 관절염으로 고생하시는 분을 찾아뵈었더니 너무너무 아프고 고생스러워서 하나님께 “하나님, 저를 빨리 데려가 주세요.”라고 기도하셨다는 말씀을 들을 때 가슴이 아팠습니다. 얼마나 고통그러웠으면 그렇게 기도하겠어요 밤은 깊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고통의 밤이 지나가고 건강의 아침이 올 것을 기도합니다.
말라기 4장에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 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같이 뛰리라” 했습니다.
어두운 밤이 지나고 의의 태양이 떠오를 때 치료의 광선을 발해서 우리의 상한 심령, 아픈 몸이 회복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 어두운 밤이 지나고 밝은 아침이 올 것을 기다리십시다.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실패의 밤에 부르짖는 분이 계십니까 언제나 어두운 것은 아닙니다. 지금 밝게 성공하신 분들은 실패의 밤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실패의 밤을 잘 통과하고 아침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실패의 밤을 맞을 때, 고통의 밤을 직면할 때 낙심하거나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을 기다리셔야 합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해도 싸이지 아니합니다.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아니 합니다.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합니다. 넘어지나 아주 넘어지지 아니하고 다시 일어납니다.
여러분, 지금은 어두운 밤이지만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닙니다. 어두운 밤이 지나가고 성공의 밝은 아침, 번영의 밝은 아침, 건강한 아침, 기쁨의 아침이 다가옵니다. 위로의 아침, 승리의 아침, 찬송의 아침이 다가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래서 내려오는 말에 ‘고진감래’라는 말이 있습니다. 쓴 것이 지나면 단 것이 옵니다. 성경에도 “저녁에는 눈물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온다”고 말씀했습니다. 밤이 깊으면 반드시 아침이 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깊은 밤중에 처했을 때 낙심하거나, 원망하거나, 의심하거나,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계속 힘쓰고, 계속 분발하고, 계속 싸우고, 계속 용기를 내고 나에게 맡겨진 책임을 바로 감당해야 합니다. 흔들리지 말고 아침이 오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잠언 20장 22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를 기다리라 그가 너를 구원하시리라” 우리는 주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런데 거기에 보면 계속해서 주신 말씀에 “너는 악을 갚겠다 하지 말고 여호와를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억울한 일 당했어도 보복하려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억울한 일을 당할 때 나를 손해시키고 욕보인 사람에게 보복하고 싶은 생각이 일어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너는 악을 갚겠다 하지 말고 여호와를 기다리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말씀은 성경의 여러 곳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잠언 24장 29절에 보면 “너는 그가 내게 행함같이 나도 그에게 행하여 그 행한 대로 갚겠다 하지 말지니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구약 율법에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는 감정이라는 것이 있어서 원수를 갚을 때 바로 갚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5장 39절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소극적인 대응책이 아니라 적극적인 대응책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정신을 따라서 로마서 12장 17-19절에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신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러하므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5절에도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게 하지 말고 오직 피차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좇으라”고 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3장 9절에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 했습니다.
여러분, 요셉의 생애를 보세요. 그가 얼마나 어두운 시절을 보냈습니까 무려 13년간이란 세월을 이유도 알 수 없는 고생을 했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했습니다. 밤같이 캄캄한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이 어두운 시절에 불평하거나 불만을 품거나 원망하거나 반항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기다리며 잘 참았습니다. 요셉은 그처럼 억울한 일을 당했어도 한 번도 자신을 변명한 적이 없습니다. 기가 막힐 정도의 어두운 사망의 골짜기를 통과했지만 요셉은 하나님을 기다렸습니다.
주님을 끝까지 기다렸더니 어두운 밤이 지나고 광명한 아침이 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애굽의 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몸이었지만 일약 애굽의 총리로등용되게 된 것입니다. 온 세계를 지배하던 그 당시 애굽의 총리로서의 세력이 얼마나 컸습니까 그때 동생 요셉을 애굽에 종으로 팔아 버리고 아버지 야곱에게는 요셉이 짐승에게 잡아 먹혔다고 거짓말했던 형들이 지금 애굽의 총리가 된 동생 요셉을 볼 때 얼마나 무서워 떨었겠습니까 그러나 요셉은 형들에게 원수갚을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원수를 갚는 것은 하나님께 맡기고 그 형들을 용서했습니다.
창세기 50장 19절을 보세요. “요셉이 그 형들에게 이르되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려 하셨나니 당신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했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들으시면서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오랜 싸움에서 누가 이겼습니까 요셉은 문자 그대로 선으로 악을 이겼습니다. 이것은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의 생활 철학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30장 18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무릇 여호와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이시야 8장 17절에는 “여호와를 나도 기다리며 그를 바라노라” 했습니다. 사실 신앙생활이란 주님을 기다리는 생활이란 주님을 기다리는 생활입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기다린다는 것은 간절하게 사모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적에게 포위되어 있는 군인들이 지원군을 기다림같이, 비가 오지 않아 가뭄이 심할때 하늘을 쳐다보며 단비를 기다리는 농부같이 기다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과연 우리가 이런 마음으로 주님을 기다립니까 이 시간 예배당에 나오신 여러분, 이런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을 기다리십니까
시편 기자가 말한 것처럼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사모하듯이” 주님을 사모합니까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 것을 아는 포수들은 시냇가에 숨어 있다가 사슴이 시냇가에 나올 때 총을 쏜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다고 하는 것은 생명이 위험을 당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사슴이 물을 마시지 않고는 살 수 없기 때문에 생명을 내걸고 시냇가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심령이 이렇게 하나님을 찾기에 간절합니까
뿐만 아닙니다. 준비한 사람이라야 기다립니다. 시험 준비가 잘 된 학생이라야 자기의 실력을 나타낼 수 있는 시험 날짜를 기다립니다. 손님이 오실 때 맞을 준비가 다 된 가정이라야 손님 오시기를 기다립니다.
여러분, 신령한 의미에서 우리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과 약혼한 신부와 같은데 신랑 되시는 예수님을 맞을 준비가 다 되어 있습니까 혹시 오늘밤에 주님이 오신다고 해도 당황하지 않고 반갑게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하며 맞을 준비가 다 되어 있습니까
어떤 분은 그럽니다.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그런데 조금만 더 계시다가 오시옵소서. 제 준비가 좀 덜 되었습니다.”
언제든지 맞이할 준비를 하고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왜 우리가 주님을 기다려야 합니까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그 누구도, 세상의 그 무엇도 우리를 구원 할 수 없습니다. 주님만이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므로 주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세상에 소망을 두었던 사람은 세상의 것이 변하면서 실망 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거기에 눈물이 있고 한숨이 있습니다.
설사 소망하던 대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거기에 만족이 없습니다. 만족이 있다 해도 잠깐입니다. 세상의 소망은 실망의 식은 재로 화해 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에겐 실망이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5장 3절 이하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 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이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8장 24-25절에 보면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오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했습니다.
주님을 기다린다는 것은 주님을 신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을 의지할 때 우리의 힘이 됩니다. 주님을 의지하고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손해 나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때는 원치 않는 어려움에 직면합니다. 너무 힘이 듭니다. 괴롭습니다. 아픈 일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지내 놓고 보면 오히려 없었던 것보다 더 큰 유익이 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께서 이번 어려움을 통해서 어떤 유익을 주시려 하나”하고 기다리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기다리는 것을 잘 못합니다. 성미가 너무 급합니다.
그러나 어떤 일을 당해도 당황하거나 불안해하거나 초조해하거나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주님을 기다립시다.
반드시 우리 지각 밖에 넘치는 축복으로 채워 주실 것을 믿습니다.
물론 이 말씀은 온 세상 사람을 향해 주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특별히 우리 민족을 향해 주신 말씀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왜냐하면 세계 여러 민족 가운데 우리 민족은 기다릴 줄 모르는 민족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약점입니다.
줄을 서서 기다릴 때도 우리처럼 조급한 사람은 없습니다. 남들은 서서 여유 있게 기다리는데 우리는 속이 달아 야단입니다. 식사를 시켜 놓고도 기다리지 못합니다. 밥을 먹어도 말없이 급히 먹어야 했습니다. 커피를 마셔도 냉수 마시듯이 꿀꺽꿀꺽 마십니다.
역사적으로 그렇게 살아서 그것이 몸에 밴 것 같습니다. 기다려야 합니다.
기도를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실 것을 믿고 기다리십시다.
1994년 5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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