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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손가락 (롬 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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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신체 구조는 대단히 오묘하고 거기에 붙어 있는 지체 지체가 발휘하는 기능도 퍽이나 신비스럽습니다. 모든 지체중에서도 특히 손 가락의 기능은 유난하게 눈에 뜨입니다. 음악하는 학생들이 손빠르게 피아노의 건반을 칠 때에만 사무실에서 여사무원의 부드러운 손끝이 타자기를 칠 때에 신비스러운 느낌은 아닐 것입니다.

 손가락 중에서도 특히 둘째 손가락은 심각한 기능을 발휘합니다. 왜 냐하면 어떤 때에는 그것이 방아소를 당기자는 아니하여도 실탄 아닌 지탄을 가함으로써 소리 없는 총으로 멀쩡한 사람을 죽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검지는 다만 세상에서 되어지는 어수선한 일들만을 저지 르는 것이 아니라 하늘과 땅에 관한 심오한 진리를 가르치는 데에도 사용되는 수가 많습니다.

 기독교와 불교에는 이 검지의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사도 요한은 나사렛 예수를 보자마자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하나님의 영 이신 성령을 가리켜 말한 일이 있는데 그 까닭은 하나님을 올바르게 가리켜 주시는 이는 실상인즉 이 성령이기 때문입니다.

 검지의 이야기는 불교에서도 볼 수 있으니 불교계의 전승대로 하면 석가는 태어나자마자 세 발자국을 떼고 나서 "하늘과 땅에서 오직 나 홀라만이 존귀하다"고 말했다 합니다. 그리고 그는 이 때에 바른손으 로 하늘을 가리키고 왼손으로는 땅을 가리켰다고 전해집니다. 이때에 석가가 사용한 손가락도 역시 검지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가리키신 하늘은 이와 달라서, 그는 하늘에 계신 하 나님 아버지를 가리켰을뿐 아니라 생사관두에 섰을 때에도 "내 뜻대로 마시고 당신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호소했던 것입니다. 석가에게는 검지로 가리킬 수 있는 아버지가 없었지만 예수에게는 모든 일을 그의 뜻대로 행해야 되는 아버지가 계셨습니다.

 불교의 세계는 사색과 명상의 세계요, 깨달음과 독백의 세계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가리키신 하늘 세계는 부버의 이른바 "나와 당신의 대화"의 세계요, 신학자 브루너가 재치있게 말해 준 "만 남"의 세계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이 만나는 이 만남은 집을 떠 났던 탕자와 그를 맞아들이는 아버지와의 만남이기 때문에 바르트는 그것을 "화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불교에는 본시 사색과 명상을 통 한 "깨달음" 과 "앎"의 세계는 풍부하지만 인격과 인격이 맞부딪치는 "만남"과 "사귐"의 세계라든지 "화해"의 세계는 희박한 듯합니다.

 우리는 이와같은 실정을 선종의 "지월"의 교훈에서 뚜렷하게 엿볼 수 있습니다. 이 지월의 교훈이란 다름 아니라 "불성이란 마음속에 깊이 잠긴 달과 같은 것, 내 마음을 거울처럼 밝힐 때 비로소 비취어지는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거기에서는 공중에 높이 뜬 둥근 달이 아니라 "마음속에 깊이 잠긴"자신의 깨달음을 "거울처럼 비취는 달"이 라고 가리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분명히 나와 당신의 대화의 세계나 화해의 세계보다도 자기 호를 사색하고 명상에 잠기는 독백의 세계가 전개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께서 가리키신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할지 모릅니 다. 그러나 이와 같은 요구는 이제 와서 시작된느 것이 아니라 예수 당시의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들 뿐 아니라 12제자의 한 사람인 도마 까지도 요구했던 것입니다. 도마는 또한 예수가 부활했다는 소문을 듣 고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요20:25). 여기서 우리는 현대 과학이 숭상하는 실증주의의 단서에 접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실증주의 정신에서 확인된 확실성과 신앙의 확실성과는 다른 것입니다. 왜냐하면 실증주의 정신은 모든 것에다 손 가락을 넣어보라고 요구하지만 그 실증주의 정신자체에 대해서는 손가 락을 넣을 수가 없는 것인데 이와 같은 확실성이 바로 신앙의 확실성 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그가 회심하기 이전에는 하나의 실증주의자였습니다. 그 래서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든지 그가 만성의 구원을 이룩 하실 구세주시라는 것을 완강하게 거부함과 동시에 그와 같은 허무한 소식을 퍼뜨리는 그리스도인이나 그들의 교회를 질그긋 부수듯이 박해 했던 것입니다. 그러던 사울이 회심하여 바울이 되고 이제까지 박해하 며 부수던 그리스도 교회를 증거하기 위하여 혁명적인 노력을 계속한 까닭은 그의 삶에 획기적인 변화가 생겼던 결과인데,이는 고대 교회가 말한 "하나님의 손가락"인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하늘에 계신 아버지 의 뜻을 가리켜 주셨을 뿐 아니라 그에게 이방 사도의 사명을 맡겨 주 신 결과라는 것이 사도행전과 바울 서신이 주장하는 바입니다. 이에 그는 그의 서신을 시작할 때마다 자기의 사도직은 "사람에게서 난 것 이 아니라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와 아버지 하나님의 소명에 의한 것이라"고 강조했던 것입니다(롬 1:1,고전1:12,갈1:1등).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손아귀에 사로잡힌 한 사람의 모습을 보게 되거니와 실상인즉 구약의 예언자와 신약의 모든 사도는 자기의 생각 이나 느낌을 말해 주는 사상가나 그런 의미의 종교가가 아닙니다. 그 들을 부르시고 부리신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었 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역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 키던 손가락이었다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고백입니다. 그러나 에언자와 사도들 사이에는 한 가지 구별이 있었으니 예언자들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던 "대망"의 손가락인 데 반하여 사도들 은 이미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 "회상의 손가락이라는 점입니 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가락"이 그들을 한결같이 쓰신 결과 그들 또 한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손가락이 되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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