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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가 내 아버지께로 올라간다 (요 2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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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개 요

예수에 대한 구전(口傳)은 주로 세 갈래로 전해졌다는 것이 정설이 되어 있다. 우선 예수의 수난과 부활 전승이 가장 중요하게 전해졌고, 다음은 예수의 기적전승 그리고 그의 말씀 전승이 뒤따랐다. 예수의 기적 사화와 말씀은 4복음에 있어서 그 차이가 매우 심하지만, 수난과 부활 전승은 비교적 많은 일치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수난과 부활 사화에 있어서도 세부에 있어서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 것을 알 수 있다.

요한복음은 전체적으로 공관복음과 비교할 때 여러 면에서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4호, 20-22쪽 참조). 오늘의 본문과의 관계에서 한 가지만 지적한다면, 예수의 복음을 공관복음에서는 수평적인 관점에서 묘사하고 있는 반면, 요한복음에는 수직관계를 가지고 묘사하고 있다. 로고스가 수직으로 세상으로 내려오셔서 육신을 입으시고 배척을 당하시는 사건들을 12장까지 설명한 다음, 13장부터는 다시금 하나님께로 수직으로 올라가시는 예수를 묘사하고 있다. 예수가 십자가를 지시는 일이 곧 영광을 얻으시는 일이며 아버지 하나님께로 올라가시는 일로 취급하고 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는 그의 승천 기사가 없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이 토막을 해석해 보려는 것이다.

Ⅱ. 원문비평

이 토막도 여러 가지 원문비평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렇다할 만한 중요한 문제는 없는 대목이어서 논의를 생략하기로 한다. UBS 비평판 헬라어성경 4 판의 각주에 한 가지 문제도 제기하지 않은 것을 보아서도 이 토막이 원문비평적으로 무난한 것이라는 판단을 내릴 수 있다고 본다.

Ⅲ. 주 해

< 1절 >

안식 후 첫날 (te de mia tun sabbaton). 엄격히 말해서 `한 주간의 첫날'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한 주간의 마지막 날이 안식일이고, 안식일은 금요일 저녁 해질 무렵으로부터 토요일 해 질 때까지니까, 토요일 저녁부터 주간의 첫 날 즉 일요일이 시작된다.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proi skotias eti ouses). 문자적으로 말하자면 `새벽, 아직 어두움이 깔려있을 때'이다. 그러니까 유대 식으로 말해서 토요일 해가 지면서 시작된 일요일의 밤이 지나고 제 4경(오전 3시-6시)이 되었을 무렵일 것이다. 이것은 결국 완전히 날이 밝을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던 여성 제자의 열성과 조바심을 나타내 보이는 요소이다. 막달라 마리아. 네 복음서가 공통되는 것이 바로 막달라 마리아가 매 복음서에 다 나타난다는 점이다. 네 복음서가 각각 다른 것 중의 하나가 막달라 마리아 외의 다른 여성의 이름과 수이다. 마태복음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그 다른 마리아'라고 되어 있다. 마가복음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라고 되어 있다. 누가복음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가 역사적 사실을 규명할 도리는 없다. 네 사람의 복음서 저자는 각각 조금씩 다른 전승을 토대로 해서 글을 쓰고 있으며, 그들은 어느 하나도 목격자가 아니었기에 자기들 앞에 있는 전승을 자료로 하고 있는 것이다. 각 복음서 저자는 역사적 사실을 밝히려는 생각보다는 그 사건의 의미를 나름대로 전하려는 데 목적을 둔 것이다.

무덤에 와서 (erxetai.....eis to mnemeion). 여기의 '와서'라는 동사 [에르케타이]는 역사적 현재형(historical present)이어서 보다 생생하게 사실을 묘사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이 뒤에도 여러 번 역사적 현재형 동사를 사용하고 있다. 새벽 아직 어두울 때 여자가, 그리고 요한복음대로가 사실이라면 막달라 마리아라는 여자가 혼자서 무덤을 찾아 나섰다는 것은 보통 일이 결코 아니다. 대낮에라도, 그리고 남자라도, 무덤에 간다는 것은 무섭고 소름이 돋는 일이 아닌가. 누가복음에 의하면 이 마리아는 일곱 귀신에게 사로잡혔다가 해방된 자로서(눅 8:2) 예수의 여성 제자들의 선봉이었던 것 같다(막15:40-41,47;16:1;마 27:55-56,61;눅 8:2-3;24:10). 예수에 의해서 이미 새로운 삶을 경험한 마리아는, 육적으로 예수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은인이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그가 누구보다도 예수를 사모하고,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도수가 가장 컷을 것도 짐작할 만하다. 여기에 이렇게 그가 단독으로 무덤을 찾아간 것으로 묘사함으로써, 예수에 대한 그녀의 관심과 감사의 마음과 애도의 정의 지극함을 잘 드러내 준다.

돌이 무덤에서 옮겨간 것을 보고 (kai vlepei ton lithon ermenon ek tou mnmueiou). `그'라는 정관사가 돌 앞에 있어서 그 전 날 본바 있는 돌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는 무덤 문을 큰 돌로 막았다는 말도 없고 심지어 막았다는 말조차 없다. 그러므로 그 돌은 관례에 따라 무덤을 막는 일반적 돌이어서 그것을 옮기는 일이 어렵다는 인상을 주지 않는다. 마가복음에는 여자들이 그 돌을 어떻게 옮길까 걱정을 하는 광경을 그렸지만 (막16:3), 여기는 그런 걱정을 하지 않는다. 그 돌을 `옮겨간'이란 말은 현재완료 수동 분사의 번역으로서 정확히 말하자면 `이미 치워져있는'이라는 뜻이다. 부활의 주님 앞에 그까짓 돌 하나가 무슨 문제이겠는가. 전혀 문제시하지 않고 있다. 여기의 `보고'([블레페이],blepei)는 역시 역사적 현재 동사이다.

< 2절 >

시몬 베드로와 예수의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1절과 2절을 연결하는 접속사 [운]이 있다. 무덤을 막았던 돌이 이미 치워져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뜻밖의 일이 일어났기 때문에라는 말이다. 달려가서는 한 동사처럼 느껴지는 데, 원문에는 [트레케이 카이 에르케타이] 두 개의 역사적 현재 동사로 나뉘어 있다. 그러니까 그녀가 달음박질을 해가지고 두 제자에게로 갔다는 두 가지 동작을 말한 것이다. 어째서 그녀가 베드로와 예수의 사랑하시던 제자에게로 갔을까 요한복음의 특색 중의 하나가 열두 제자를 열거하지 않는 다는 사실이다. 요한복음의 관심사는 누가 제자의 반열에 드느냐가 아니라 누가 예수를 바로, 그리고 잘 믿느냐이다. 시몬 베드로는 초대 교회의 대표적 인물로서 두각을 나타낸 사람인 것이 사실이지만, 예수를 믿어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기록하는 요한복음에 있어서는, 오히려 이상형을 베드로에게서 찾지 않고, 믿음에 있어서 한 발 앞서는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에게서 찾고 잇다. 이 토막에서 이 두 사람을 대조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에 이 두 제자를 언급한 것으로 보아 그 둘이 아마도 예수의 제자 집단의 대표 격인 사람들이었던 같다.

마리아는 그들 둘에게 가서 말하였다 (legei autois). `말하였다' ([레게이],legei역시 역사적 현재 동사의 번역이다. 사람이 주를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에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여기의 사람은 사람들이다. 즉 복수로서 여러 사람을 예상한 것이다. 원문을 분석해 보면 두 개의 문장이 연결된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는 `사람들이 주를 무덤에서 가져가 버렸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들이 그를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좀 더 문자적으로 번역한다면, "사람들이 주를 무덤에서 치워버렸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이 그를 어디 두었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가 될 것이다. 개역대로 하면 알지 못하겠다는 동사의 목적어가 앞에 있는 두 동작 전부로 보인다. 여기의 우리는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 1절에 막달라 마리아 한 사람이 무덤에 갔던 것으로 되어 있지만, 공관복음에 나타난 대로 세 사람의 여성이 같이 갔었기에 `우리'라고 한 것이 아닐는지. 아니면 한국 습관처럼 `나'를 `우리'라고 말한 것인지. 아니면 마리아가 자기 앞에 있는 두 제자를 포함시켜서 한 말인지 알 수 없다.

< 3절 >

마리아의 말을 들었기 때문에 ([운],oun, `그래서') 두 제자는 동작을 취했다. 무서워서 문을 잠그고 숨어있던 제자들이 밖으로 나왔다는 것은 상당한 각오를 한 증거이다. 무덤을 향해서 길을 떠났다. 갈새([에르콘토]) 미완료 동사로서 얼마의 시간이 걸렸다는 것을 말해준다.

< 4절 >

두 제자가 함께 얼마를 달려갔다 (etrexon). [에르콘]도 미완료 동사로서 과거에 일어난 계속 동작을 말한다. 얼마를 달린 후에는 그 다른 제자가 속도를 내어 베드로를 앞질러 달려서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아마도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나이가 젊던가 발이 빨랐기 때문일 것이다.

< 5절 >

구푸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무덤에 먼저 당도한 그 다른 제자는 마리아를 통해 예비 지식을 가지고 왔었고, 그녀의 말대로 무덤이 환하게 열려 있는 것을 보았으며, 예수의 시신이 거기에 없다는 것을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무덤 밖에서 허리를 굽혀 안을 드려다 보고 시신을 싸매었던 고운 삼베들이 널려있는 것을 발견했다. 여기서 그 다른 제자는 이미 어떤 확신을 가졌던 것 같다. 예수가 살아계실 때 하시던 말씀, 즉 자기는 다시 살아난다고 하신 말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고 하신 말씀들을 상기했을 것이다.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다. 무덤에 들어가보나마나 예수는 그의 말씀대로 살아나셨구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같다.

< 6-7절 >

시몬 베드로도 그 다른 제자보다는 늦지만 뒤따라 무덤에 도착하여, 무덤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현장의 사실을 확인했다([데오레이] 관찰했다'). 시신을 싸맸던 고운 삼베들이 널려있는 것, 그리고 예수의 머리를 쌌던 수건은 삼베들과 같이 있지 않고, 개켜서(`말아져서', [엔테튈리그메논]) 한 곳에 따로 놓여 있었다. 이런 현상과 함께 예수의 시신이 거기에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뿐이다. "이상하다,어떻게 된 일일까" 하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 8절 >

그후에 밖에서 들여다보던 그 다른 제자도 베드로를 따라 무덤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더라. 무엇을 믿었을까 예수가 부활했다는 것을 믿었고, 물질 세계에서 영의 세계에로 옮아갔음을 믿었다는 말일 것이다. 이 점에서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와의 차이가 드러난다. 믿음에 있어서, 신령한 깨달음에 있어서,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를 앞선다. 요한복음 전체를 통해서 그 다른 제자는 이름을 밝히지 않지만, 그는 예수에 대한 가장 충실한 증인 역할을 했으며(요21:24), `믿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요한복음 저술 목적에 가장 적중한 이상형으로 나타났다.

< 9절 >

저희는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이것은 내레이터의 설명구로서 여기서는 특히 베드로를 겨냥한 말일 것이다. 예수는 누차 당신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고(요 2:20-21 ; 막 8:31 ; 9:31 ; 10:32-34 등), 성경에는 그것을 암시하는 구절들이 있는데(왕상 15:4;막2:22), 사람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아직 알지 못하더라'([우데포 에데이산])는, 예수를 오래 지켜보았고 특히 부활에 대해서 여러 번 말한 지도 벌써 상당한 시간이 경과했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부활이 무엇인지, 부활이라는 것이 있는 것인지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서도 얼마동안의 기간을 무지 가운데 있다는 것을 말한다. [에데이산] 은 과거완료형이지만 미완료의 뜻으로 사용된다

한글개역이 20:9를 괄호에 넣었는데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원문에는 그런 표가 없으니 구태여 괄호를 사용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 10절 >

두 제자 중 베드로는 믿음이 없이, 즉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이, 단지 예수가 무덤에 없더라는 사실만 알고 돌아갔다. 그러나 그 다른 제자는 믿음을 가지고 돌아갔다.

< 11절 >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무덤에 제일 먼저 왔다가 무덤이 열려있는 것을 보고 돌아가서 두 제자에게 보고한 마리아는 그 제자들을 뒤따라 달려왔던 것 같다. 그 두 제자가 무덤 안에서 서성대는 동안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의 서서[에이스테케이]는 과거완료 직설법 동사로서 그 두 제자가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이미 거기에 와서 얼마 동안 서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직도 날이 밝지 않아 어두워서였는지, 아니면 제자들이 자기들의 상념에 골몰하느라고 마리아를 주목하지 못하였는지,아니면 같이 돌아가자는 제자들의 권유를 마리아가 마다했는지 알 수 없다. 그녀는 아직 예수의 부활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냥 슬퍼하기만 하고 있었다. 자기의 생명의 은인이신 예수가 죽으셨다는 사실에 대한 슬픔에다가, 이제는 그의 시체조차 도난당한 어처구니 없는 일에 대한 답답함과 애석함이 그 슬픔을 가중시켰을 것이다. 그녀는 울면서[에클라이엔] 허리를 굽혀 무덤 속으로 몸을 기울였다. 어제 늦은 오후 확실히 그 무덤에 예수의 시신을 모시는 것을 그녀의 눈으로 똑똑히 보았기에, 그 자리에 확실히 있어야 할 예수의 시체가 없으니, 다시 한 번 확인하기 위해서 였을 것이다.

< 12절 >

그런데 예수의 시신을 뉘었던 그 자리에 시신은 없고 예수의 머리가 놓였던 자리에와 발이 놓였던 곳에 흰 옷을 입은 천사가 하나씩 앉아 있는 것을 그녀는 보았다. 무덤에 나타난 신령한 존재에 대한 4복음의 묘사가 다 다르다. 마태복음에는 하늘로부터 주의 천사 하나가 내려와서 무덤의 돌을 옮기고 그 돌 위에 앉아 있었으며 그 얼굴이 빛나고 옷이 눈같이 희더라는 것이다. 마가복음에는 한 청년이 길고 흰 옷을 입고 오른편에 앉아있더라는 것이다. 누가복음에는 두 사람의 장정이 빛나는 옷을 입고 여인들 곁에 서 있었다는 것이다. 어두운 새벽에 착잡한 심리 상태에 있던 여인들의 눈에 비친 그 신비한 장면이 어찌 한 가지로 묘사될 수 있었겠는가 4복음서에 각각 다 다르게 묘사될 만큼 신비스럽고, 인간 지각의 판단 영역을 초월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막달라 마리아는 그 전날 오후 예수를 안장할 때 그 시신의 머리는 어디에, 발은 어디에 두었다는 것을 보았고 기억하였기에 지금 두 천사가 정확히 시신의 머리와 발 자리에 앉아 있었다는 것을 관찰한 것이다. 천사들이 예수의 시신이 있던 자리를 차지했고 예수의 시신은 보이지 않으니, 놀랍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했을 것이다. 부활이 무엇인지를 아직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는 마리아의 시각에 비친 이상(異狀)들이다

< 13절 >

천사들이 가로되. 마리아는 천사들의 이상을 눈으로 볼 뿐 아니라 이제는 그들의 음성을 듣는다. 초월 세계와의 교통을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마리아는 여전히 물질 세계의 사고를 넘지 못한다. "사람들이 내 주를 가져가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주를 어디다 두셨는지 나는 모르겠습니다"라는 말을 천사들에게도 되풀이했다. 20:2에서는 '우리가' 모른다고 했는데 여기는 '내가' 모른다고 말한 것이 다를 뿐이다. 마르다는 여전히 예수가 부활하셨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 14절 >

무덤 입구에 서서 그 안에 있는 천사들과 대면하여 대화하던 마리아가 그 대화를 마치고, 이제는 더 이상 천사들과 대면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기 때문에 무덤을 등지고 돌아섰다. 무덤 안에는 예수의 시체가 없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일 것이다. 마리아는 돌아섰을 때 이미 거기에 서 계시는 예수를 발견했다. 예수의 서신 것. [헤스토타]는 현재완료 분사인 바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이미 전에 와서 서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활하신 주님은 벌써부터 마리아 곁에 와 계셨던 것이다. 그런데도 마리아는 그분이 예수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욱 에데이]는 미완료의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얼마의 긴 시간 동안 알지 못했다는 뜻이다. 마리아는 전혀 부활을 상상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 눈 앞에 계시는 분이 그 예수라는 판단을 할 수가 없었다.

< 15절 >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마리아는 이런 예수의 육성을 듣고도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다. 동산지기인 줄 알고 예수의 시신이 있는 곳을 가르쳐 달라고 청원했다. 마리아는 이렇게 죽으신 예수를, 즉 그의 시신을 애타게 찾아 헤매는 것이었다.

< 16절 >

마리아야. 15절에서 예수가 `여자여'[귀나이]라고 했을 때는 13절에서 `여자여'하고 천사들이 부를 때처럼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러나 여기서 `마리아야' 하고 자기의 이름을 불렀을 때는 그 반응이 달랐다. 갈릴리의 미천한 여인인 자기를 이 새벽 예루살렘 무덤 가에서 이름을 알고 부를 사람이 누구겠는가. "마리아야" 하는 소리는 확실히 예수의 음성이었다. 그래서 마리아는 에수께로 돌아서서 "랍오니!" 하고 역시 익숙한 말로 불렀다. [라부니]는 아람어 [라부니]의 음역이고 아람어는 예수와 그 시대 유대인들의 상용어였다. 히브리 말로라고 한 것은 아람어를 그 당시 히브리인들이 통용했기 때문에 한 말이다. 마리아는 죽으신 예수가 자기 앞에 산채로 서 계시는 것에 대해서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고, 다만 반가와 "선생님"하고 부른 것이다. 그러면서 반사적으로 행한 행동은 그립던 예수에게 매달리는 일이었을 것이다.

< 17절 >

나를 만지지 말라 (me mou aptou)의 [앞투]는 [앞토]라는 동사의 현재 중간태 명령형으로서 `만진다', `다친다'라는 뜻도 있지만 `붙든다', `매달린다'는 뜻도 가지고 있으며,현재형 동사는 계속적인 동작을 의미할 수 있기 때문에 마리아가 예수를 붙들고 매달리고 있었던 것을 전제하는 것 같다. 그래서 예수는 마리아더러 "이렇게 붙들고만 있으면 어떻게 하느냐" 하고 타이르시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마 28:9의 기사대로 여인들이 예수의 발을 붙들고 그에게 경배를 드렸다는 것과 상통한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예수가 마리아더러 자기를 붙들고 있어서는 안된다고 한 이유를 밝혔다. 자기는 마땅히 아버지께로 오라가야 할 자인데, 아직은 올라가지 않은 상태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승천하시기까지의 제한된 시간 내에 부활의 주께서 하실 일이 많다. 기독교는 예수의 부활을 믿는 종교이기에 예수가 당신의 살아계심을 충분히 나타내는 일은 필요불가결의 일이다 (행1:3). 예수에게 있어서 아버지께로 올라가신다는 것은 그의 사명 완수를 의미하는 것이며 구속사업의 대 성취를 뜻하는 것이기에 사소한 인정에 매여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마리아는 죽은 예수의 시체를 찾다가 뜻밖에도 살아계시는 예수를 만나서 그를 오래 오래 붙들고 있고 싶지만, 예수는 그러지 말라고 명하신다. 아버지께로 올라가야 할 분으로서 아직 잠깐 세상에 남아있다는 식으로 말씀하신 것을 마리아는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생각이 어지럽고 어리둥절하고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예수의 육성은 계속 들린다.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마리아는 예수의 이 육성의 말씀을 문자대로는 알아들었지만 그 의미를 알지는 못했을 것이다. 예수가 세상에 오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인해서 이제 그 안에서 모두가 형제가 됐다. 예수의 아버지 곧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아버지가 되셨다. 하나님은 이제 예수의 하나님만 아니라 모두의 하나님이 되신다. 이렇게 만드는 것이 예수가 세상에 오셨던 목적이다. 사람들이 본래 하나님의 피조물이면서,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자녀이고 따라서 다 형제들이다. 그러나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이런 모든 관계가 끊어지고 망가져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모시지 않으며, 아버지로 섬기지 않으며, 이웃을 형제로 여기지 않는 상태로 전락되었다. 이러한 타락에서부터의 구출을 위해 오신 예수가 그 일을 성취하시는 사건이 바로 하나님아버지께로의 복귀이시다. 마리아는 아직 이런 심오한 진리를 알지 못했을 것이고, 단지 예수의 명령을 소중히 실천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제자들에게로 간 것 뿐이다.

< 18절 >

마리아는 제자들에게로 가서 내가 주를 보았다고 직접화법으로 보고했고 또 간접화법으로 `예수가 그녀에게 이런 말씀들을 했다'고 보고했다. 마리아가 아직 예수의 부활의 의미를 깨닫지는 못했지만, 누구보다도 먼저 마리아에게 부활의 주께서 자신을 나타내셨다는 것은 마리아에게 큰 영광이며, 천대받던 여성에게 그리고 예수를 가장 사모하는 자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은 당연한 처사라고도 여겨진다. 마리아는 부활 주에 대한 가장 첫 증인의 역할을 한 셈이다. 예수의 정체를 바로 알기 위해서는 성령의 조명이 필요하다는 입장에서 볼 때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의 주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는 것은 당연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만 마리아의 경험적 이해력과 차세적 판단력을 가지고, 그러면서도 남은 아직 체험하지 못한 부활 주의 현현을 경험한 특수한 입장에서 자신의 경험대로를 증언하는 것이었다. 20:22에서 예수가 성령을 주시는 사건 후에 비로서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는 고등한 고백이 나올 수 있었다면, 그 이전에 마리아가 진정한 예수 인식을 가졌을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어렵지 않겠는가.

Ⅳ. 사 역

1 한 주간 첫날 새벽 아직 어두울 때 막달라 마리아가 그 무덤으로 갔다. 그리고 그 돌이 무덤에서 이미 치워져 있는 것을 보았다.
2 그래서 그녀는 달음질하여 시몬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 곧 예수가 사랑하시던 제자에게로 가서 일렀다:"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치워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를 어디다 두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겠습니다."
3 그래서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가 그 무덤을 향해 갔다.
4 그 둘은 함께 달음박질을 하고 있었다. 그 다른 제자는 베드로를 앞질러서 달렸다. 그리고 먼저 무덤에 이르렀다.
5 그가 몸을 굽혀 들여다 보니 고운 삼베들이 널려 있었다. 그러나 무덤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6 그 때 시몬 베드로도 그 뒤를 따라왔다. 그리고 그는 무덤으로 들어갔다. 그는 고운 삼베들이 널려있는 것과
7 예수의 머리를 쌌던 수건이 고운 삼베들과 같이 놓여있지 않고 따로 한 곳에 개켜 있는 것을 보았다.
8 그 때에야 먼저 온 그 다른 제자도 무덤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9 아직도 사람들은 그(예수)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살아나야 한다는 성경말씀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10 제자들은 다시 자기들의 집으로 갔다.
11 그러나 마리아는 벌써부터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그녀는 울다가 무덤 안으로 몸을 기울였다.
12 그리고 두 천사가 흰 옷을 입고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 하나는 머리맡에 또 하나는 발치에, 곧 예수의 시신이 뉘어있던 곳에 있었다.
13 그 (천사)들이 그녀에게 "여자여, 어째서 울고 있소" 하고 물었다. 그녀는 대답하였다:"사람들이 내 주님을 가져가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를 어디에 두었는지 내가 알 수 없습니다."
14 그녀는 이런 말을 하고 나서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리고 예수가 이미 서 계시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분이 예수라는 것은 알지 못하고 있었다.
15 예수가 그녀에게 "여자여, 어째서 울고 있느냐 누구를 찾고 있느냐" 하고 물었다. 그녀는 그가 동산지기일 것이라 생각하고 청을 댔다. "어르신! 어르신께서 예수의 시신을 가져가셨다면, 어디에 그것을 두셨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그 시신을 모셔가겠습니다."
16 예수께서 "마리아야!"하고 그녀를 불렀다. 그녀는 돌아서서 히브리말로 "랍보니"하고 그를 불렀다. (랍보니는 "선생님이시여"라는 말이다.)
17 예수께서 그녀에게 말씀하셨다:"나를 붙들지 말아라. 나는 벌써 아버지께로 올라가 있어야 하는데 아직은 그러지 못하고 있다.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말하여라. 나는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벼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18 막달라 마리아는 가서 제자들에게 "나는 주님을 보았습니다" 하고 전했고 예수가 자기에게 이런 것을 말씀하셨다고 전하였다.

Ⅴ. 메 시 지

로고스이신 예수는 육신을 입고 아버지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셨다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다시 아버지께로 올라 가셨다. 요한복음에서는 이렇게 2원적 구조를 가지고 예수를 설명하고 있다. 신령하고 영원하고 높고 선한 위의 세계 즉 하나님의 세계와 그 대가 되는 역사세계, 현실세계로 나누어 볼 때, 예수는 위 세계에 속한 존재로 계시다가 하강하여 사람이 되셨다가, 세상 죄를 없시하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의 임부를 수행하신 다음, 다시금 아버지 하나님께로 상승하셨다는 것이다. 이렇게 아버지께로 다시 올라가는 사건이 바로 그의 부활 사건이다.

예수의 부활 사건은 결코 예수 자신의 하늘 복귀 사건에서 끝나는 사건이 아니다. 그는 이미 14장에서 약속하셨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14:2)라고. 그러므로 예수의 부활은 우리들의 하늘 이주(移住)의 전제이며 가능성이다. 17절이 밝히 말하는대로 예수의 부활로 인해서 이제는 우리는 그리스도와 형제 관계가 이루어졌으며, 하나님은 예수의 아버지만이 아니라 우리들 하나 하나의 아버지도 되신다. 하나님은 유대인의 하나님만 아니라 우리들 모든 믿는 자들의 하나님이 되신다. 결국 예수의 부활은 우리들의 부활을 위한 사건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수의 부활 사건은 신비스러운 초월적 사건이어서 사람의 어떤 지식이나 인식 작용을 가지고도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이다. 부활에 대한 4 복음서의 기사가 다 다르다는 사실은 그것이 사람의 지각 영역을 초월한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막달라 마리아는 열심히 예수를 따라다녔고 예수가 죽으신 후까지 계속 그를 추모하는 자였기에 부활의 주를 뵈올 수 있는 영광을 가졌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부활의 의미를 그 즉시 깨달은 것도 아니며, 그럴 능력도 없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들에게 성령을 주셔서 그 부활의 의미를 깨닫게 하심으로써만 깨닫는 것이다. 무덤 안에서 베드로는 깨닫지 못했는데 예수가 사랑하신 '그 다른 제자'는 빈 무덤만 보고도 부활을 믿은 이유가 무었일까 예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믿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다. 사랑하는 자들에게 믿음을 주시고 부활을 믿게 해 주시는 것이다.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를 비교해 볼만하다. 사도, 제자, 총회장, 노회장, 목사, 장로 등의 칭호가 문제되지 안는다. 베드로는 수제자요 그들 그룹에서는 이름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자격 때문에 예수를 남보다 먼저 또는 더 잘 알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 다른 제자는 무명의 제자였지만 예수의 부활을 베드로보다 먼저 믿었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 아닌가 우리는 때때로 먼저 믿었다든가 내 지위나 타이틀을 내세우기 일수다. 그러나 주님을 바로 알고 부활의 뜻을 바로 안다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막달라 마리아는 진실한 여자였고, 사심 없이 주님을 섬기고 십자가 앞에까지, 무덤에까지 따라온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결국 죽은 예수를 찾아 헤맸다. 우리들도 많은 경우 죽은 예수, 아니면 인간 예수를 흠모하고 그를 배우는데 끝이는 수가 있다. 우리는 부활의 주를 만나야 한다. 인간 예수도 가치가 있다. 공자나 맹자나 석가와 같은 가치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예수는 인간 이상이고 세상의 성현 이상이라는 사실을 잊기 쉽다. 세상의 성현들은 살다가 죽고 말았고 우리에게 도덕 교훈을 남겼을 뿐이다. 그러나 예수는 죽었다가 부활하셨고 인생의 도덕 교훈을 남겼을 뿐 아니라 그의 부활을 통하여 우리에게 영원한 삶을 주신 것이다. 인간 예수만 만나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반드시 부활의 주를 믿고 그를 만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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