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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성령님과 연애하던 기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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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저는 선교사가 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미국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저녁 무렵, 난생 처음으로 탄 비행기에서 서울시의 야경을 바라보며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저 불빛 속에 얼마나 많은 다툼, 고민, 슬픔이 있겠는가! 그러나 이렇게 높이 올라와 보니 그것도 아름답게 보이는구나!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 어떤 어려움을 만나도 아름다운 삶으로 승화시키는 인생이 되게 하옵소서!'
미국 유학생활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먼저 재정적인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주말에 교회에서 전도사로 사역하는 것만으로는 신학교 등록금과 생활비를 대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쮸쮸바 공장에서 일도 했었고, 잔디깎기, 제초작업, 그리고 세탁공장에서 와이셔츠를 다리기도 했었습니다. 와이셔츠 한벌 다리는데 0. 5달러를 받았는데, 돈을 더 벌기 위해 미친 사람처럼 와이셔츠를 다릴 때에는 하루에 200벌까지 다리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면 온 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더 큰 어려움은 그리움과 외로움이었습니다. 미국생활 초창기 1년 동안, 저는 정말 외로움을 많이 탔습니다. 그때 제가 전도사로 있었던 교회는 뉴욕의 플러싱 지역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가까운 곳에 공항이 있어서 비행기가 자주 다녔습니다. 주일 오후 피곤하고 지친 모습으로 공부하는 신학교로 돌아가면서 하늘의 비행기만 보면 우리 나라에 돌아오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습니다. '저 비행기만 타면 16시간이면 한국에 돌아갈 수 있는데. . . . ' 하늘의 비행기를 올려다보며 가끔 저는 마음속으로 눈물을 흘렸습니다. 소설 속의 주인공도 아닌데, 정말 외로움을 심하게 탔습니다.
왜 그렇게 외로움을 심하게 탔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때 성령님께서 저를 찾고 계셨던 것을 미국생활에 차츰 적응하던 시절이 되어서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정말 성령님과 연애하던 기간이었습니다. 얼마나 감격적으로 성령님과 깊은 교제를 했는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항상 계신 성령님은 우리가 외로울 때마다 그분의 존재를 더욱 뚜렷이 나타내시며 우리의 외로움을 달래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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