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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 (막 15: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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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있는 사람의 대화에서 금기로 삼는 몇 가지 주제가 있습니다. 예컨대 성. 죽음, 종교에 관한 것입니다. 1세기 로마 최고의 풍자 시인인 쥬버날의 글을보면 당시 상류사회에서 십자가란 말을 꺼내는 것을 금기로 삼았다고 합니다. 생각만해도 너무 끔찍하고 역겹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귀족출신 배우가 십자가형을 받은 한 강도가 못박혀 죽는 장면을 무언극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그장면을 본 쥬버날은 어찌나 혐오감이 들었던지. 귀족의 품위를 떨어뜨린 그배우를 실
제로 십자가에 아예 못박아 버리자는 글을 썹다고 합니다. 로마의 귀족사회에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에게도 사람을 나무에 달려죽게 하는 십자가형은 피가 거꾸로 치솟게하는 역겨운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신명기 21장 23절에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받은 자 란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중죄를 짓되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만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이 말했듯이, 십자가의 도가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헬라인에게는 어리석게 여겨지는 것입니다(고전 1:18-23).그리나 기억합시다. 하나님은 십자가라는 어리석고 사람들이 꺼려 하는 것을 통해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더 지혜로운 것입니다.
여러분은 구원받은 성도입니까 그렇다면 십자가에 못박히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구주로 믿기 때문입니다. 믿는다고 하면서 십자가의 예수를 만나지 못한 자는 사이비 교인이지. 참 그리스도인은 아닙니다. 세련된 로마의 귀족들처럼, 혹시 우리 가운데 기독교인이라고 하면서도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을 너무 끔찍하다고 우리의 관심에서 무의식적으로라도 빼어놓은 사람은 없습니까 혹시 우리가 세련된 기독교 문화만 즐기려는 종교향락주의자들은 아닙니까 십자가의 도를 전하라고 부름받은 하나님의 종들도 강단에서 십자가의 복음보다는 교양강좌를 행하고 있
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지금 사순절 기간을 맞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항상 예수님을 깊이 생
각하며 예수님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입니다(히3:1,12:2).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먼저 우리를 깊이 생각하시고 늘 바라보시는 사랑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으로 교제하는 사람들끼리는 서로 생각해주는 것 이상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한편에서는 항상 애틋하게 정을 주며 생각하는데, 다른 파트너는 까맞게 잊고 있다가 상대편이 연락을 줄 때만 마지못해 응한다면 그 교제가 깊어질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늘 예수님께 우리의 마음을 주어야 예수님과의 인격적 관계가 깊어지는 법입니다.

에수의 고민을 묵상하며
사순절 기간은 그리스도의 고난주간을 앞두고 더욱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는 영적 수련의 때요, 내면적인 축복의 기간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생각하되,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을 깊이 묵상합시다. 십자가의 고난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새롭게 해야합니다. 그 무궁한 사랑에 새로운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가 새롭게 되어 심령에 강물처럼 흘러나와야 하겠습니다.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은 너나없이 모두 물질의 풍요와 육신의 안일과 쾌락을 추구하다가 정신의 빈곤과 영혼의 기갈이 극심해지고 있습니다. 심지어 열심히 주님 섬긴다는 분들도 갖가지 교회프로그램과 봉사활동만 힘쓰다가 명상의 시간을 잊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생각하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특히 이 기간은 십자가의 예수. 그 멸시와 고통, 십자가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의 파라독스를 생각하는데 마음을 바치는 계절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머리는 커지지만, 가슴이 점점 메말라가는 현대인들 사이에서. 말들은 잘하지만 행동은 따르지 않는 형식적, 문화적인 그리스도인들의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그리스도인 다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서론이 결론같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고난을 기록한 본문 말씀을 한 마디 한 마디, 한 절 한 절을 예수님을 묵상하면서 읽지 않는다면 제가 지금 전하는 메시지가 모두 공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세우신 말씀의 종으로서 여러 성도들에게 간곡히 권면합니다. 사순절과 고난주간에 복음서를 일독하시기 바랍니다. 특히 우리 주님의 고난에 대한 기사를 읽을 때 성경을 걸상에 펴놓으시고 무릎을 끓고 기도하면서, 우리 주님께 대한 사랑을 가지고 읽어보십시오. 주님의 십자가에 고난에 대한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고마움을 가지고. 나같은 죄인을 위한 우리 주님의 사랑에 감격하면서 말씀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자. 다같이 본문 말씀 16-20 절을 다시 한번 읽어 봅시다. 예수님은 로마총독 빌라도의 법정에서 십자가형을 언도 받았습니다. 그러자 그동안 심심했던 군병들 전부대가 집합하여 예수님을 희롱하고 모욕하기 시작했습니다.

5.16쿠데타 이후 군인들의 서슬이 시퍼랬을 때 어느 분이 “군인은 사람이 아니다”는 글을 사상계에 실은 적이 있었습니다. 물론 자기 부하의 병을 고쳐달라고 예수님께 간청했던 로마의 백부장이나, 39 절에서 예수님의 운명모습을 지켜본 후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는 신앙고백을 한 백부장 같은 훌륭한 군인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남자들은 군복 입혀놓으면 이상해집니다. 사회에서 젊잖은 신사였던 분들이 예비군 훈련장에 가기만 하면, 온갖 비속한 언어와 망나니 같은 행동을 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군인 지배 30년에 우리 사회는 광주학살, 도덕적 타락의 정도가 얼마나 극심한지 김영삼 정부가 그 오물 치우기에 진땀을 빼고 있지 않습니까
본문에 등장하는 로마 군병들도 사람 같지 않은 잔혹한 모습입니다. 자기가 유대인의 왕이라고 했으니까 왕의 옷을 상징하는 자색옷을 구해다가 입혔습니다. 왕관을 나타내기 위해 가시 면류관을 엮어 이마에 가시가 박히게 콱콱 눌러 씌웠습니다. 유대인 왕. 만세 하고 인사하고 나서는 갈대로 예수의 머리를 치고 침을 뱉었습니다. 이렇게 한참을 희롱한 후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려고 끌고 갔습니다. 24절을 보면 후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다음에는 옷을 벗긴 후 제비를 뽑아서 누가 어느 부분을 차지할 것인가를 정하고 나누어 가졌습니다. 우리는 군인들이 어쩌면 이토록 타인의 고통에 무정한 냉혈족일까, 그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타인의 비통한 죽음을 비웃고 조롱할 수 있을까, 어떻게 피흘리며 절규하는 자들 앞에서 옷 하나를 차지하기 위해 카드놀이 할 수 있을 만큼 철면피들일까 하고 혀를 찰 것입니다.
그 러나 혹시 로마 군병들 속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이 보이지는 않습니까 지금도 형제의 고통에 무관심한 자, 생의 질고를 안고 울부짖는 자들이 있는데 한편에서는 온갖 좋은 것으로 배불리며 즐기는 자들-모두 로마 군병들의 이기적이고 쾌락을 즐기려는 모습과 무엇이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까 성경저자들은 십자가 주위의 인간상들을 어느 소설가들보다도 더 여실하게 짧은 몇줄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마치 레이저 광선이 모든 것을 뚫고 샅샅이 드러내듯이 갖가지 추한 인간의 죄약상을 발가벗기 듯 폭로하고 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인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의 위선. 시기(19:1,10)정치적 유익을 위해 진리 편에 못서고 무리를 만족시키고자 자기 이익 편에 선 총독 빌라도(15:15) 그리고 가롯 유다의 배신과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의 나약함과 비겁, 바로 닷새 전에는 호산나하며 환영했으나 여론 조작에 휩쓸려 저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저 라고 외친 기회주의적인 예루살렘 군중들의 영적 무지-문명은 발달해도 인간본성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십자가 앞에 추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예외 없이 죄인인 것입니다. 무릎꿇어야 할 사랑의 자리입니다.
이제 21-25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은 사형집행 장소인 골고다 언덕에 세운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1986 년 3월 21일 발행된 미국 의학협회의 저널에는 중대한 연구발표가 나왔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혔을 때의 고통이 어느 정도의 고통이었을까를 각 분야 최고 권위의 전문의들이 의학적으로 아주 자세하게 연구해서 발표한 것입니다. 전문 의사들의 조사 결과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죽음은 필설로 표현할 길이 없는 가장 극심한 고통 중의 고통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무리 잔인한 군병들도 십자가에 못박힌 자에게 몰약이라는 마취제가 섞인 신 포

도주를 갈대에 적셔 먹이는 것을 허용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고통을 느끼지 못했기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람으로서. 우리와 똑같은 혈육을 가지고 모든 고통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겪은 육체적 고통은 예수님뿐 아니라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다른 죄수들도 경험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고통은 더 깊은 차원에의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온 인류의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인류의 속죄제물로서, 사랑하는 아버지 하나님에게서 버림을 받으시기까지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는 어떤 사변적 논리가 필요없습니다. 예수의 십자가는 토론의 마당이 아닙니다. 우리의 온 영혼. 우리의 생명전체를 쏟아 부으며 무릎을 끓어야 할 사랑의 자리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새롭게 믿음의 자리매김을 해야 합니다.
26-32 절을 읽읍시다. 죄 없으신 예수께서 좌우의 강도들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시자. 지나가던 자들이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비꼬는말 속에 아이러니컬 하게도 그리스도의 구원의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31절하반절).
하나님의 메시야, 곧 그리스도는 반드시 남을 구원하기 위해 자기가 죽어야 했습니다. 그것은 창세 전부터 세우신 하나님의 인류 구속의 변경할 수 없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고 신앙고백하자마자 그리스도는 고난받고 죽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날 것을 명백히 가르치셨습니다(8:31).
또한 마가복음의 전체 요절인 10장 45절에서 제자들에게 선언하셨습니다. 인자의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인류의 메시야는 인류의 근본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실력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라고 주장만 한다고 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이루어서 그 증거를 만천하에 보여 주어야만 합니다. 인류의 근본문제가 무엇입니까 세상의 지혜롭다고 하는 자들은 어려운 말로 이것저것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딱 잘라서 선언합니다. 인류의 근본문제는 창조주 하나님을 반역한 죄문제요. 죄의 삯으로 받는 죽음문제라고. 예수는 군병같고 빌라도같은, 그리고 대제사장과 무리들 같은, 아니 유다같고 베드로같은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대신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바치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 저주받은 세상에서. 창세기 3장18절에 나오듯 가사덤불을 헤치듯 상처많고 아픔많은 인생을 살 수밖에 없는 운명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그 가시로 엮은 면류관을 대신 쓰고 피흘리심으로써 우리의 저주를 대신 담당하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갈3:13).
주님의 십자가를 좌우에 둔 두 강도는 서로 주님을 대하는 태도가 달랐습니다. 한사람은 끝까지 예수를 비방하며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강도는 십자가의 예수님을 믿어 낙원에 들어가는 제1호의 특권을 누렸습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눅 23:43). 주님의 십자가를 대하는 태도에 따라 그들의 영원한 운명이 결정되고만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을 묵상하는 뜻깊은 계절을 맞아,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구원의 길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미 구원을 확신하는 분들에게는 그 구원의 감격올 새롭게 하시길 원하십니다. 구원의 문은 활짝 열려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과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둘째로. 사랑과 평화의 왕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저와 여러분의 죄를 위해 그 몸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음을 믿음으로 영접해야 합니다. 머리로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셋째로.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랑에 감사하며 고난에 동참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베드로가 고난을 회피하여 예수를 멀찍이 따른 결과는 심한 통곡뿐이었습니다(14:54,72). 그러

나 후에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고난의 의미를 깨닫고 그 고난을 짊어지고 주님을 따르자. 그는 사도행전의 능력적 역사를 이루는 부활의증인이 되었습니다. 심한 통곡이 아니라, 기쁨에 넘치는 사도적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있게 믿는 자에게 권면 했습니다.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벧전4:13). 소극적 피동적인 고난이 아니라 적극적 능동적으로 고난에 참여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오히려 힘있고 행복한 예술적 인생의 파라독스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1995년의 고난주간과 부활절에는 십자가의 예수를 바라보며 우리모두가 부활의 전제인 고난과 죽음의 의미를 온 몸으로 깨닫는 축복의 계절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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