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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과 영생 (요 05: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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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부활주일이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 다신 이 날은 세계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언제나 소망이 넘치는 날이다. 예수님이 무덤에서 부활하신 이날은 안식후 첫날로써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주일이라 부른다. 주일은 곧 부활의 감격을 가진 날이다.

1929년 북경대학에서 행한 강연에서 데야르 샤르뎅은 '기독교가 불교와 같이 해탈을 설교하고 금욕을 말하지만 기독교에서는 금욕이나 해탈보다 더 깊은 경탄을 이 땅 위에서의 부활에서 얻는다.'고 말하였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말 하였다.

신학자 보른캄은 '무엇보다 확실한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소식을 제거하면 신약성서의 복음서도, 바울의 편지들도, 오늘의 교회와 예배, 심지어 우리의 기도까지도 무용하다.'고 말하였다. 현대인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하여 꾸며낸 연극이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위대한 과학자요 사상가인 파스칼은 '만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사람들이 꾸며낸 연극이라면 그 조작극을 위해 꾸며낸 사람들 스스로가 목숨을 바쳐가면서 복음을 전할 수 있었을까 한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많은 사람은 속일 수 없다. 잠시 잠간은 속일 수 있어도 영원히 속일 수는 없다.' 고 말하였다. 독일의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은 '그리스도교는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다는 사실에서 일어서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한다.'는 말을 하였다. 다시 말해서 기독교 신앙의 근거가 부활에 있다는 말이다.

부활 주일을 맞이한 성도 여러분!
우리들의 신앙의 근거는 무엇인가 우리 주님의 부활신앙에 근거한 것인가 아니면 다른 세속적인 무엇에 있는가 냉정하게 생각해 보도록 하자.

이 세상에는 비슷해 보이지만 서로 다른 것이 여러가지 있다. 다이아몬드와 큐빅-비슷하게 생겨서 얼른 구별하기 어렵다. 이 둘의 가격 차이는 엄청나다. 알곡과 가라지-이것도 비슷하지만 추수 때가 되면 분리된다. 알곡은 창고에 들어가지만 가라지는 모아서 불에 살라진다. 양과 염소 이 둘도 비슷하다. 예수님은 양과 염소의 이야기에서 심판 때가 되면 양은 오른 편에 염소는 왼편에 갈라서게 된다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가진 신앙생활에 대하여 사람들은 아무 종교나 다같은 것으로 말하지만 그렇지 않다. 생명이 있는 종교와 생명이 없는 종교로 구별된다. 겉은 같지만 전혀 다른 것들도 있다. 이것은 본질과 속성이 다른 경우를 말한다. 용도도 같고 모양도 같고 이름도 같은 승합 자동차이지만 그 차가 공해를 방출하느냐 않느냐에 따라서 '환경개선 부담금을' 내기도 하고 안내기도 한다.

우리 인생들은 같은 모양을 가지고 같은 생활 습성을 가지고 살고 있다.
자고 깨며, 공부하며 일하고, 사랑하며 수고하며 그리고 종당에는 죽음의 길로 들어 선다. 이러한 인생에 대하여 잠언기자는 말하기를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잠 16:25) 하였다.

모양이 같은 차라고 해서 모두 같은 방향으로 가지 않는다. 두 사람이 함께 잠을 자다가 한 사람은 불려가고 한 사람은 버림받을 때가 온다. 두 사람이 함께 맷돌 갈다가 한 사람은 영광 중에 들려 가고 한 사람은 버림을 받게 될 터인데 그날에 나는 어떠한 사람이 될 것인가 이것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하겠다.

바울은 고후 13:5에서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하였다.

1.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
인류 최초의 죽음을 맛본 사람은 아벨이었다. 그는 아무 죄도 없었으나 그를 죽인 가인은 마음에 크게 분냄으로 아벨을 죽이고 말았다. 가인은 처음으로 힘을 사용하여 세상을 정복하려 했던 인물이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정복자는 누구인가 시이저인가 나폴레온인가 진시황인가 역발산인가

그들은 모두 한 시대를 살다가 갔다. 그러나 아담의 시대부터 지금까지 모든 시대를 정복한 이가 있다. 저들은 한 지역이나 나라를 정복할 뿐이었으나 이 정복자는 모든 도시 모든 나라를 정복하였다. 예수님의 시대에 헤롯왕은 두살 이하의 모든 어린 아이를 죽였으나 이 정복자는 나이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을 죽였다. 징기스칸은 500만을 죽였고 히틀러는 600만의 유대인을 죽였지만 이 정복자는 지금까지 수십억의 사람들을 죽였다.

이 정복자는 누구인가 죽음이다. 죽음 앞에서 애굽왕 바로가 무릎을 꿇었다. 죽음 앞에서, 아론도 입을 다물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도 죽음 앞에서 그의 지팡이를 여호수아에게 물려 주었다. 죽은지 나흘 되었던 나사로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나 나인성 과부의 아들이라도 또 다시 죽음에게 정복을 당하고 말았다. 인류 역사상 죽음에게 정복되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에녹과 엘리야 그리고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 뿐이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다.(히 9:27) 바울 사도는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고 선언하였다.(롬 5:12) 그런데 이 죽음에 두가지 죽음이 있다. 하나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죽음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 밖에서의 죽음이다. 죽은 사람을 매장하고 화장하는 것으로 구별하는 것이 아니다. 얼마나 넓은 평수의 땅을 가지고 누웠는가로 구별하는 것도 아니다. 장례식을 목사가 했느냐 아니냐가 문제 아니다. 그 사람이 그리스도를 알고 죽었는가 모르고 죽었는가가 문제이다. 하나님은 성도의 죽음을 귀중히 보시는 분이시다. (시 116:13) 사도 요한은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이 복이 있다고 기록하였다. (계 14:13) 이제 그들은 세상의 모든 수고를 그치고 쉬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무덤에 들어가 있는 나사로를 향하여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라고 말씀하셨다. 나인성 과부의 아들에게도 '청년아 일어나라!' 고 죽은 자를 마치 잠 자는 자 깨우듯 말씀 하셨다. 훗날에 우리 주님 오셔서 잠 자는 자여 일어나라 하실 때 우리 모두 일어나 그의 나라에 들어가는 기쁨을 함께 누리자!

2. 죽은 사람은 누구나 부활한다.
죽은 사람의 부활에 대하여 사도 요한은 본문 29절에 기록하기를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기록하였다. 그러므로 부활은 예수 안에서 죽은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무덤 속에 있는 자들은 누구나 그의 음성을 들을 날이 온다. 그날에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만 살아 나는 것이 아니다. 무덤에 있는 자는 누구나 다 그의 음성을 듣게 된다. 나이들어 죽은 자나 어린 자나 비천했던 자나 부요했던 자나 세도 부렸던 자나 힘 없던 낭인이나 화장으로 산하에 가루로 흩날렸던 자나 집채만한 무덤 속에 누웠던 자나 누구나 다 그 분의 음성을 들을 날이 온다.

죽은 사람이 음성을 듣는다는 것에 대하여 이해가 되지 않는 분은 나사로를 생각하라. 야이로의 딸을 생각하라. 나사로야 나오라 하매 나사로가 온 몸을 베로 동인채 걸어 나왔다. 죽어 누웠던 딸이 일어났다. 이것은 앞으로 일어날 부활의 그림자이다. 예표이다. 누구라서 그의 음성을 거역하고 무덤에 머물러 있을 것인가 그러나 그날 그의 음성을 듣고 일어날 때 같은 부활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부활의 시기가 다르고 부활의 성격도 다르다.

우리 주님이 호령과 천사장의 나팔소리로 친히 강림하실 때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난다.'고 살전 4:16에 기록하고 있다. 이것을 우리는 첫째 부활이라고 말한다. 그날에 선한 일을 행한 자들은 생명의 부활로 나올 것이다. 그러나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는 것이다.

성도 여러분 !
저는 여러분들이 모두 다 생명의 부활로 다시 살아날 것을 믿는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은 '선한 일을 행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선한 일이란 무엇인가 어떤 이들은 이 말로 우리의 구원이 믿음에 있지않고 행함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이 선악의 표준은 인간의 표준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기준에서 선이다. 하나님의 선은 인간의 외식으로 평가되지 않는다. 부자의 많은 헌금보다 과부의 엽전 두 렙돈을 더 기뻐하셨다. 바리새인의 기도보다 가슴치며 기도한 세리를 더 옳게 여기신 분이시다.
여러분들이 비록 많은 허물과 죄로 죽었다 하여도 첫째 부활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여러분이 행한 선행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때문이다.

3. 부활한 사람은 영생이 주어진다.
영생은 무엇인가 영생은 헬라어로 αιωνιοσ ξωη라고 한다. 영원한 생명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러한 생명이 첫째 부활에 참여한 사람만이 누리는 것은 아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채로 영원히 산다. 다니엘은 말하기를 땅의 티끌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라 기록 하였다.(단 12:2)

무궁한 부끄러움이란 무엇일까
악인이나 선인이나 의인이나 죄인이나 모두 다 영원히 사는 것은 같다. 그러나 영생의 성격은 너무 너무 다르다. 영원한 즐거움, 영원한 기쁨에 비교하여 볼 때 영원한 부끄러움, 영원한 형벌 영원한 심판을 어떻게 영생이라고 하는 단어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아들을 모르는 자에게 영생을 보지 못한다는 표현이 이제 비로소 설명이 될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영생을 말할 때 죽지 않고 영원토록 사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영생은 무엇인가 사도 요한은 말하기를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라고 기록하였다.(요17:3)

요한복음 15장에서 우리는 포도나무 이야기를 읽게 된다. 예수님 말씀 하시기를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하셨다. 우리는 포도나무이신 예수님에 붙어있는 가지이다. 가지가 줄기에 붙어 있어야 하는 것 처럼 우리는 예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만일 가지가 포도나무에서 분리되면 그 가지는 말라버린다. 사람들은 그것을 줏어다가 불에 던져 불사를 것이다.

영생은 무엇인가 영생은 그리스도 안에 연결되어 있는 순간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생을 단순히 사후의 세계에 주어지는 것으로만 생각하지 말자. 우리 예수님이 말씀 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하셨다.
'영생을 얻었고'라는 말의 '얻었고'는 헬라어 εχει로 현재형이다. 지금 계속되고 있다는 뜻이다. 주님의 음성 곧 복음을 들으며 주님과 또 주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믿는 자라면 그는 이미 영생을 얻었다는 선언이다.

어제 저는 국민학교를 지나다가 목련이 활짝 핀 것을 처음 보았다. 아직은 죽은 것같은 나뭇가지에 올라앉은 목련화를 보면서 저는 이런 생각을 하였다. 겉으로 볼 때 죽은 것 같은 나무가 저 꽃 한송이로 인하여 추운 겨울을 지나면서도 죽지않고 살아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는구나 !

저는 여기에서 다시 한번 바울의 교훈을 여러분에게 전한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후 13:5)

뿌리없는 가지라도 꽃을 보이며 살아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잠깐이다. 시간이 가면 꽃은 떨어지고 가지도 말라 버릴 것이다. 교회에 다니기는 하여도 예수와 관계없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주시는 영생을 소유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비록 부활절이 되어도 부활의 감격을 나타낼 수가 없다. 부활을 말하고 부활의 찬송을 할지라도 부활의 사실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가 비록 살아 있어도 죽은 사람이다. 당신이 아무리 부와 권력과 명예를 가지고 산다 하여도 그리스도를 떠나 있다면 죽은 사람에 불과하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여러분은 이미 영생을 소유한 사람이다.

예수는 스스로 자신을 가리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 말씀하셨다. 스스로를 가리켜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 하셨다. 죽음은 예고없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이 죽음 뒤에 오는 부활과 영생에 대하여 어떠한 믿음을 가졌는지 깊이 생각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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