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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빈 집의 참상 (눅 11: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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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한 벙어리 귀신 들린자에게, 벙어리 귀신을 쫓아 내신 일로, 그 벙어리가 말을 하게 된 이적을 나타내었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세가지 반응이 일어났습니다.
그 중에 하나의 무리는 기이히 여겼습니다(11:14). 또 한 무리는 예수께서 귀신의 왕 바아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쫒아 내었다고 하였습니다(11:15). 또 세번째 무리는 예수님을 시험하여 하늘로서 온 표적을 요구하였습니다(11:16).
여기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확실하고 단호하였습니다. 먼저 통일된 하나의 조직체 내에서 분열하는 것은 스스로의 파멸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만약에 바알세불은 귀신의 왕인데 귀신의 왕이 그의 졸병인 귀신을 쫓아내면 스스로 파멸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라고 답하였습니다.
그것은 사단이 자기끼리 분쟁하는 일이라고 하였습니다(11:17-18). 사단은 결코 자기들끼리 분쟁하지 않는 다고 하였습니다.
두번째 대답입니다. 유대인 중에서는 주술 행위로써 귀신을 쫓아내는 이른바 귀신을 쫓아내는 축사(逐邪) 행위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너희들이 행한다고 하는 축사 행위도 바알세불을 힘입은 것인가 아니라고 하면 자기들의 축사행위는 인정하면서 왜 예수님의 능력의 역사는 인정하지 못하는가 하는 답변이 됩니다. 만약에 너희들(바리새인) 중에 축사행위를 하는 자들에게 저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 입어 귀신을 쫒아 내었다고 하면, 그 축사행위자들이 너희 자신들을 재판하고 말 것이 아닌가 라고 응수했습니다(11:19).
이 말씀으로 답변을 하신 후에 예수 자신은 하나님의 능력으로(11:20), 귀신의 왕 바알세불이나, 그의 졸병들인 귀신보다 더 강한자로 오셔서 귀신에게 매여 말하는 자유를 놓쳐버린 그 사람을 고쳐주었다고 주장하였습니다(11:20-22).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중대한 교훈은 벙어리 귀신 나간 사람이 그 후에 만난 참상을 알려 줌에 있습니다.
주님의 명령을 받고 그 사람에게서 쫒겨나버린 귀신이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면서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다가, 다시 내가 쫒겨 나온 집으로 되돌아 가보자고 생각했습니다. 다시 돌아와 보니 그 집이 ‘소제’ 되어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귀신이 거처하기에 적합하도록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또 ‘수리되어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장식되어 있었다’는 말로 신이 거처하기에 적합하도록 꾸며져 있다는 말입니다. 말하자면 아무도 없는 텅비어 있는 집이었다는 말입니다.
이 때 그 귀신은 너무 좋아 가서 저 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와서 함께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었다고 하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오늘에 주어진 이러한 본문에서 몇가지 중대한 교훈을 받아야 합니다.

Ⅰ. 귀신의 실존과 그 사역은 사람을 불행하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이 본문에서 사용된 귀신(11:14), 귀신의 왕 바알세불(11:15), 더러운 귀신(11:24)은 또 다른 말로 사단(11:18)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마귀의 이름을 여러 가지로 다르게 표현하나, 동일한 인격적 실체로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고 있다고 가르칩니다.
예컨대, 고소자(계12:10) = 시험하는 자(마4:3) = 악한 자(엡6:16) = 바알세불(마12:27) = 벨리알(고후6:15) = 악귀의 머리(막3:22) = 이 세상의 왕(요14:30) = 공중의 권세 잡은 자(엡2:2) = 어둠의 권세자(엡6:12) = 용(계12:3) = 옛 뱀(계12:9) = 큰 용(계12:9) = 마귀 = 사단(계12:9, 눅11:18) = 큰 붉은 용(계12:3)등 다양한 이름들은 동일한 마귀의 속성과 역사(役事)를 표현하는 말입니다.
중대한 말씀은 사단(귀신)은 실존하는 인격적 존재로, 전 성경에 인간을 불행으로 이끄는 무서운 존재입니다.
우리 본문에도 사람에게 말을 못하도록 벙어리를 만들어 버린 더러운 귀신이라고 하였습니다(11:14, 24). 나중에 다시 이사람에게 되돌아 올 때는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더 데리고 와서 그 사람을 더 비참하게 만들어 버렸다고 하였습니다(11:26). 이렇게 마귀 곧 악령은 실존하는 인격적 존재로 인간을 불행케 만드는 세력입니다. 그를 가리켜 공중권세 잡은 자라고 말하고 있을 정도입니다(엡2:2).

Ⅱ. 빈 집의 참상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우리 본문 11장 25절에 와 보니 그 집이 소제 되고 수리 되었거늘...라고 하였습니다.
이 사람에게 귀신이 쫒겨 나갔을 때 그는 말을 하였다고 하였습니다(11:14). 그러나 그가 주님을 영접했다거나,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거나, 주를 향하여 신앙고백을 했다는 말이 전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의 현재 상태는,

1. 영적 중립 상태였다는 말입니다.
말하자면 마음(집)의 주인이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텅 비어있는 집과 같았습니다. 수리되고 소제되어 있는 빈 집과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일시적으로 귀신이 나갔다는 것으로 다 된것은 아님을 보여줍니다. 귀신이 나간 다음에도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으면 그 마음은 영적으로 중립상태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 상태는 언제든지 귀신이 다시 들어와 이전 보다 더 악하고 불행한 지경으로 빠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오히려 이 영적 중립상태는 그 자체의 잔존한 육성 때문에 사단의 재침입을 초래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악한 생각과 습관, 그리고 낡은 방법을 추방하여 영혼을 깨끗하게 비워둔다고 해서 선인이 되고, 성자가 됨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원래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텅빈 집과 같게 창조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 자리에 하나님 자신이 거하는 장소로 만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래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을 모시는 인격의 지성소였고, 성전이었습니다.

2. 영적 중립 상태는 비참한 결과를 맞이한다는 교훈입니다.
주인없는 빈 집은 국가로 말하면 무정부상태를 연상하게 합니다. 우리 본문은 말하기를 저가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니라(11:26)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비어있는 사람의 마음(집)은 결코 따뜻하거나, 행복한 집은 아닙니다. 주인 없이 비어있는 집은 쓸쓸합니다. 집은 집인데 사람이 살지 않고 있는 집에는 온갖 무서운 강도의 굴혈이 될 수가 있고, 온갖 무서운 맹수들의 거처가 될수 있고, 온갖 더러운 곤충들과 벌레들의 서식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와서, 아예 그 사람의 마음(집)에 자리를 잡고, 그 인생을 주장하고 말았으니, 그 참상을 문자 그대로 사망의 음침함 뿐이었습니다. 입사귀만 무성한 무화과는 비록 썩은 과실을 맺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 나무는 분명히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마21:19).
주인이 맡긴 은을 수건으로 싸두기만 한 사람은 결국 악하고 게으른 종이되어 주님의 원수가 되고 말았습니다(눅17:22, 23). 이것이 바로 빈 집의 참상입니다.

Ⅲ. 최선의 행복은 주를 영접하고, 선한 일을 행함에 있는 것입니다.

그에게 벙어리 귀신을 쫒겨 나갔을 때 그는 처음부터 “주여 내가 믿나이다. 주여 감사합니다”라고 주를 영접하고, 주를 고백해야 옳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리에 있지 말고, 주님과 함께 행동을 했어야 옳았을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에 귀신이 나가면, 주님을 영접하여 주인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리고 새 주인 예수에게 소속해야 합니다. 그리고 새 주인에게 새 일을 해야 합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옛 남편인 율법이 죽었을 때, 새 남편 그리스도를 맞이하고 그에게 소속되고, 그를 따르고, 그를 즐겨야 한다고 하였습니다(롬7:1-3).
주님이 우리에게 귀신을 쫒아 주셨을 때 우리는 주님을 영접하고, 주님을 나의 왕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그리고 새 왕을 섬기는 새 신민의 의무로 가득차야 합니다.
아름다운 정원이 무엇입니까 아름다운 정원이란 아름다운 식물들과 꽃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곳입니다. 거기에는 결코 다른 잡초가 자리를 잡을 수가 없습니다. 잡초를 뽑아내어야 할 정도라면, 그것은 정원은 될수 없고, 아니 아름다운 정원은 더욱 될 수가 없습니다. 아름다운 정원에도 잡초가 자랄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어야 합니다. 계속해서 아름다운 꽃씨를 심고 아름다운 식물들을 재배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속에 예수를 주로 받아, 구원에 이르면 결코 제자리 걸음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 이후부터 우리들의 마음은 주(主)로 충만해저 버립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새롭게 일어나는 성화의 삶입니다. 말하자면 신령한 영적활동의 왕성입니다.
바로 이것이 초대 오순절 교회가 보여 준 새 생명의 표적이었습니다. 저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저들의 마음(집)이 예수로 가득차 버렸을 때 ① 예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행2:3), ② 사도의 가르침을 받고(행2:42), ③ 서로 교제하며(2:42), ④ 떡을 떼며(행2:42), ⑤ 기도하기에 전혀 힘쓰고(행2:42), ⑥ 믿는 사람이 다 함께 모이고(행2:44), ⑦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행2:44),⑧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행2:26), ⑨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행2:47).
저들은 마침내 예수살렘을 불질러 버렸고, 유다로, 사마리아로 뻗어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불길이 안디옥으로, 로마로, 마침내 세계로 뻗어가고 말았습니다. 마침내 이 지구라고 하는 집을 복음으로 가득 채우고 말았습니다. 마침내 예수 복음 운동은 역사의 동맥이 되어, 하나님이 계획하신 구속사의 강물이 흐르게 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보통 ‘빈마음’을 가지라고 합니다. 이 말은 명예욕이나, 물욕이나, 다른 어떤 탐욕들을 가지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마음을 닦고 마음을 비운다고 합니다. 알고보면 참으로 어리석은 말입니다.
빈 마음! 공허한 마음! 그것은 실로 아무것도 아닙니다. 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빈 집, 빈 마음! 그것은 허수아비 인생입니다. 아무런 내용이 없습니다. 그야말로 진공상태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마음은 빈 마음이 아니라 새마음이요, 새 주인을 모신 마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악한 귀신이 되돌아 올 여유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마음은 항상 주의 일로 가득차 있습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우리 삶 자체가, 그리스도를 기쁘게 할 목적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러므로 더 악한 귀신이 되돌아 오거나, 자리를 잡게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기로 되어 있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입니다. 그래서 더러운 귀신이 용납될 시간과 장소가 없습니다(롬14:6-8).
그리스도인의 몸은 값으로 산 성전이기 때문에 육탄으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고전6:19-20).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이란 목적으로 우리의 마음이 가득차 버렸기 때문에(고전10:31), 감히 더러운 귀신이 떼를 지어 자리를 잡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만약에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만 가지고, 마귀의 일도 안하고, 그렇다고 주의 일도 안한다면, 그 사람의 영은 중립상태에 머무는 텅 빈집의 위험 속에 들게 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가정이라고 하는 어떤 전통때문에, 우상숭배나, 제사를 안 지내고, 그렇다고 주님께 헌신도 안한다면, 그 가정의 영은 중립상태의 위험속에 들게 됩니다.
결코 우리는 가만히 있어서는 안됩니다.
주의 일을 해야 합니다.
주의 일로 우리의 마음이 가득차 버려야 됩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의 나중 형편이 처음 형편보다 더 진보하고, 더 나아지고, 더 행복해지고, 더 충만해 지기를 축원합니다.
빈집의 참상이 아니라, 가득찬 집의 축복이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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