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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생명의 역설적 법칙 (요 12: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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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한 후 며칠 동안 지상에서의 그의 활동중의 마지막 가르침 중 일부입니다. 마침 헬라 사람들이 예수님을 뵙겠다고 왔을때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들 헬라인들 역시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을 것이라고 보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처음 만난 사람들에게 이런 중요한 교훈을 주셨을 리 없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인자가 영광을 받을때가 되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기까지 그 목숨을 보전할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높이실 것이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세가지를 말씀하시고 계십니다.첫째는 생명의 역설적 법칙이라는 것에 관하여 말씀하십니다. 살겠다고 발버둥치는 것은 곧 죽는 길이고 죽는 것도 불사하고 목숨을 초개같이 버리는 것은 오히려 사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이 역설 법칙을 한 알의 밀알에 비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이제 곧 죽게 될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의미없는 죽엄이나 헛된 죽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을 살리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셋째로 제자들의 도리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는 제자들은 예수님 자신처럼 죽음의 길을 가야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우선 여기서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되었다"라는 말은 물론 예수님 자신이 죽을때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죽음을 그가 "영광을 받는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 어리둥절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이 말씀을 처음 들었던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러했을 것입니다. '죽는것이 어떻게 영광스럽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들어와 계십니다. 그는 이곳에 오시기 전에 이미 그의 죽음을 예고하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만, 이때 다시 분명히 그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자신이 이제 죽을때가 왔다는 말도 그렇지만 이 죽음으로 예수님의 영광을 받는 것으로 말씀한 점이 주목됩니다. 죽음은 인간이 가장 두려워 하고 싫어하고 생각조차 하기 싫은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피치 못할 운명이라고 할수 있습니다만 예수님은 단순히 나이많아 죽는 그러한 죽음, 자연사 같은 죽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젊은 분이 죽게 된다고 할 때 더욱 예사롭지 않는 것입니다. 오래 살고 여한이 없는 죽음이라고 할지라도 죽음은 저주로 생각할지언정 영광으로 생각할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을 영광이라고 말하고 있습다.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까 죽음을 미화하려는 것입니까 죽음의 처절한 현실을 감추려고 하거나 부인하려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죽음을 싫어 하셨습니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 번민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죽음이 특별한 의미가 있고 효력이 있고 그것이 그가 이 세상에 오신 사명과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을 아는 순간 그는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며 그 죽음의 잔을 받아 마시게 되었습니다. 그는 죽음을 영광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교회 출신으로 매우 자랑스러운 민주화의 영웅적 투사 김병곤 선생이 있습니다. 그는 군가정권시절에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구속되어 재판을 받는 중에 사형 구형을 받게 되었습니다. '사형'이란 그 무서운 구형이 떨어져 숙연해 지는 순간에 그는 '영광입니다'라고 그 검사의 구형에 답했습니다. 이 말로 검사의 가슴에 서늘하게 하였고 방청하는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크게 감동을 주었던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영광스럽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었이겠습니까 세가지 뜻에서 예수님은 그의 죽음이 영광스러운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다고 봅니다. 첫째는 그것이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죽음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여 이 세상에 왔고 살고 활동하였지 자기 스스로 어떤 일을 한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뜻을 이 세상에 드러내고 실천하는 것은 그의 생의 목적으로 삼았는데 이제 그것이 절정으로 죽음이 오게 된것입니다. 둘째로 그의 죽음이 그가 이 세상에 와서 이루려던 근본적인 목적을 달성하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그는 그러한 죽음을 죽기 위해 온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째로 그의 죽음이 영광스럽다는 것은 무었입니까 그것은 그 죽음이 다른 사람들을 살리는 죽음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이 그가 이 세상에 온 궁극적인 목적이었습니다.

그 다음으로 그의 죽음은 대속적인 죽음이었기 때문에 그는 영광스럽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단순히 한 개인의 죽음으로 끝나는 단순한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여러 죽음 가운데 한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결정적인 죽음이었습니다. 그 죽음으로 인간의 죽음의 두려움을 없이하는 죽음이고 그 죽음이 죽음으로 죽어 갈 사람들을 죽음에서 살려내는 그런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죽음은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한 죽음이고 이러한 뜻에서 대속적, 구속적 죽음이었습니다. 그의 죽음이 영광이 되는 이유는 바로 그의 죽음을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죽음이고, 이것이 다른 사람들을 살리는 죽음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죽음의 효과를 밀알 한알의 죽음의 효과에 비유한 것입니다. 밀알 하나가 땅속에 들어가서 죽는다, 그런데 이렇게 땅속에 떨어져 죽고 썩는 것으로 끝나는게 아니고 이때 새로히 싹을 내고 자라서 수많은 밀알을 열매맺습니다. 그의 죽음이 바로 이러한 의미와 효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땅속에 떨어져서 썩어 죽는 일은 자기 생명을 미워 하지 않고는 할수 없는 일이라고 보았습니다. 밀알 하나가 자기 생명을 사랑한다 하여 죽기를 거부하면 한알 그대로 있을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것이냐고 말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대로 말하여 죽기로 자처하는 것은 생명을 '미워하는' 것일 테고, 죽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사랑하는'것일 테지만, 정말 어느 것이 생명을 사랑하는 것이고 어느것이 생명을 미워하는 것이냐고, 오히려 그 거꾸로가 아니냐고 도전하시는 것입니다.

이 밀알의 비유 끝에 그는 결론적으로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생명에 이르기까지 그 목숨을 보전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생명의 역설적인 법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역설적이라고 하는 것은 생명을 사랑하느라고 죽기를 거부하면 죽을것이고 생명을 버리는 것도 불사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죽는길은 사는길이다는 것이라고 말씀하기 때문에 이것은 역설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은 다른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하신 제자들에게 유명한 말씀과 평행하는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자기 목숨을 구원하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어버리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못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겟느냐 또 사람이 무엇으로 자기 목숨을 바꾸겠는냐"(마태 16:24-26)

여기서 예수님의 생명의 역설적 법칙이 더욱 분명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 목숨을 구원하려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목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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