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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서로 용서합시다 (엡 0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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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천국에 들어가면 영화 한 편을 보게 될 것 같습니다. 무슨 영화인고 하니 한 사람의 일생을 파노라마로 구성한 기록 영화입니다. 한 사람이 어 떻게 살았는지를 보여 주는데, 알려진 사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모르 고 있 던 삶의 모든 영역들, 이를테면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고 또 무슨 동 기로 그런 행동을 했고 그 결과가 어찌 되었는지가 화면에 다 나 타날지 모 릅니다. 제 생각이 지나친 상상이 아니라는 성경적 근거가 있 습니다. 누가 복음 12 장 2, 3 절을 보십시오.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 을 것이 없나니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 명한 데서 들 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집 위에 서 전파되리라.

이렇게 필름을 보다가 내 일생을 볼 차례가 돌아오면 다른 사람의 일생을 보듯 그렇게 팔짱 끼고 구경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은 어떤 자세로 앉아 있 을 것 같습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앉아 있기나 할 수 있을 것 같습니 까 주 님이 당신의 일생을 공개하실 때 당신은 떳떳하게 있을 수 있습니 까 그때 우리의 관심은 오직 한 가지에 쏠려 있을 것 같습니다. 아마 우 리는 어떻 게 하면 저 필름을 없애 버릴까 어떻게 하면 주님이 내 과 오를 모르고 지 나가시게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할 것입니다.

스탈린이 소련을 장악한 후 서둘러 해결한 일 가운데 하나가 어렸을 때 친 구들을 다 죽인 일이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자신의 과거를 알고 있는 친구 들이 있다는 사실이 못 견디게 그의 마음을 괴롭혔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애를 숨김 없이 보여 주는 필름이 있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 필름 을 재미있게 보고 있겠습니까 누구에게도 보여 주고 싶지 않은 그 필름 을 없 앨 수 있겠습니까 있습니다. 그 필름은 하나님만이 없앨 수 있습니 다.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이런 약속을 하십니다. 히브리서 10 장 17 절 말씀입 니다.

저희의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아마 천 국에서는 제 일생을 담은 필름을 아무리 보고 싶어도 볼 수 없을 것입니 다. 제 필름은 하나님만이 보고 폐기해 버리셨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제 일생을 엿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저 뿐만 아니라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하고 그분의 십자가 보혈을 통해 죄 사함을 받았다고 믿는 사람들의 필름은 천국에 없 습 니다. 우리는 이것을 용서의 체험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일생을 통 해서 경험하는 일 가운데 최대의 경험, 가장 놀라운 경험이 있다면 그것 은 주님 께로부터 용서받는 체험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일생을 통해서 이웃에게 베풀 수 있는 최선의 사랑이 있다면 그것은 용서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수는 우리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숙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이전의 잘못된 삶을 용서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앞으로 전 혀 실수가 없는 삶을 살 것이라고 보장받지는 않았습니다. 우리가 구원받 은 것 은 분명한 사실이고 거듭난 것도 분명한 사실이고 죄 사함 받고 용서받은 것도 분명한 사실이지만 우리는 우리의 생애를 통해서 실수를 되풀이하게 될 것입니다.

 요한 웨슬레의 전기에 보면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웨슬레가 인도하던 집 회에서 어떤 장군이 회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그 장군이 정 말 회개하고 주님을 믿게 되었는지 궁금했습니다. 웨슬레는 그 회심의 진정 성(眞正性)을 확인하고 싶어서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장군님은 하나님께서 장군님의 죄를 용서해 주셨다는 사실을 확신하십니 까 『물론이지요.』 그러면 장군님은 자신에게 잘못을 범한 이웃들을 정말 다 용서하셨나요

장군은 한참 생각하더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한 사람만 빼고 다 용서했습니다. 군대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가 있는데 이 친구만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때 웨슬레는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그렇다면 장군님에게는 두 가지 일이 생깁니다.

첫째, 앞으로 진정한 의미에서 기도를 못 합니다. 주기도를 할 수 없습니 다. 왜냐하면 주님이 가르쳐 준 기도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기도를 할 수 없기 때 문입니다.

둘째, 장군님은 악으로 절대로 잘못을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절대로 실수 를 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다른 사람에게 용서를 구할 일이 없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잘못을 범하지 않아야만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 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용서를 우리의 신앙 생활에 적용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 한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하나의 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용서에 대한 오해

도대체 용서가 무엇입니까 용서의 참된 의미를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많 은 경우에 용서를 오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용서를 살펴 본 뒤 진정한 용서를 베푸는 자가 되도록 해야겠습니다.

 용서에 대한 오해 세 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 문제를 덮어 둠 우리에게 일어났던 어떤 사건이나 문제에 대해서 그 문제를 애써 부인하거 나 축소하는 것은 용서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제가 어떤 사람에게 상처를 입었다고 칩시다. 주변에서 그 일 때문에 많이 힘드냐고 묻습니다. 그때 아무렇지도 않아요라고 천연덕스럽게 대답한다고 해서 정말 아무렇 지도 않은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문제를 축소하거나 사건 자체를 부인해 버릴 수는 있습니다. 말로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웃으면서 애기하지만 마음속에 여전히 부담이 되고 짐 이 되어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앙금이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아직 도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상대방에게 상처 입은 마음이 치유되지 않았고 그래서 그 문제 때문에 압박을 받고 있다는 증거 입니다.

우리가 진정한 용서를 체험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당면한 문제에 정면으로 부딪칠 필요가 있습니다. 용서란 용서를 베풀어야 할 대상, 혹은 용서를 받 아야 할 대상과 맞닥뜨려 그 문제를 해결하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문 제를 축소하거나 부인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많은 경우에 자기가 부딪친 일을 아 무것도 아닌 것처럼 생각해 버리면 그것이 용서한 것이라고 생각 하는데 그 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용서가 아닙니다.

 둘째 / 잊어버림 잊어버리는 것도 용서가 아닙니다. 용서에 대한 내용을 다룬 책에 보면 대 부분 잊어버리는 것이 용서라고 말합니다. 물론 잊어버리려는 노력은 용서 하려는 노력으로 훌륭하게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받은 상처를 잊어버리려고 한다고 해서 그것이 쉽게 잊혀지겠습니까 우리가 단순히 잊 어버리는 것으로 용서의 증거를 삼는다면 나중에라도 생각이 날 때는 어떡 하겠습니까 하나님 편에서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다는 말 이 단순히 잊어버린다는 말입니까 성경은 하나님이 기억을 안하신다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사실 잊어버린다는 것과 기억을 안한다는 것은 비 슷 한 것 같지만 차이가 있습니다. 잊어버린다는 것보다는 기억을 안한다 는 것 이 더 적극적인 용서의 의지가 담겨 있는 말입니다.

예컨대 이사야서 43 장 25 절 말씀을 찾아보십시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 억지 아니하리라.

이런 구절이 성경에 여러 번 나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실 때 우리 죄를 기억지 아니하십니다.

기억지 아니하겠다는 말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이 단어가 성경에서 어떤 용도로 쓰였는지 알아 보기 위해 요한삼서를 보겠습니다.

사 도 요한이 디오드레베에 대해서 언급한 대목을 읽어 보십시오.

내가 두어 자를 교회에게 썼으나 저희 중에 으뜸 되기를 좋아 하는 디오드레베가 우리를 접대하지 아니하니 이러므로 내가 가 면 그 행한 일 을 잊지 아니하리라(9,10 절).

우리 성경에는 잊지 아니하리라고 되어 있는데 원문에는 기억하겠다 로 되어 있습니다. 그가 행한 일에 대해서 내가 기억해 두고 있겠다는 말 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어떤 영어 성경은 이를 번역하기를 I will call attention to his deeds 라고 했습니다. 그가 행한 일에 관해서 내가 관심을 갖고 그것을 문제 삼겠다는 말입니다. 즉, 기억하겠다는 것은 그가 행한 일을 문제 삼겠 다 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반대로 기억하지 않겠다는 말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어떤 일에 대 해서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기억하지 않는다는 말은 단순 히 어떤 일을 망각해 버리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그것을 문제 삼지 않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잘못한 일, 상처 준 일 따위를 기억해 두었다 가 상대에게 복수하거나 제 삼자에게 그를 비판하는 일은 그를 용서하지 못했 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손해를 끼친 일을 기억하지 않는 것이 용서입 니다.

특별히 지난 일을 기억하지 않음으로써 용서를 베풀어야 할 사람들이 있습 니다. 다름 아닌 부부들입니다. 부부 싸움을 할 때 보면 옛날 옛적 일까지 들추어 내면서 서로를 깎아 내립니다. 이는 함께 살면서 서로 용서하지 않 은 채 지낸다는 증거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용서는 단순한 망각이 아니라 지난 일을 더 이상 문제 삼 지 않는 것입니다.

 셋째 / 느낌을 중요시함 우리가 참된 용서를 공부하면서 빼 놓을 수 없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용서는 느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느낌은 우리 삶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 사실을 인정합니다. 우리의 느 낌이 정화되고 새로워진다는 것은 분명한 축복입니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저는 용서가 단순한 느낌의 변화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심리학자들은 느낌이 변화되지 않은 채 말로만 용서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 으며 그것은 위선이라고까지 말합니다. 저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저는 용서의 느낌보다 용서를 말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을 용서합니다라는 선언이 용서에서 꼭 필요한 과정입니다. 때때로 마음속에서 용서를 거부하는 느낌이 들더라도 자기 의지를 사용해 상대방 을 용서한다고 선언하는 것은 진정한 용서를 베풀 수 있게 하는 첫걸음입 니다.

그것은 위선이 아닙니다.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날 때 일어나고 싶다는 느낌이 강해서 일어나는 사람이 몇이나 됩니까 대부분이 아침에 이불 속에서 빠져 나오면서 좀 더 잤으면, 좀더 쉬었으면 하는 마음들을 갖고 있을 줄 압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정말이지 새벽에는 죽어도 일어나기가 싫습니다. 그런데 새벽 기도를 인도해야 하기 때문에 일어나고 싶은 느낌이 전혀 없어도 일 어 나야 합니다. 새벽에 일어나는 것이 끔찍해도 일어날 수 있는 것은 저 의 의 지의 결단 때문입니다. 이런 것을 위선이라고 하겠습니까 사람은 느낌과 정반대되는 일을 해야 할 때가 많습니다. 느낌과 반대되는 일을 하는 것 이 위선이라고 한다면 인간 의지의 소산은 다 위선에서 나온 것입니까 느낌에 따라서 행동하는 것이 옳다면 저는 세수도 목욕도 안하 고 살지 모 릅니다. 주부들은 새벽마다 일어나서 아침 밥 짓는 것을 포기 할지도 모릅 니다.

우리들이 해야 할 일 가운데는 그 얼마나 귀찮은 일들이 많습니까 월요일 아침에 출근하는 것이 쉽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느낌을 억누르고 우 리가 해야 할 일, 우리의 목표를 향해 의지적으로 행동할 수 있습니다.

용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대방을 마음으로부터 용납해 주고 싶은 마음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 마음에 내키지 는 않지만 형제를, 자매를 용서하고 화목하게 지낼 수 있습니다. 이는 위선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용서는 의지의 결단을 표현하는 일입니다.

종교개혁자인 마르틴 루터에게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질문하기를 선생님 은 죄 사함 받은 느낌이 있습니까라고 했습니다. 그때 루터는 이렇게 대 답했다고 합니다.

『저는 하나님이 제 죄를 용서해 주셨다는 것을 느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제가 죄 사함을 받은 것은 압니다. 주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약속 하 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느낌과 상관없이 주님이 약속하신 바를 믿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느낌이 아닌 약속으로 우리가 죄 사함 받은 것을 알듯이 우리가 용 서하는 것도 단순한 느낌의 차원이 아니라 의지의 소산으로 볼 수 있습니 다.

 그리스도의 용서

본문을 다시 한번 읽어 보십시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을 향 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 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제일 먼저 강조한 것이 인자하게입니다. 대부분의 영어 성경은 그냥 be kind(친절하게 하라)로 번역하고 있는데 사실 이 말에는 친절 그 이 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정말 상대방을 유익하게 하고 상대방을 돌보 려는 의지로 다가가는 친절한 태도를 말합니다.

 불쌍히 여기며라는 표현은 영어 성경에 tender hearted(아주 부드 러운 마음)로 번역되어 있는데, 이 단어의 본래 의미는 상대방의 인간적인 연약성을 깊이 이해하는 태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저 사람도 별 수 없 는 사람이어서 그런 실수를 했겠지라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상대방 의 실 수나 잘못을 정말 불쌍히 여기는 태도로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 그 것이 불 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제가 그리스도인의 용서, 성경이 가르치는 용서의 의미를 정의(定義)한다 면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용서는 이웃의 인간성의 연약함을 이해하고 상대방을 용납하며 그 의 실수를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고 상대방과의 관계를 더 나은 관계로 회 복하는 과정이다.

상대방도 나와 똑같은 실수를 할 수 있는 연약한 인간성을 지녔음을 이해 하고 상대방을 용납하며 그의 실수를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고 그와의 관계 를 더 나은 관계로 회복시켜 나가기 위한 과정이 용서라고 말하고 싶습니 다.

 본문 말씀은 용서의 중요한 동기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동기는 단순한 한 구절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가 그 말씀입니 다.

영어 성경에는 in Christ혹은 for Christs sake로 되어 있습니 다. 예수님 때문에 용서하라니 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용서의 동기가 그리스도께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용서하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시키기 위해서 값 비싼 대가를 치르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피 값으로 용서받았습니다. 우 리 가 얼마나 엄청난 용서를 받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물론 용서 그 자 체는 값없이 선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그분을 우 리의 구 주와 주님으로 모시는 순간에 그 용서는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용 서 자체는 값없는 선물로 주어졌지만 그 용서의 배경에는 그리스도가 값 비싼 희생을 치르셨다는 사실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가 받은 용서는 아주 값 비싼 용서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쉽게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는 아직도 우리가 주께 받은 용 서가 얼마나 값 비싼 용서인지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단적으 로 보여 주는 주님의 비유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8 장 21-35 절 말씀입니 다. 베드로가 예수께 묻기를 형제를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하느냐고 했습니 다. 이때 주님은 일흔 번씩 일곱 번이도 하라, 즉 용서의 한계가 없음 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어떤 빚진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무려 일만 달란트를 빚진 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그 빚을 갚지 못했기 때 문에 처자식까지 팔아서 빚을 갚아야 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주인은 그 종이 불쌍해서 모든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일만 달란트라는 어마어마 한 빚을 탕감받은 사람이 잠시 후에 어떤 모습을 보입니까 그 사람에게 백 데 나리온 빚진 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그 친구를 만나 당장 빚을 갖지 않는다 고 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두 사람이 빚진 액수를 비교해 봅시다. 일만 달란트와 백 데나리온이 얼마 나 큰 차이인지 아십니까 한 달란트가 6 천 데나리온입니다. 한 데나리온 은 하루 품삯입니다. 일만 달란트면 그 당시로는 가히 기하학적인 액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종이 백 데나리온 빚진 자 기 친구를 용서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받은 용서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 스도가 생명을 바쳐 얻어 낸 것입니다. 십자가 보혈로 용서받은 사람들이 왜 이웃의 작은 잘못을 용서하지 못합니까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받 은 용서가 얼마나 엄청난지 깨닫지 못해서입니다. 우리는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자보다 더 어리석은 자인지도 모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에는 우리가 지금도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 있 다는 뜻이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 악에 나갈 때 우리를 용서해 주신 주님은 지금도 용서의 중보자(仲保者)가 되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받아 주시고 하 나님 악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신 중보자이실 뿐만 아니라 지금도 인간 관계 속에서 우리의 용서를 중보하고 계신 분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 오. 우리 가 참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살 때,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 는 모습으로 살고자 할 때 그리스도는 우리 곁에 계십니다. 우리가 이웃 을 용서할 수 있 도록 도와주십니다.

 제가 아주 오래 전에 상담했던 사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한 부인이 저를 찾아와서는 남편이 바람 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부부 가 다 그리스도인이었는데, 아내가 남편의 일로 대단히 큰 충격을 받았습 니다.

그런데 이 부인이 제가 남편을 다 용서했습니다. 그런데 더 이상 함께 살 지는 않겠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 부인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때 이 렇게 말했습니다.

『자매님, 미안하지만 자매님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오해하고 있고 또 용서가 무엇인지를 오해하고 있습니다. 자매님은 남편을 용서했다고 말 했지만 실은 용서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용서는 단순히 어떤 사실을 불문에 붙이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그 문제를 문제 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혼을 하겠다는 것은 그 문제를 더 크게 만드는 것 아닙니까』 저는 그때 고린도전서 10 장 13 절 말씀으로 그 부인을 설득 했습니다. 그 부인은 그 말씀을 암송하고 있는 열심 있는 성도였습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 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 시고 시험당 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능히 감당하게 하시 느니라. 잘못을 저 지른 남편과 더 이상 함께 살고 싶지 않다는 것은 감정입니다. 저 는 그 부인에게 진정으로 남편을 용서한다면, 하나님께서 그 남편을 사랑할 수 있도록, 그리고 그 남편을 이해하고 이전보다 더 좋은 부부 관계로 회복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 하지 못한다면 그 신앙에는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저와 상담한 부인은 이 후에 그 시련을 훌륭하게 극복하고 남편과 아주 아름다운 관계를 맺는 자리 까지 나가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웃을 용서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예수께 있습니다. 주님이 하나님 악에서 우리를 대신해 치르신 값 비싼 대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주 님은 지금도 우리와 이웃이 용서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용서의 하나님

본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를 용서해 주시는 아버지 하나님을 보게 합 니다. 우리를 용서해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용서를 통해 하나님 아 버지를 더욱 깊이 알 수 있습니다.

용서의 사건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 주는 사건이 탕자의 드라마입니다(눅 15:11-32 참조). 탕자는 예수님 당시 유대의 상황에 비추어 보면 최악의 범 죄를 저질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자기 몫의 재산을 요구한 것도 얼토당토 아니한 일인데, 그나마 분배받은 재산을 먼 나라에 가서 다 탕진하고 돼지 치는 일 을 하였습니다. 이 아들은 자기 자신에게도 치욕이지만 아버지의 명예 까지 도 더럽히는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정말 이런 아들은 없는 게 백 번 낳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는 아들을 용서하였습니다.

 아버지의 용서의 모습 네 가지를 살펴봅시다.

 첫째로, 조건 없이 용서했습니다.

아버지는 조건 없이 아들을 받아들였습니다. 돼지 치다 돌아온 아들을 비웃 지도 않고 야단 치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 품안에 안았습니다. 하나님은 우 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 죄로 더럽혀져 상처 입은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여 용서해 주십니다. 그분의 용납은 조건이 없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용서할 때 용서의 조건을 달기 쉽습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도 조건 없이 이 웃 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둘째로, 용서한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아버지는 탕자를 용서했다는 사실을 입으로 알리고 행동으로도 표현했습니 다. 우리도 상대방을 용서했을 때 그 용서를 구체적으로 표현해야 합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용서했다는 사실을 어떤 모습으로 보여 주었습니까 아버 지는 집을 향해 오고 있는 아들을 발견하고 아들을 향해 달려 갔습니 다.

아들은 아버지가 나를 받아 주실까 종으로라도 써 주시면 좋으련만 하면서 무거운 발걸음으로 집을 향해 걷고 있었을 것입니다. 자기의 잘 못 을 후회하면서 때로는 한숨을 쉬면서 터벅거리며 걸었습니다. 그러나 아 버지는 아들을 발견하자마자 달려갔습니다.

 스펄젼은 이 장면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아들이 한 걸음을 뗄 때 아버지는 열 걸음을 달려왔다. 이 달려오는 아 버지를 보면서 아들은 무엇을 확인했겠습니까 아버지가 정 말 자신을 용 서하신다는 사실을 아버지의 모습에서 알아챘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돼지를 치면서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던 아들이니 그에게서 얼마나 악취가 났겠습니까 그러나 아버 지 에게는 그런 것이 상관없었습니다. 아들이 돌아온 것을 기뻐하며 끌어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용서를 피부로 실감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용서는 언제나 감동적입니다. 창세기 33 장에는 야곱과 에서 가 만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버지 이삭의 축복을 몽땅 가로채고 삼촌 라반에게 도망갔던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에서는 야 곱 에게 장자가 받을 축복을 빼앗긴 원한에 사무쳐 20 여 년을 지냈습니 다. 이 제 잠시 후면 야곱 일행과 에서 일행이 맞부딪칠 상황입니다. 이 때 야곱이 어떻게 했습니까 그 자식들을 나누어 레아와 라헬과 두 여종에게 맡기고 여종과 그 자식들은 악에 두고 레아와 그 자식들은 다음에 두고 라헬과 요셉은 뒤에 두고(1,2 절).

굉장히 재미있는 배치입니다. 야곱은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을 뒤에 두 고 덜 중요한 사람을 악에 세웠습니다. 에서가 400 인을 거느리고 오는데 혹시 모르니까 가장 아끼는 라헬과 요셉을 맨 뒤에 세운 것입니다.

그런 다음 자기는 그들 악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 형 에서에게 가까이(3 절) 다가갔습니다. 야곱은 목숨을 걸고 에서 악에 나 아간 것입니다. 그런데 에서의 모습을 보십시오. 이게 어찌 된 일입 니까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아서 안고 목을 어긋맞기고 그와 입맞 추 고 피차 우니라(4 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용서의 감동이 전해지는 순간입니다.

우리는 상대방을 용서했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표현해야 합니다. 용서했다 고 말하면서 서로 얼굴 마주 대하기를 꺼리는 것은 용서하지 못한 증거입니 다.

셋째로, 이전의 죄를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그 동안의 잘못을 낱낱이 고하라고 역정 내지 않았습니 다. 분배받은 재산을 어디에 다 썼느냐고 고함 치지도 않았습니다. 대신 아 버지는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 노라(눅 15:24) 하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아들에게 가락지를 끼워 주고 새 옷과 새 신발을 주고 송아지를 잡아 동네 잔치를 열었습니다.

아들의 과거를 문제 삼는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용서하기로 했 으면 지나간 일은 문제 삼지 않아야 합니다. 이럴 때 진정한 용서가 이루어 집니다.

 넷째로, 죄인을 온전히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온전한 부자(父子)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새 신발을 신키고 손에는 가락지를 끼우고 새 옷을 입히는 것은 모두 아들로 서 의 당당한 권위를 회복시켜 주는 것입니다. 이전보다 아버지와 더 가 까운 자리에 설 수 있도록, 새로운 내일을 향해 힘차게 나아갈 수 있도록 온전한 삶을 회복시켜 주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회복의 자리에까지 서게 하는 것이 진정한 용서입니다. 아마 탕자 는 옛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버지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 을 것입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용서를 체험하고 난 뒤에 아버지의 사랑 안 에서 성실하게 살았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제가 얼마 전에 평범하지만 너무 감동적인 글을 한 편 읽었습니다. 얼마나 감동적인지 눈물까지 흘렸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쓴 글인데 남의 애기 같 지 않아서 더 감동했나 봅니다.

그 글을 쓴 목사님 아들이 운전 면허증을 땄습니다. 제 아들도 이제 운전 면허증을 따서 가끔 제 차를 몰고 다닙니다. 저는 아들 아이가 차를 몰 고 나갈 때마다 여간 걱정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 아들 이 어 느 날 아버지 몰래 아버지 차를 타고 나갔다가 교통 사고를 내서 그만 두 다리를 절단하는 큰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친 뒤 아들이 의식을 회복했습니다. 곁에 있던 아버 지 목사님이 아들을 쳐다보았습니다. 이때 아들이 아버지를 보고 하는 첫 마디가 아버지, 저를 용서해 주시겠어요 제가 아버지 허락 없이 자동 차 를 몰고 나가서 사고를 당했어요. 아버지 저를 용서해 주실 수 있으세 요 였답니다.

목사님은 아들을 끌어안고 『용서하고 말고. 네가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나 는 감사하단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아들이 감격해서 아버지가 정말 저를 용서해 주신다면 저는 두 다리 없이도 살 수 있어요 하고 기 뻐 했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손해를 끼친 이웃들을 진정으로 용서하고 있습니까 그들 을 회복의 자리에 서게 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용서하는 기쁨을 누려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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