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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세 개의 십자가 (눅 23:3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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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오전에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세 가지의 큰 유익을 주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는 우리를 하나님의 저주에서 구원하여 영생을 소유한 복된 인생이 되게 하셨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십자가를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갈보리 언덕 골고다에는 세 개의 십자가가 높이 서 있었습니다. 중앙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요, 좌우편에는 살인강도의 십자가가 함께 서 있었습니다.

 오늘 봉독한 말씀에 보면 좌우편의 두 강도 중 한편의 강도는 끝까지 회개하지 못하고 예수님을 조롱하면서 비난 하다가 멸망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의 강도는 마지막 순간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낙원을 허락받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외경인 빌라도의 행전에 보면 회개하지 못한 강도의 이름은 게스타(Gesta)요, 회개한 다른 편의 강도 이름은 디스마(Dismas)로 알려져 있습니다. 갈보리 언덕의 세 개의 십자가를 통해서 오늘 우리 자신의 모습을 함께 생각하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날도 에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중심하여 온 세계는 회개하지 못하는 무리들과 회개하고 돌아오는 무리들로 갈라져서 신앙과 불신앙의 좌우로 구별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양과 염소의 비유와 같습니다. 마지막 때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은 사람은 구원받은 자로서 양이며, 예수믿지 않은 자는 멸망받을 자로서 염소에 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라는 말은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말로서 기독교의 중심교리의 내용으로 상징되고 있습니다. 원래 십자가란 형틀은 제1세기경 로마 사람들이 다스리던 식민지 국가에서 아주 중한 죄수를 극형에 처하는 처형방식 중에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아주 부끄럽고 치욕적인 저주스러운 형벌로 알려져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신명기21:23에 보면 구약시대에도 나무에 달려 죽는 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로 인정되고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사상에 있어서도 십자가를 지는 형벌은 저주스러운 형벌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부끄러움을 참으로시고 이 치욕의 십자가를 우리의 죄를 대속하여 주시기 위해서 털깍이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어린 양처럼 지고 사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세 개의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인가를 살펴봅시다.

 1.회개하지 못한 강도형의 인간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본문39절에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예수를 비방하면서 하는 말이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고 하였습니다. 결국 마지막까지 회개하지 못하고 멸명을 자초하고 말았습니다. 자기의 죄도 깨닫지 못했고 눈이 어두워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를 못했습니다. 이 강도는 어떤 사람이였기에 끝내 회개치 않아 구원받지 못했습니까 1)양심이 화인맞은 사람이였습니다. 딤전4:2"자기 양심이 화인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로다" 양심이 화인맞았다는 것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마음이 열리지 못하고 닫혀진 마음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강도는 바로 양심이 화인맞은 자였습니다.

 2)미련한 자였습니다.:마13:14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선지자 이사야의 슬픈 예언이 이루어지고 있음 한탄하셨습니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여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해졌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강도는 바로 미련한 자였기에 십자가의 도리를 개닫지 못하여 십자가위에서 죽어가면서 예수님을 조롱했던 것입니다.:십자가의 도가 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3)영혼이 무감각한 자였습니다. 마11:17절에는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지 않고 애곡하여도 가슴을 치지 아니하는 마비되고 무감각해진 세대를 향하여 탄식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 망한다고 개탄했고 자기 백성이 깨닫지 못하는 백성이 되어 패망한다고 슬퍼하였습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호4:6) "깨닫지 못하는 백성은 망하리라"(호4:14) 한편의 강도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구세주로서 모든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심을 깨닫지 못해기에 회개치 않음으로 멸망받게 되었습니다.

 4)아래 것을 찾는 자였습니다.:성경은 우리에게 위엣 것을 찾으라고 말씀하시며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에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골3:1-2) 양편에 있는 강도 가운데 하나는 위를 볼 줄 모르고 강팍하여 회개하지 못하고 메시야를 보는 영안이 열리지 않아서 멸망받았습니다.

신앙생활에는 좌우가 있습니다. 인간의 생활에는 좌우가 있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뜻을 좇고 구원을 얻고 낙원에 이르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위엣 것을 찾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2.회개하고 낙원을 허락받아 구원받은 강도처럼 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눈을 돌려 회개한 강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비방하며 모욕하는 강도를 꾸짖었습니다. "네가 정죄를 받고도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보응을 받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냐 그리스도 이 분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이처럼 예수님을 조롱하는 강도를 책망한 후에 그 강도는 예수님을 향하여 애원을 합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가 임할 때 나를 생각하소서."

우리는 대조적인 두 사람을 봅니다. 두 사람의 강도는 죄를 짓는 일과 고통의 형벌을 받는 일에 동료였으며, 지금까지 행동을 함께 해온 동료였으나 마지막 십자가에서는 둘로 갈라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내가 누구보다 나은 의때문에 구원받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롬3:10절에 의인은 없나니 곧 한 사람도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만 죄를 지음이 없기 때문에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깨닫고 회개하는 길이 구원을 받는 길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앞에서 읽었습니다만 고전1:18"십자가의 도가 명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나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십자가의 도는 누구에게나 동일하나 그러나 그 도는 인간의 상태의 여하에 따라서 구원과 멸망이 좌우된다는 사실입니다.

 회개한 강도는 고통스러운 그의 십자가가 그를 회개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학자인 벵겔인란 신학자는 누구든지 평안한 침상에서는 회개할 수 없다고 말한 일이 있습니다. 흔히 회개하는 사람들을 보면 질병의 고통, 어려운 시험, 사업의 실패등에서 회개하고 돌아오는 이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받는 고통은 우리의 죄값으로 오는 것임을 깨닫고 회개하고 구원받는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요나는 고기 배속에서 회개하고 제2의 요나가 되었습니다. 회개가 구원의 약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회개한 강도는 마치 불속에 던져져 타려고 하는 나무를 그 직전에 순간적으로 끌어내는 것처럼 지금 마지막 멸망받는 순간 회개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는 의지함으로 구원받았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죄를 싫컷 짓고 살다가 죽을 때 회개하면 되겠다고 악용을 하지만 그것은 안될 말입니다.

 우리가 결코 임종의 순간까지 우리의 죄를 연기하거나 그때가서 하나님의 자비를 구해도 된다는 생각은 안됩니다. 본문 말씀의 뜻은 최후 순간이라도 깨닫고 회개하면 구원을 허락하신다는 하나님의 풍성한 자비를 알게 하는 말씀이지 죄를 짓는 사람이 뒤로 미루어 놓을 수은 없는 것입니다.

 여기 회개한 강도는 구원받을 만한 회개의 모습이 역력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믿음을 가지고 극형에 대해서도 억울함이 없이 감수하며 그리스도께 대한 의로움을 시인하고 "나를 생각하소서"하는 내세에 대한 소망과 회개하는 자에게는 구원의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3.낙원을 허락하는 주님의 십자가를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이 선언은 아무도 할 수 없는 선언입니다. 지위가 높은 사람도, 명예가 있는 사람도, 돈 많은 부자도, 과학자도 아무도 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우리가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아무도 할 수 없는 말입니다.

 회개한 강도는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니라"는 보장을 받고 바로 회개하는 순간에 그 자리에서 튼튼한 구원을 보장받았습니다.

 탕자가 회개하고 돌아올 때 아직 상거가 멀지만 아버지가 나와서 품에 안아 주셨습니다. 구원은 우리의 완전으로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을 기다리며 회개하는 죄인에게 구원은 임하여 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파스칼은 "의인시하는 죄인이 있고, 죄인시하는 의인이 있는데 잘못하면 구원받는 죄인이 있고 멸망받는 의인이 있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회개하는 자는 바로 하나님과 함께 동거하게 됩니다. 삭개오가 회개할 때에 예수님께서는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15장에 보면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가 너희 안에 있으면 무엇이든지 구하라"는 하나된 상태를 말씀하십니다.

 회개하는 자에게는 행악자일지라도 용서의 풍성함이 허락되며 구원의 보장이 선언됩니다. 축복받은 영혼들이 머무는 낙원의 영원한 처소가 있습니다.

 오늘 이 고난 주간을 지내면서 사랑하는 여러분들이 좌편에 있는 심령이 아니라 우편에서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 봄으로 구원을 얻고 낙원을 허락받는 생애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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