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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십자가와 군중들 (막 15: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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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우리 예수님께서 고난과 죽음을 당할 것을 뻔히 아시면서도 공공연히 예루살렘성에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평화와 겸손을 상징’하는 나귀를 타시고 입성하셨으며, 수많은 군중들은 예수님께서 눈에 보이는 메시야 왕국을 세우실 것이라는 그릇된 기대를 가지고 ‘호산나!’를 외치며 환호하며 환영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번 주간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돌아가신 성 금요일이 끼어있는 고난주간이며, 다음 주일은 부활 주일입니다.

교회 역사상 사순절, 또는 고난주간은 대단히 중요하게 취급되어 왔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고난의 절정이 이 기간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순절 기간동안의 주제는 십자가요, 그 결론은 부활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달려 죽으신 십자가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가룟 유다가 있었고, 베드로가 있었고, 빌라도, 바라바, 아리마대 요셉, 막달라 마리아, 도마, 헤롯, 안나스와 가야바, 그리고 많은 군중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어쨋든 십자가 사건의 증인들이 되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들 가운데 특히 군중들의 모습을 살펴 보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조명해 보고, 또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우리는 이들에게서 다음과 같은 <세가지의 얼굴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1. 예수님을 환영하는 얼굴입니다. (마 21:6-9절)
이 수많은 무리들은 종려주일날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찬양하기 위해서 겉옷을 펴서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열렬히 환영면서 찬양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이들의 환영과 찬양은 결코 자신들 스스로가 생각해서 한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21:6-7절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먼저 자기들의 겉옷을 펴서 예수님을 환영하는 모습을 조금전에 보여 주었던 것입니다. 이 군중들의 환영행렬은 제자들의 환영모습을 그대로 모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적어도 종려주일을 중심으로 한 이 사건속에서 군중들은 어떤 마음의 동기였든 간에 예수님 편에 서기를 원했고, 그들의 입술을 열어 찬양했으며, 비록 제자들을 모방한 것이지만 적어도 예수님을 환영하는 행렬속에 있어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십자가 주변에 있었던 무리들의 <첫번째 얼굴>입니다.

그러나 닷새후에 그들은 또 다른 얼굴을 보여 줍니다.

2. 예수님을 배반하는 얼굴입니다.
오늘 본문 12-15절을 보면, 군중들은 <바라바와 예수님중 누구를 석방할 것인가>에 대한 빌라도의 요구에, 바라바를 선택했으며, 뿐만아니라, “저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라고 외치면서 저주까지 합니다.

바로 이것이 무리들의 <두번째 얼굴>입니다. 변신한 얼굴, 바뀐 얼굴입니다. 마치 야누스의 또 다른 얼굴과도 같습니다. 불과 5일전만해도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향하여 그렇게도 열렬히 환영했던 그들이 이제는 완전히 돌변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라바를 놓으소서! 저를 십자가에 못박으소서!”라고 고래고래 고함치는 그들의 모습과 얼굴은 살기가 등등한 배신의 얼굴이었습니다.
그런데 역시 이 대목에서도 한가지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11절을 보면,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이 무리들을 충동했다는 사실입니다. 적어도 무리들의 입장은 예수님을 반대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대 제사장과 장로들이, “하나님의 아들...” 운운하면서 충동질하자 삽시간에 그들의 행동이 돌변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것이 군중들의 <두번째 얼굴>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50여일이 지난날, 이 군중들의 <세번째 얼굴>을 보게 됩니다.

3.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는 얼굴입니다.
행2장에 보면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오순절이 되었습니다. 이날 마가의 다락방에 있던 120여명의 성도들은 성령이 뜨거운 체험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서 에루살렘에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성령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특히 사도들이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예루살렘의 무리들을 향하여, “예수는 바로 당신들이 죽인 것이라!”고 담대히 죄를 지적하고 나서,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들의 죄악을 용서하시고 구원의 기회를 주셨으니 이 복음을 믿으라!”고 강력히 증거합니다.

이 설교에 대해서 그들이 어떻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행 2:37절을 보면, “마음에 찔려, 어찌할꼬...”하며 괴로워 했으며, 41절을 보면 무려 3000명씩이나 회개하고 예수를 믿었으며 세례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군중들의 <세번째 얼굴 즉, 회개하고 있는 군중들>의 얼굴을 볼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까지 우리는 군중들의 <세가지 얼굴>을 보았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치며 환영하는 얼굴과, “저를 십자가에 못박으소서!”라고 외치는 배반하는 얼굴, 그리고, 마음에 찔림을 받고 “어찌할꼬!”하며 가슴을 치면서 회개하는 얼굴을 보았습니다.

여러분! 이와같이 이랬다 저랬다하며, 우왕좌왕하며 흔들리는 군중들의 신앙 모습은 2,000년전에 있었던 십자가 주위에만 있었던 모습이 결코 아닙니다. 안타깝게도 오늘 사순절과 고난주간을 보내고 있는 우리들 중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러한 안타까운 현실속에서 오늘 본문이 우리들에게 주시는 <두가지의 교훈>을 배울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1. 군중심리에 의한 신앙이 얼마나 위험한가 하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가고, 제자들도 그렇게 하며, 거기에 엉청난 함성이 있으므로, 함께 찬양하고 덩달아 종려가지를 흔들며 주님을 환영했지만, 그것은 개인적인 신앙고백과 확신에서 나온 행동은 결코 아니었던 것입니다.

개인적인 신앙고백과 확신에 도달하지 못한 신앙은 결국 군중심리에 휩싸이기 쉽고, 군중심리가 바뀌면 언제든지 신앙도 바뀌게 된다는 사실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어제는 주님을 열열히 환영했으나, 오늘은 주님을 배신하고 있는 군중들의 모습은 확신없는 신앙이 얼마나 위험한 신앙인가 하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들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군중심리에 따라서 우왕좌왕하거나 흔들리는 신앙인이 되어서는 절대로 안되겠습니다.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에 대한 분명하고 확고한 신앙을 고백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화;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에게 간청했습니다. “우리에게 율법을 주시오! 그 율법을 지키겠습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막상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아 가지고 내려왔을 때에는 이미 군중심리에 휩싸인 백성들은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놓고 야단법썩을 떨고 있었습니다.
이때 모세는 저들에게 개인적인 신앙고백을 요구했고, 그때에 옳바른 신앙고백을 선택한 사람들은 구원을 받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모두 멸망을 당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또한, 여호수아는 가나안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주민들에게 휩싸여서 우상을 섬기자 강력하게 외쳤습니다.
“너희들은 오늘날 누구를 섬길 것인가를 분명히 선택하라! 그러나 나와 내집은 여호와만을 섬기겠노라! (수24:15)”고 말입니다.

여러분은 저 갈멜산상의 뼈대없는 군중들을 기억하십니까 그들은 원래 하나님을 섬기던 사람들이었지만 군중심리와 대세에 따라 바알신을 추종하는 크나 큰 죄를 범하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군중들을 향하여 엘리야는 분명한 신앙고백을 이렇게 요구합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언제까지 지조없이 눈치만 살피고 있을 것이냐”라고 말입니다. 그들은 결국 나무를 높이 쌓아올린 제단에 불로 임하신 하나님을 보고서야 하나님께 되돌아 왔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분명히 고백하실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골고다 언덕에서 물과 피를 남김없이 흘려주신 예수님께서 <나의 구세주! 나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나아가서, 이러한 신앙고백이 없이는 절대로 이 험한 세상 가운데서 신앙의 정조를 지킬 수 없을 뿐만아니라, 끝까지 주님을 따를 수 없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마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군중심리에 따라 우왕좌왕하는 신앙이 얼마나 위험한 신앙인가를, 저 십자가 주변에 있었던 군중들에게서 오늘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주변에 있었던 군중들의 모습을 통해서 또 한가지 중요한 교훈을 발견하게 됩니다.

2.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군중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장본인의 역할을 했습니다. 비록 그것이 대제사장과 장로들의 충동에 의한 것이었다고 할지라도, “십자가에 저를 못박으소서!”라고 고함을 질렀던 장본인들이 바로 이 무리들 이었기 때문입니다.
무슨 변명과 핑게를 대더라도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한 사실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빌라도가 판결하기는 했으나, 그것은 단순히 저들의 민란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군중들은 마땅히 최고의 형벌을 받아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그 무리들이 죽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무리들을 결코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여기에 예수님의 놀랍고 엄청난 사랑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을 보내셨고,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았던 이 무리들에게 회개할 수 있도록 역사하셨던 것입니다. 그 무리들은 예수님을 배신했어도, 예수님께서는 결코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슴에 쓰라린 배신의 못을 박았던 그들! 그리고 그 얼굴에 침을 뱉었던 장본인들!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고래고래 외쳐댔던 그 무리들이 아니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그 군중들을 사랑하셨고, 그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셨으며,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올 수 있도록 가슴과 영혼속에 역사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는 이 고난주간에 이렇듯 크고 놀라우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깊이 체험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십자가 옆에 있었던 그 군중들과 무리들 중에 여러분과 저도 있었다는 사실과, 우리 모두는 그 군중들과 함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공모자들이라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2000년이 지난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도 매일 매순간마다 예수님을 섭섭하게 해드리고 있으며, 다시금 십자가에 못박는 생활을 하고 있으니, 그들보다 결코 나은면이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보다 더 많은 죄를 지으며, 예수님을 실망시키는 삶을 살고 있음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 지셨습니까 그 분이 왜 골고다 언덕 사형장으로 올라가셔야만 했느냐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저와 여러분의 죄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나 동시에 이 사실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우리의 죄를 십자가의 크신 사랑으로 용서하셨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인 것입니다. 이 은혜와 크신 사랑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을 죽인 장본인임에도 불구하고 이 사순절과 고난주간에 다시금 십자가를 향하여 걸어 나갈수 있는 용기와 담력을 얻게 된 것입니다.

고난 주간을 맞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 모두는 십자가 옆에 있었던 군중들 틈속에 끼어서, “저를 십자가에 못박으소서!”라고 고래고래 소리친 폭도가 바로 나였음을 고백하며 철저히 회개합시다!

그리고 그러한 나-백번 죽어도 부족한 나-에게까지도 십자가의 크신 은혜와 사랑이 임했음을 감사, 찬양드립시다!
나아가서 이제 우리들의 신앙은 결단코 더 이상 군중들에게 휩싸여서 우왕좌왕하는 신앙이 되지 않겠다는 결단과 각오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모쪼록 십자가의 고난을 깊이 묵상하며, 그 고난에 동참하면서 고난주간을 지내기로 작정하는 모든 성도들에게 십자가의 크고 놀라우신 은혜와 사랑이 풍성하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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