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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의 시험 (마 04: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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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을 받는다”는 말은 문자적으로 “뻗치다, 힘을 시험해 보다”를 뜻합니다. 일반적으로는 나쁜 의미로 사용되는 “죄를 꾀다, 부추기다, 유발시키다”라고 쓰입니다.
성경에는 독특한 두가지 모델의 시험이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우리는 그 유명한 아브라함의 시험을 봅니다(창 22장). 100살에 얻은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요구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멋있게 시험에 합격하는 감격을 맛봅니다. 또 하나는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의 시험입니다.
아브라함의 시험은 “무엇을 해야 한다”는 명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요구를 순종하느냐 하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꼭 해야만 할 때 하지 않으면 죄입니다. 따라서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는 것도 죄가 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후에 다시는 인간을 시험하지 않으셨습니다.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치 아니하십니다(약 1:14).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 시험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시험은 “무엇은 꼭 하지 말아야 한다”는 우리들 생활 속의 매우 중요한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시험은 오늘 우리들의 시험이며 예수님이 이 시험에서 승리하신 것은 우리들도 예수님의 모범을 따르면 승리할 수 있다는 교훈을 주신 것입니다.

첫째, 예수님은 시험을 받으려고 광야로 나가셨습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 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으로도 성령의 사람이 되셨습니다. 공생애를 살아가는 그의 길목마다 성령님이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누가복음 4장 1절에 의하면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 오셨습니다. 아직도 예수님의 머리 위에는 성령님의 광채가 조요하고 하나님의 목소리가 그의 귀에 쟁쟁한 때에 시험을 받기 위하여 광야로 인도함을 받습니다.
마가복음 1장 12절에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하신 것으로 보아 이 사건은 다른 힘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수께서 스스로의 의지에 의하여 광야로 나가신 것이 아닙니다. 몰아내었다는 말이나 이끌렸다는 말은 성령님의 강력한 인도를 말합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고 성령이 임하실 때에 하나님은 말씀 하시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 3:17)” 하셨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예수를 당신의 아들로 증거하신 사건은 여기에 묘사된 특별한 시험을 받을 자연스러운 기회를 제공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친히 시험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들에게 시험을 받도록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늘의 우리들에게도 시험에 들도록 허락하십니다. 그 시험을 통하여 축복해 주시고 그 시험을 이김으로 믿음을 더 강하게해 주십니다. 그래서 “너희가 여러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약 1:2)고 성경은 말합니다.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고 그 인내로 영혼의 구원을 받기 때문입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우리는 시험을 거절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 시험을 통하여 하나님께 옳다 인정함을 받을 기회를 얻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시험이 오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그 시험에서 벗어나지 못할까봐 안달을 합니다. 이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것입니다. 어떠한 시험도 그리스도인이 이기지 못할 시험은 없습니다.
1절이 말하는 광야는 여리고의 뒷쪽으로부터 사해의 서쪽 해안을 따라 펼쳐져 있습니다. 이 광야의 북쪽 끝은 요단강에서 서쪽으로 보면 한눈에 들어옵니다. 아주 메마르고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만큼 험합니다. 예수는 이 넓은 광야를 모조리 헤매셨는지 아니면 어느 한 지점에서 시험을 받으셨는지 확실치 않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여리고 근처에 있는 콰란타니아(Quarantania)라고 불리는 산기슭입니다. 그 이유는 이 말이 40일에서 연유한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곳은 평원 위로

4.5미터 높이로 솟아 있는 거의 직각으로 깎아지른 절벽입니다. 예수님이 시험 받기에는 적합한 장소가 아닌가 싶어 그런 전설이 생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광야는 귀신들의 활동과 연관된 장소입니다(사13:21,34:14,마12:43).출애굽한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큰 시험을 겪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윗처럼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사람들을 찾아 학살키 위해 날뛰는 골리앗 같은 마귀를 만나시려고 광야로 나가셨습니다.
디아볼로스(διαβολοS)라는 헬라어는 엄격하게는 “살인자”를 뜻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사단으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사단은 하나님께 대한 반역의 주동자이고, 모든 어둠에 속한 영들을 지도하는 원수 중의 원수입니다.
이 광야에서 주님은 사단과의 전투를 눈 앞에 두고 40일을 지내셨습니다. 마가복음 1장 13절은 주님이 들짐승과 함께 계셨다고 합니다. 광야의 그 외롭고 황량한 광경을 그려 보십시오. 유대의 광야에는 사자와 늑대와 표범과 뱀들이 득시글거린다고 합니다. 그 위험이 눈에 보인듯 선합니다.
더구나 예수님은 40일을 굶주렸습니다. 유대인들의 금식은 해 뜨기 전에 배불리 먹고 해가 있는 동안은 입에 음식을 대지 않습니다. 종종 음료수는 마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금식도 이런 류의 것이었는지 알 수 없으나 40일 동안 깡그리 물 한모금 입에 대지 않고 금식하는 한국 사람들과는 비교가 안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계신 광야의 특성을 생각해 보면 예수님의 금식은 오히려 한국 사람들의 금식법과 같지 않았겠는가 싶습니다.
40일의 금식은 이스라엘의 역사와 상통합니다. 이 사건은 40년의 방랑과 연결됩니다. 예수님과 이스라엘은 공히 굶주림으로부터 교훈을 얻었습니다. 광야에서 자신들의 과업을 준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 중에서도 중심되는 요점은 이들이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시험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을 탈출하여 홍해를 건넌 후에, 예수님은 세례를 받은 후에 각각 주어진 일을 준비하기 위하여 시험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넌 것은 바로 세례였다고 합니다(고전 10:1-2). 세례를 받은 이들은 하나님께 순종과 충성을 증명할 기회를 가진 것입니다.
한국 교인들은 금식 잘 하기로 세계에서 이름난 사람들입니다. 까딱하면 금식을 합니다. 저는 금식을 반대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유도 없이 예수님의 모방이 되거나, 자신들의 이득을 챙기기 위하여 금식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에서도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우리에게 주신 생명의 은혜에 감사하여 충성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시험을 당할 때에 참고 견디어서 승리를 쟁취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금식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아 보겠다거나,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자신들의 욕망을 성취하기 위하여 부르짖고 간구하는 금식은 아무 짝에도 소용없습니다. 더구나 금식이 무슨 자랑거리가 된다면 이것은 더욱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이 당한 시험의 내용입니다
마귀의 첫번째 시험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영적인 책임을 망각케 하려는데 있었습니다.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욕구가 인간의 삶에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믿게하여 하나님을 의심케 하려는 유혹이었습니다.
시험하는 자가 왔습니다. 어떤 모습으로 왔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성경이 말하지 않는 것을 억지로 해석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 공격자의 첫번 방법은 매우 기발했습니다. 예수님의 형편에 딱 들어 맞았습니다.
주님은 극도로 시장하셨습니다. 실지로 금식의 고통을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그 사정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3일만 금식해도 얼마나 힘들던가요. 하물며 40일을 금식하셨습니다.
또한 주님께는 이 시험을 피할 수 없는 함정이 있었습니다. 바로 얼마 전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 되셨습니다. 그것도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성령이 임하시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초자연적인 증거를 받은 것입니다. 이것은 꿈에도 생각해 볼 수 없는 너무도 영광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마음 속에 넘치는 긍지를 심어주고 우리 같으면 입이 간지러워서 가만히 있을 수 없는 감격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런 예수께 “떡덩이” 모양으로 보이는 광야의 둥근 돌들에 대한 시험이었습니다. 수염이 대자라도 먹어야 양반입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입니다. 허기진 배를 먼저 채우고 볼 일입니다. 그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저 돌들을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해야 합니다. 예수님께 과연 그런 능력이 있는지 시험해 볼 만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들인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겪었던 일들을 상기했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신 신명기 8장 3절에 기록된 말씀으로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셨습니다.
허기진 배를 부정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사는 것이 인간에게는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을 받은 예수님께 하나님을 의심케 하려던 마귀의 시험은 실패했습니다. 마귀는 예수를 데리고 거룩한 성으로 옮겨 갔습니다.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뛰어 내리라고 했습니다.
죄악의 한 길이 닫혀지면 마귀는 또 다른 길을 열어 놓습니다. 두번째의 시험에서도 마귀의 교묘함이 드러납니다. 첫번의 시험에서 실패한 마귀는 “네가 하나님께 의지하는가 그렇다면 네가 하나님께 완전히 의지해 보아라 여기 그의 성전이 있다. 가장 높은 꼭대기가 있다. 뛰어내려 보라 그의 천사들이 너의 주변에 있지 않는가 그들은 너를 보호할 책임이 있다. 시편 91편에도 설령 네가 떨어진다 하더라도 너를 붙들어 너의 발이 돌에 부딕히지 않게해 주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마귀는 자연 법칙을 무시하면서까지 부당한 위험에 뛰어 들도록 유혹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가운데 위험을 당한다면 구원을 기대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스스로 하나님의 기적을 부르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을 시험하는 일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시험하다가 뱀에게 물려 죽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뜻대로 산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시험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말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면서도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한 계획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을 시험하다가 넘어져 신앙을 잃고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이 뜻하시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인간은 진리를 시험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 실제로 그 진리를 의심하는 결과가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율법에 기록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신명기 6장 16절에 있는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하신 말씀으로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셨습니다.
사탄의 간교함은 사람으로서는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 끈덕진 시험도 대단합니다. 마귀는 다시 예수님을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갔습니다. 육신을 그대로 이끌고 갔는지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데려갔는지 아니면 환상의 세계로 시선만을 옮겨 갔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것이 또 어느 산인지도 모릅니다. 세상의 산은 꼭대기에서 세상 만국을 다 내려다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마귀가 데리고 간 산은 세상 만국을 다 내려다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것들에게 신경 쓸 필요가 없으며 그렇게 중요한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그 유혹은 사실이었으며 실제의 시험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마귀에게 이끌려 다닌 것은 마귀가 예수님보다 우월하거나 예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예수님 스스로 마귀에게 자신을 시험할 수 있도록 허락하신 것입니다.
마귀는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줍니다. 이 모든 것들을 소유한 자신에게 절하면 그것을 다 주겠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 전망은 얼마나 화려하며 그 조건은 얼마나 쉬웁습니까. 절 한번 하는 댓가로 온 천하를 얻는다는 것은 어리둥절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 시험이야 말로 가장 간교한 것입니다. 따라서 마귀는 장차 예수님이 하실 일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습니다. 마귀는 예수님께 죄인들을 대신한 십자가의 죽음없이 이 세상 나라들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가 생각 나십니까.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 26:39)” 주님은 십자가의 고통을 알고 계십니다. 마귀가 주님의 사명을 알고 반역하라고 댓시해 오는 유혹을 과연 어떻게 하셨을까요.
마귀의 단도직입적인 유혹에는 역시 직접적이고 단도직입적인 방법이 효과적입니다. 주님은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습니다. 이에 마귀는 물러 갔습니다.
이 시험은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예수님은 옛 일을 다 아십니다. 항상 성경을 상고하셨습니다. 성경의 교훈을 마음 속에 품고 계십니다. 옛날 일은 우리 생애의 거울입니다. 바울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행한 일이 우리에게 거울이 된다는 말을 거듭 두 번이나 했습니다(고전 10장).
오늘날 신자들은 성경을 알지 못하면서도 제일 잘 난 교인인척 합니다. 열심히 봉사하고 기도하고 어떤 은사들을 받아서 남 하지 못하는 능력을 행하면 자기가 제일인 줄 압니다. 사실 그런 것들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능통해야 합니다. 사탄은 예수님께도 성경에 기록된 말씀으로 유혹했습니다. 만약 주님이 이 말씀을 분별하지 못했다면 그 시험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큐티생활에 전념하라는 것은 귀찮게하려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을 깊이 상고하라는 말을 귀하게 여기십시오. 그만큼 그리스도인 생활의 길잡이가 되기 때문입니다.

셋째, 마귀는 물러가고 천사들이 수종 들었습니다
시험의 결과는 매우 교훈적입니다. 한편으로는 마귀가 떠나가고 그 자리를 천사의 무리가 대신했습니다. 누가복음 4장 13절에는 마귀가 “얼마동안” 예수님을 떠났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사탄과의 싸움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이 대결에서 마귀는 실패하고 얼마동안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이제는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악마와 싸우는 법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미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신뢰의 모습이 형성된 것입니다. 그 증거로 천사들이 와서 수종 들었습니다. 천사의 수종은 일시적인 축복이 아닙니다. 영원히 계속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돌로 떡을 만드는 기적으로 굶주림을 벗어나는 것을 거절하셨지만 지금은 그 초자연적인 능력에 의하여 음식을 제공 받고 계십니다. 여기 “수종 받다”란 뜻의 “디에코눈”(διηκονουν)은 음식과 연관되어 사용되기도 합니다. 주님은 천사가 도와줄 것을 기대하며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는 것을 거부하는 대신 지금은 그 천사들이 수종들고 있습니다. 주님은 세상 나라를 상속 받기 위하여 지름길을 택하려는 유혹을 물리치셨지만 오히려 자신의 사역을 시작하여 성경의 모든 사실을 성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온갖 시련들을 뼈 아프게 마치시기까지는 전혀 쉴 틈이 없으셨습니다. 즉 휴전도 없었다는 말입니다. 사탄이 주님을 떠난 것은 잠시동안 뿐이라고 덧붙인 것처럼 그리스도의 나머지 생활도 이런 시련속에서 헤어날 틈이 없었습니다.
예수는 십자가에서 사탄과의 마지막 대 혈전을 벌리셨습니다. 그의 머리는 가시관에 찔려서 선지피가 줄줄이 쏟아졌습니다. 손과 발에는 쇠못이 박혀서 그 상처는 영원히 남았습니다. 이미 잠든 예수의 옆구리를 군병들이 창으로 찌르니 피와 물이 쏟아졌습니다.
이 싸움은 예수님의 패배로 끝난듯 합니다. 하늘은 세 시간 동안이나 빛을 잃었고 사탄의 환호성은 온 세상에 울려 퍼졌습니다. 주님의 시체는 요셉의 무덤에 묻혔고 군병들이 그 시체를 지켰습니다.
안식후 이튿날 주님은 무덤을 깨뜨리셨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를 다시 살리사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부활의 첫 열매로서 모든 죽은 자들을 살려주는 영이 되셨습니다.
주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도, 그리고 무덤에서 부활하실 때에도 천사들은 주님께 수종 들었습니다. 구원은 승리자에게 주신 생명의 면류관입니다. 진리의 싸움에서, 모든 사탄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는 자들에게 천사들은 떠나지 않고 영원히 그를 수종듭니다.
예수님이 전도하신 초기에 세가지로 유혹하던 사탄은 그리스도의 생애동안 계속 같은 방법으로 유혹해 왔습니다. 마지막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도 이 세 가지의 유혹이 그를 습격했습니다. 천사들은 예수님과 사탄 사이의 싸움을 목격했습니다. 그리고 최후의 승리를 지켜보며 하늘의 팡파레를 울린 것도 천사들입니다.
우리들의 생애에도 사탄의 유혹은 이 세 가지 방법으로 다가옵니다. 우리의 모든 싸움의 과정을 천사들이 지켜볼 것입니다(히 12:1). 우리가 승리하고 사탄이 물러갈 때에는 우리도 천사들을 볼게 될 것입니다. 천사를 보게 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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