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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배고픈 사람들 (요 04:2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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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금요 심야 기도회 시간에 요한복음 6장에 있는 말씀을 통하여 인간이 느끼는 배고픔에는 육신적인 배고픔(가난함)과 영적인 배고픔이 있고 주님께서 사람들의 영,육의 배고픔을 채우시기 위해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셨다는 말씀을 상고하였습니다.
오늘은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말씀으로 배고픈 사람들에 대한 두 번째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주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것은 육신적으로 가난하고 배고픈 사람들을 은혜로 돌아본 축복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단순히 물질적인 굶주림만 해결해 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배고픈 사람들에게 육신의 양식을 공급해 주심으로서 자신이 하늘로서 내려온 참 떡으로 인생들에게 참 된 영적 양식이 된다는 사실을 교훈해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왜냐면 인간은 육신의 양식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하늘 양식을 먹어야 하는 영적 배고픔이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6:35절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영적 양식을 먹어야 하는 영적 존재인 것은 깨닫지 못하고 삽니다. 그저 단지 세상에서 육신적으로 부족함이 없으면 된다고 생각하고 육신적이고 물질적인 것만 추구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서 성경은 계시록 3:17절에서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영적인 깊은 아픔과 갈급함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저마다 “나는 부자다. 부족한 것이 없다” 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신들에게 영적 배고픔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삽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라고 말씀합니다. (막10:21)
그 부족한 한 가지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네 자신의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 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계3:17)
이것은 영적인 모습입니다. 자신의 영적인 모습을 바로 볼 줄 모르는 것은 큰 불행입니다. 육신적인 쾌락에 빠져 영적인 곤고를 느끼지 못합니다. 세상적인 자기 만족에 빠져 영적인 빈곤과 가난함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러한 사람들에게 계시록 3:18절에서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감에 있어서 육신의 배부름보다 더 급하게 채워야 할 배고픔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영혼의 소중함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영혼의 배고픔도 느끼지 못합니다.
어느 마을이 적군의 습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적의 습격을 피해서 가장 소중한 물건과 먹을 식량만을 지니고 산속 동굴로 피신을 했습니다. 적군이 마을에 들어와 보니 마을은 텅비어 있었습니다.
적군들은 마을을 다 털고 불을 지르고 그리고 마을 사람들이 피신한 산으로 가서 샅샅이 뒤졌습니다. 드디어 나뭇가지로 동굴 입구를 막아 놓은 그 곳에 이르렀습니다. 그 곳에 사람들이 숨어 있는 것을 발견하곤 전부 죽이려 하다가 그래도 아녀자들만은 살려 주자고 했습니다.
아녀자들이 나갈 때 가장 소중한 물건 하나씩을 가지고 나가도록 허용하였습니다. 동굴 안은 부부간에 서로 얼싸안고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밖에서는 시간을 정해 놓고 빨리 나가지 않으면 다 죽여 버리겠다고 호통을 쳐댑니다. 드디어 아녀자들은 돌아서지 않는 발길을 돌려 가장 값진 것들을 하나씩 들고 남편과 이별을 고했습니다.
어떤 이는 결혼 반지, 어떤 이는 시계, 어떤 이는 보석 목걸이를 딱 하나씩만 가지고 나가야 했습니다. 모든 아녀자들이 다 나갔습니다. "이제 다른 부인은 없는가" 하고 밖에서 적들이 소리를 쳤습니다.
그때 제일 나중에 한 여인이 힘겹게 한 물건을 등에 지고 나왔습니다. "이게 뭔가" 적장이 소리쳤습니다. "나에게 가장 소중한 물건이오. 당신이 가장 소중한 것 하나씩만 가지고 가는 것을 허용한다고 하기에 나는 내 남편을 골랐소"
적장은 할 말을 잃고 남편을 등에 업고 비틀거리며 유유히 동굴을 빠져나가는 그녀를 감동적으로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우리들에게 진정으로 소중한 것은 무엇일까요 가장 소중한 것들을 놓치고 엉뚱한 곳에 매달려 일생을 탕진하며 행복하지 못한 삶을 살고 있지나 않는지요.

다섯 남편을 둔 여인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영적 배고픔을 채우기 위해 방황하는 한 여인을 보게 됩니다. 그녀는 다섯 남자와 살았던 화려한 경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 함께 살고 있는 남편도 그의 남편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는 무엇에든 만족이 없었습니다.
이 여인은 사마리아 출신입니다. 그리고 다섯 명의 남자를 남편으로 두었었고, 지금 함께 살고 있는 남자도 자기 남편이 아닌 다른 사람의 남편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여인이 행실이 바르지 않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다섯 명의 남편, 그들 모두가 죽었다고는 상식적으로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말합니까 이 여인은 언제나 심령이 목말랐습니다. 그런데 자신도 무엇이 목마른지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세상 것으로 심령의 목마름과 배고픔을 채우려 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지는 않지만 우리는 본문을 가지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첫 번째 남편은 돈이 많은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살다 보니 사람이 돈만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만족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첫 남편을 버리고 두 번째로 권세가 있는 남편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도 역시 이 여인에게 참 기쁨을 줄 수가 없었습니다. 또 이 여인은 훤칠한 키에 멋지게 생긴 미남도 얻어 보았지만 별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남편을 다섯 번이나 바꾸었습니다.
사람이란 언제나 멀리 볼 때는 훌륭하게 보이고 멋지게 보이지만 가까이서 대하면 그의 약점도 보이고 흠도 보이는 법입니다. 문제는 사람을 보는 어떤 눈을 가졌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사람을 보는 눈을 바로 가져야 합니다. 이왕이면 좋은 점을 보고 예쁘지 않아도 예쁘게 보아주는 은혜로운 눈을 가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 사마리아 수가성의 여인은 도저히 만족할 줄 모르는 욕심을 가진 여인이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영혼의 만족을 세상적인 것에서 얻으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수가성 마을 어귀에 있는 동네 공동 우물로 매일 물을 길으러 왔습니다. 그는 생각했습니다. 왜 매일 물을 길으러 와야 하는가 한번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물은 없을까 그러나 그가 지금 까지 찾은 우물은 먹어도 마셔도 그의 배고픔과 영적 갈증을 채워주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 우물가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주님은 이 여인이 무엇 때문에 갈급한지 이미 아시고 계셨습니다. 세상에서 따돌림받으며 사람들이 물 길러 오지 않는 한 낮에 사람들의 눈을 피해 물길러 나온 이 여인의 갈급함이 무엇인지 아시고 그에게 다가가셨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물 한 그릇을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주님의 요청에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 사마리아 여자인 내게 물을 달라고 하는가” 쉽게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못하는 여인의 상처받은 영혼을 볼 수가 있습니다. 순간적으로 여인은 자기를 방어하고 있습니다.
아픔이 많고 상처가 많은 사람일 수록 피해 의식이 있고 다른 사람에게 쉽게 마음을 열지 않습니다. 혹시 저 사람이 내게 또 피해를 주는 것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서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접근해 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본능적으로 자기를 방어하게 됩니다. 이러한 사람에게는 주님의 위로와 은혜가 필요합니다. 바로 이 여인이 그러한 모습입니다.
주님은 요4:10절에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그리고 요한복음4:13-14절에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이 말씀에 여인은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여인은 매일 같이 야곱의 우물로 물을 길으러 나왔습니다. 언제나 마셔도 흡족함이 없는 물이었으나 그러나 매일 같이 그 물을 마셔야 했습니다.

야곱의 우물
이 물은 무엇입니까 이 여자가 매일 같이 물길으러 왔던 우물을 말합니다.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것, 물질적인 것, 세상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것들은 얻으면 더 얻고 싶고 누리면 누릴수록 더 누리고 싶습니다. 먹어도 마셔도 배부름이나 만족함이 없는 물입니다.
사실 이 여인의 생활을 보아도 잘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육신의 쾌락을 누리기 위해 이 남편 저 남편 다 얻어 보았지만 여전히 만족이 없었기에 지금도 남의 남편과 살고 있는 그런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목마르고 배가 고팠습니다. 우리의 육신이 마실 불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심령의 물과 양식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육신이 마실 물과 양식이 없으면 살 수 없는 것처럼 우리의 심령은 생명의 물 생명의 양식이 필요합니다.
주님이 주는 물
주님께서 여인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에 대해 들려주실 때 주님의 말씀은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한 말씀이었습니다. 세상에서 얻을 수 없었던 그 무엇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여자는 주님께 그런 물이 있다면 내게도 달라고 하였습니다.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요4:15)
그런데 주님은 이 여자에게 엉뚱한 요구를 하십니다. 네 남편을 데려오라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 까요 주님이 이 여인에게 주고자 하는 물은 영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그 여인은 자신의 갈급함이 영적인 문제인 줄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요4:15) 라는 이 말속에서 이 여인은 단지 매일 같이 물길으러 나오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되도록 목마르지 않는 그 물을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남편을 데려오라는 주님의 요구에 여인은 자기를 감추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거짓말을 했습니다. 자기는 남편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기를 감추고 싶어하는 그의 마음을 아시고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요4:18)
그때서야 이 여인은 깜짝 놀랍니다. 이 분이 누구이기에 자기의 과거를 아는가 자신도 알지 못하던 자기의 방황의 원인을 밝혀 주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은 것입니다. 이 여인은 비로소 자기 앞에 서 있는 분이 자신의 영혼의 갈급함을 채울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요4:19)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주님은 자신이 바로 생명의 물을 주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이심을 밝히셨습니다. 요4:25에서 여자가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라고 말할 때 예수께서 “내가 그로라” (요4:26)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여인은 물동이를 내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동네 사람들에게 외칩니다. (요4:29)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그렇습니다. 이 여인이 외친 것처럼 주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에게 영생의 물을 주시는 구원자 예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심령의 배고픔을 채우실 수 있는 생명의 떡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6:35)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만이 인간들에게 참 생명을 줄 수 있고 더욱 풍성하게 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0:10절에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이 시간도 주님께서 요6:27절에서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우리가 예수를 영접할 때 두 가지 현상이 있습니다. 하나는 인생의 새로운 만족이 있습니다.
또 하나는 인생의 끝 날이 와도 두려움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인생의 새로운 만족을 찾았습니다. 그의 갈급한 심령이 예수를 영접한 것입니다. 그후로 영혼의 배고픔이 사라졌습니다. 두려움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는 동네에 나가서 담대히 외쳤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러한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까
주님께로 나아 와야 합니다.
루이스(C.S.Lewis)의 "엄청난 이혼" (The Great Divorce)이라는 우화적인 작품이 있습니다.
내용에는 지옥의 장면들을 그리고 있습니다. 뜨겁고 날마다 비가 오고 언제나 어두운 거리입니다.
하루도 거기에 살고 싶지 않은 환경입니다. 그런데 빛나는 천국으로 옮겨갈 수 있는 방법을 하나님이 마련하셨습니다. 천국으로 정기 버스(Shuttle Bus)를 운행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 버스는 시간마다 떠나기 때문에 기회는 자주 있습니다. 그리고 요금도 무료이기 때문에 누구나 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천국행 버스를 타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버스 정거장에 시간 맞추어 나옵니다. 그러나 버스에 올라타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정거장에 나와 버스를 바라보며 생각합니다.
“저쪽으로 가면 못할 일이 많아진다. 남의 흉을 보던 즐거움도 없어진다. 약간의 재주로 어리석은 인간들의 박수를 받고 보스 노릇할 만족도 없어진다. 지위 노름(status game)이 거기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자랑할 수도 없고 으시댈 수도 없는 그 곳에 무엇 때문에 가는가”......
그래서 그들은 일주일에 한번쯤 정거장에만 나왔다가 버스는 타지 않는 일을 오래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들에게 한 가지 예고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정기 버스가 운행 중지 되는 날이 며칠 남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이사야 55:1절 말씀에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은혜가 약속되어 있어도 주님께로 나가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루이스의 우화에 나오는 내용처럼 예수로 말미암아 천국갈 수 있는 길이 얼마든지 열려 있어도 구경만 하고 있어서는 소용이 없습니다.
구원의 주님께로 나와야 합니다. 주님은 “너희 목마른 자들아 돈 없이 값없이 나오라”고 했습니다. 돈 없이 값없이 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무엇이든 가지지 말고, 내세우지 말고, 자랑하지 말고 ,공로 없이, 그저 빈손 들고 주님께로 오기만 하면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빈손 들고 앞에가 십자가를 붙드네
의가 없는 자라도 도와주심 바라고
생명 샘에 나가니 맘을 씻어 주소서
찬송가 188장 3절의 가사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이 사회적으로 지위가 있고 학벌이 있는 사람만 생명의 떡을 주신다고 했다면 우리는 다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누구든지 심령의 배고픈 것을 알고 주님께 오기만 하면 심령의 배부름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시간 주님께서 배고픈 우리 심령에 만족함을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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