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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출 34:1-9, 고전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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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우리 성도들 모두가 사랑의 사람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예수 그리스도도 사랑이시고 성령께서도 사랑을 주셔서 사랑의 열매를 맺게하시니 또한 우리도 사랑의 사람이 되는 것이 마땅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여러분에게 사랑의 사람이라고 한다면 기분이 좋을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치고 이 말을 싫어할 사람은 없겠지요. 하지만 사랑의 사람이 되는 것은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흔히 잘못 사랑에 대하여 알고있는 것이 있습니다. 사랑은 저절로 감정에서 우러나오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꽃을 보고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처럼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 나타나면 사랑은 저절로 되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내가 사랑하지 않는 것은 그만한 대상이 없어서라고 단정합니다. 연속극에 나오는 그런 멋있는 남자 영화에 나오는 그런 예쁜 여자를 만나면 사랑의 감정이 동할 것이고 그러면 저절로 사랑은 되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대상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랑은 신앙의 문제요 훈련의 문제인 것입니다. 영화나 연속극에 나오는 사랑이야기는 진정한 사랑을 다루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감정에 기초한 허구일 뿐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은 진정한 사랑은 무었인가에 대하여 우리에게 교훈하여 줍니다. 우리는 지난 주일에 사랑의 중요성에 대하여 들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도 희망하는 방언, 천사의 말, 모든 것을 통달하는 예언, 산을 옮길만한 믿음,모든 것을 나누어 주고, 내 몸을 순교의 제물로 내어 놓는 희생을 한다고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의 두 번째 부분은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의 본능적인 생활 관습과 어떻게 다른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으로서 우리의 본능적인 행동과는 다른 것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라고 하였습니다. 인내와 온유-이 두 긍정적인 말은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동시에 그 다음에 나오는 여덟 가지의 부정적인 것들은 어떤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 아님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인내와 온유" 이 두 말이 하나님의 사랑을 요약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배움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이 두 가지 성품을 먼저 배우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우리의 생활 속에 인내와 온유가 자리잡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사랑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사랑은 어떤 대단한 일 즉 천사의 말을 하거나 예언을 하거나 산을 옮기거나 자기 몸을 불사르도록 내어 주는 일을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래 참고 온유하게 행동하는데 있음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룩해 가시는 모든 구원의 역사가 바로 이 사랑을 바탕으로 했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우리가 오늘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할 일은 먼저 인내와 온유함을 배우는 일이 될 것입니다. 오늘은 그 중에서도 인내에 대해서 함께 생각을 해보고자 합니다.

인내의 어려움

우리는 먼저 인내라는 말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파나마의 벨리엔테족은 “인내”를 ‘그 성질을 잡아서 앉아있게 하는 것’이라는 말로 사용을 한답니다. 그리고 마야족은 ‘넘어지지 않는 힘’을 “인내”의 뜻으로 사용을 합니다.
"인내"라는 희랍어는 "끓이는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어로는 "오래 고통을 받는다"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오래 참는다는 것은 고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에게 오래 참는다는 것은 더욱 큰 고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중에서도 우리 한국인들에게 더욱 큰 고통입니다. 동남아에서 한국인들의 별명은 "빨리빨리"입니다. 우리는 근대화 과정에서 서두르다 보니 인내심이 부족하게 되었나 봅니다.
어떤 사람이 점을 치러 갔습니다. 복채를 주고서는 언제 나도 잘 살게 되겠느냐고 하니 점쟁이가 점을 쳐보더니 20년 뒤에 잘 살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 사람은 기분이 좋은 것이 아니라 다시 복채를 달라고 햇답니다. 당장 좋아지고 길어도 몇년 내로 좋아져야지 어떻게 20년을 기다리느냐 인 것입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번갯불에 콩볶아 먹는다는 말이 있고, 우물에 가서 숭늉을 달라고 하고 콩밭에 가서 두부를 달라고 한다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얼마나 참지 못하는 속성을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가를 보게 됩니다.
자동차를 타고 다니다 보면 나도 모르게 서두르게 되고 앞차가 조금만 지체하면 참지 못하고 경적을 울려 대는 것입니다. 이런 인내심의 부족은 결국 우리에게 사랑이 없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참아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소한 실수에 대해서도 용납하지 못하는 것은 철저한 성격에 기인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결국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부족한 현대인들에게 다른 사람의 과오에 대해 너그럽게 대하며, 오래 참으라고 하는 것은 큰 형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떤 목사님의 고백입니다. 그분은 참으로 훌륭하신 목사님이신데 자신을 가만히 돌아볼 때 인내심이 부족함을 느낀다고 합니다. 10년 가까이 주일 저녁이나 수요일 저녁이면 찾아와서 용돈을 가져간 고등학교 동창이 있었습니다. 사업에 실패하고 가정도 파탄이 되어 완전히 오갈데 없는 신세가 되어 동창들을 찾아다니며 그날 그날을 연명해 가는 친구였습니다. 10년 동안 그 얼굴을 대할 때마다 화가 치밀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목사님은 그 친구를 통하여 자신이 얼마나 사랑이 부족한 자인가를 확인하여야만 했습니다. 그러던 그 친구가 지난 성탄절 아침에 귤 한 상자를 가지고 찾아 왔었답니다. 지금은 의정부 어느 양계장에서 일을 하고 있다면서 신세를 갚겠다고 하였을 때는 목사님이 오히려 쑥스러움을 느꼈답니다. 전에 좀 더 참고서 사랑으로 대해주지 못했던 것이 아쉬웠기 때문이지요.
성경은 이렇게 사랑하기 어려운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고 하였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4절에는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고하였습니다. 결국 이런 인내심은 우리 속에서 우러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려 주실 때만 오래 참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죄악에 대하여 오래 참으시는 분입니다.
노아가 방주를 지을 때 하나님은 그 인간의 죄악에 대해 오래 참으셨습니다. 노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외친지 120년 뒤에야 홍수로 심판을 내리셨던 것입니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너무 오래 참으신다고 오히려 화를 냈습니다. 악독한 성읍인 니느웨를 바로 멸망시키지 아니하시고 참으시는 하나님이 못마땅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바로 이 참으심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간의 죄악에 대하여 참으심을 보고 그의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

오늘 읽어 드린 출애굽기 말씀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출34:6)고하였습니다. 하나님은 히브리였던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시어 시내산에서 그들과 계약을 체결하시므로 그들을 자기의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백성이었습니다. 하나님과 맺은 계약에 충실하지 못했고, 그를 떠나 우상에게로 갔으며, 감사와 찬양 대신 불평과 원망으로 하나님을 거역한 백성이었습니다. 모세는 이런 이스라엘의 배반을 참지 못하고 그가 하나님께로 부터 받은 십계명 돌판을 던져 깨뜨리면서 화를 냈습니다. 또 한번은 물이 없다고 원망하는 백성들 앞에서 반석을 두번 내리침으로 그의 인내심의 한계를 들어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백성을 끝까지 버리지 아니하시고 약속의 땅에 인도하여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계약에 충실하지 못하였지만 하나님은 그 계약에 신실하셔서 그들을 약속대로 가나안으로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그후 이스라엘의 역사는 계속적인 배반의 역사였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예언자들을 보내셔서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은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시어 인간들의 모든 죄악을 담당하게 하시므로 인간의 죄악에 대한 진노를 스스로에게 돌리셨던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끝없는 참으심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오래 참으심의 본을 통해 우리에게도 오래 참을 것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일본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인내심 있는 어떤 목사님이 한 노인에게 전도 엽서를 계속 보냈습니다. 처음 3년 동안은 아무 회답도 없었습니다. 목사님은 다시 3년 동안 봉함 편지를 꾸준히 보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아무 반응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목사님은 단념치 않고 더욱 정중하게 두루말이 종이에 붓으로 써서 보냈습니다. 역시 아무 반응이 없자 목사님은 마침내 그 노인을 직접 찾아 나섰습니다. 그러나 그는 크게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가보니 그가 이제까지 정성스럽게 보낸 편지들이 휴지가 되었거나 또는 가늘게 꼰 끈이 되어 담뱃대 청소에 쓰여지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의 방문을 받은 노인이 하는 말이 "그것 참, 담뱃대 청소에는 두루말이 종이가 아주 좋습디다"였습니다. 인내심이 많은 목사님도 이 말에는 화가 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속으로 다시 한번 생각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인내하심은 몇 천년도 더 기다리셨는데..."라고 생각하면서 돌아와서는 계속 그 노인에게 더욱 정성을 들여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것을 간곡하게 호소하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얼마가 지난 후 어느 주일에 말쑥하게 차린 노인이 그 목사님의 교회에 나타났습니다. 바로 그 노인이었습니다. 자기 고집과 오만함으로 굳게 닫혔던 그 노인의 마음 문이 목사님의 인내심과 깊은 사랑과 기도로 열렸던 것입니다.
오래 참으심과 자기 희생을 바탕으로 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구원이 성취된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인내로써 인간이 그 죄악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나올 것을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베드로후서의 말씀대로인 것입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3:9)

오래 참는다는 것의 의미

그러면 오래 참는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좀더 살펴보고자 합니다. 마태복음 18장에 예수님의 용서의 비유가 나와 있습니다. 베드로는 죄지은 자를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하는지를 알고 싶어서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일곱 번쯤이면 어떻겠느냐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일만달란트를 빚진 종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주인이 그를 불러서 빚을 갚으라고 하자 그가 엎드려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불쌍히 여겨 그의 빚을 탕감하여 주었습니다. 이 종은 궁에서 나오다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을 진 친구를 만났습니다. 친구가 그에게 사정하였습니다. "나를 참으소서. 갚으리이다." 그러나 그는 주인처럼 그의 빚을 탕감해 주는 대신 그를 옥에 가두었습니다. 주인이 이 말을 듣고 화가 나서 그 종을 다시 잡아들여 빚을 모두 갚을 때까지 감옥에 넣어 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래 참는다는 것은 결국 용서하는 마음과 결부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저지른 짓들을 용서할 마음이 없이는 오래 참을 수 없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아직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하여 회개하지 않았을 때에라도 나의 쪽에서 먼저 용서해 줄 용의가 있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 없을 때는 결국 상대방의 잘못에 대한 복수나 응징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자동차가 잔뜩 밀려 있을 때 짜증이 나게 마련입니다. 그럴 때 어떤 사람은 노래를 부른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노래를 문을 닫고 목청을 돋우어 노래를 부르면 짜증이 사라지고 오히려 기분이 좋아진다는 것입니다. 시간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노래를 부르면 지루하고 짜증스럽던 일이 사라지고 마음에 여유가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용서하는 마음이 바로 이와 같다고 하겠습니다. 상대방이 나에게 한 일에 대해 집착을 버리지 못할 때는 증오심 밖에 생길 것이 없지만 그 집착을 버릴 때 우리는 오히려 용서할 수 있고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오래 참음과 용서에는 나의 희생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용서하지 않는다고 해서 나의 손해가 줄어드는 것은 아닙니다. 손해본 것을 회복하려다가 마음에 더 큰상처를 입게 되고 돌이킬 수 없는 관계로 악화되어 버릴 것입니다.
북한과의 관계에 있어서 우리를 참을 수 없게 만드는 많은 도발과 억지와 생트집이 있지만 그럴수록 인내로 기다릴 수 있는 여유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북한의 도발로 우리가 많은 손해를 보지만 전부를 잃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인내로 저들이 돌아서기를 기다리며, 저들의 죄악을 용서해 줄 아량을 우리가 갖지 못하면 통일은 이루어지기 어려울 것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그것은 바로 용서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좀더 구체적인 우리 생활에 있어서 오래 참는다는 것은 노하기를 더디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잠언에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크게 명석하여도 마음이 조급한 자는 어리석음을 나타내느니라"(14:29), "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켜도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시비를 그치게 하느니라"(15:18),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16:32) 등의 말씀이 있습니다. 사랑은 어떤 거창한 자선이나 동정을 베풀기 이전에 다른 사람에 대하여 화를 내지 않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된다는 뜻입니다. 에베소서에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4:26)라고 하였습니다. 노함과 분냄은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버려야 할 옛사람의 구습인 것입니다. 한가지 더 오래 참는다는 것은 남의 말을 기꺼이 들어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사도행전 26장 3절에 아그립바왕 앞에 선 바울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특히 당신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및 문제를 아심이니이다. 그러므로 내 말을 너그러이 들으시기를 바라옵나이다." 사도 바울은 그에게 자신의 변명하는 말을 들어 달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남의 말을 듣는 일은 인내를 요구합니다. 사실 별로 마음에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과 앉아서 이야기 할 수 밖에 없을 때 인내심을 갖고 그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교회가 진정으로 사랑의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남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은 대단한 일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남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는데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한 부인이, 자기가 지금 정신 분석을 받고 있는 중이라고 말하자 교회에 다니는 친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에게는 그리스도인 친구들이 있지 않니 무슨 문제가 있다면 왜 그들에게 말하지 않는거지" 그러자 그녀가 대답했습니다. "그래, 네 말대로 그것이 나에게는 가장 필요한 일일 거야. 만일 그 친구들 중 단 하나라도 내 말을 들어만 준다면 말이야. 그렇지만 교회 친구들이 얼마나 재빠르게 나한테 등을 돌리고 자기들끼리만 말을 하는지 넌 모를 거다. 누가 내 말을 들어주는 대가로 그에게 돈을 지불하는 것은 좀 우습긴 하다만 50분이나 다른 데 신경 쓰지 않고 내 말을 들어주는 상대가 있다는 건 나에게 있어 아주 중요하단다."(A. L. McGinnis 사랑과 우정의 신비 P115)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은 거창한 일이 아닙니다. 아주 작은 일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 작은 일이 우리의 본성과는 거리가 있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할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역사 하실 때 그 열매가 열리는 것입니다. 이제 성령 충만함을 통하여 사랑의 인내를 열매로 맺으시기를 바랍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며, 용서하며, 남의 말을 기꺼이 들어주며, 남의 죄를 참아 줄 수 있는 사랑의 생활을 이루어 가시기 바랍니다.
특히 교회 안에서 무엇보다도 이와 같은 사랑의 인내가 절실히 요청됩니다. 우리 모두가 금년에는 인내를 신앙의 목표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는 것임을 기억하시면서 모든 신앙의 생활을 이 사랑 위에 세워 가시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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