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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긍휼과 자비 (마 18: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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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긍휼에 대한 인간적 한계
(마18: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 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A.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예수님의 가르침은 베드로의 용서에 대한 질문으로 계속됩니다.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이라는 베드로의 질문은 당시 유대 문화에 있어서는 있을 수 없는 상식 이하의 질문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용서의 개념은 이미 역사 속에서 시행되어 왔으며 또한 상례화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의 용서의 범위는 세 번까지로 한정되어 있습니다. 성경적으로 하나님께서 네 번까지 언급하셨기에 하나님의 용서의 범위를 초과할 수 없다는 것이 랍비들의 가르침이었습니다. (참조 암1:3-11)
유대주의적 문화에 익숙한 베드로 역시 구약의 전승과 랍비들의 가르침, 역사성을 갖기에 용서의 범위가 설정되어 있었습니다.
나름대로 성실하게 말씀 중심으로 살아왔기에 적어도 용서에 대한 견해만큼은 새롭게 교훈 받을 하등의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질문이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인간의 의지와 사고를 초월한다는 사실입니다. 유대주의적 신앙관에 투철했던 베드로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 질문하는 그의 신앙을 모든 성도는 본받아야 합니다. 많은 성도들이 자신의 의지와 생각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삶으로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B. 일곱 번 까지 하오리까
‘일곱 번 까지 하오리까’라는 베드로의 용서에 대한 견해는 획기적인 제안이었습니다. 세 번까지만이 용납되던 용서의 개념이 베드로에게 처음으로 자신을 초월하는 범위로 확산되었기 때문입니다. 유대 문화의 관습을 따른다면 베드로는 일곱 번 까지라는 제안으로 인하여 충분히 돌에 맞아 죽을 수 있는 충분한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죄없는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그들이었기에 신을 모독한 베드로는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일곱 번까지 용서하겠다는 베드로의 견해는 그의 위대한 신앙관을 대변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제한적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아니기에 완벽할 수 없습니다. 율법을 초월하는 베드로의 제안이었지만 그의 제안 역시 인간적입니다. 믿음이 확고한 베드로 였지만 인간이기에 한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II. 무한해야 할 성도의 긍휼
(마18: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번 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A. 일곱 번뿐만 아니라
베드로의 일곱 번까지의 제안은 그리스도에 의해 즉각적으로 제지됩니다. 일곱이라는 숫자는 베드로에게 있어서 최대의 수이며 완전 수이지만 주님께는 지극히 부분적인 숫자입니다. 베드로는 일곱이라는 숫자를 정해 놓고 그것을 최선의 행위로 간주합니다.가인이 형편없는 제사를 드리고도 하나님께서 열납하시기를 기대하는 것처럼 인간은 무시로 하나님을 제한시킵니다. 인간의 행위를 하나님의 행위인양 합리화시킵니다. 베드로의 일곱이라는 관념은 모든 인간의 관념입니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시야로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부분적인 견해로 하나님을 제한시킵니다. 이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견해를 가지고 주님을 축소시키려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절대로 초라한 하나님이 아닙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시요 완전한 분이기에 인간의 시야로 제한 당하지 않으십니다. 베드로의 일곱 번이라는 발상은 자신을 모르는 극치의 발상이었습니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 7:3)는 말씀처럼 모든 사람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남의 허물을 가차없이 들추어내려 합니다. ‘일곱 번뿐만이 아니라’는 주님의 교훈은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마 7:4)는 권면의 말씀입니다.
B.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베드로를 향하시는 주님의 견해는 무제한적인 용서입니다. 제한적 용서를 구수했던 유대인의 전통이나 랍비들의 가르침과는 달리 횟수에 상관없는 용서가 주님의 방법이었습니다.
이전에 이미 베드로를 향하여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눅 7:47)라고 말씀하신 주님은 이제 용서에 대한 완전한 방법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를 막론하고 용서하기보다는 용서받기를 좋아합니다. 일곱 번까지라는 한정된 용서는 인간의 일반적인 용서 방법입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방법이 곧 그리스도인의 용서의 방법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할 수만 있으면 많은 죄를 사하여 주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III. 성도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긍휼
A. 용서받을 자인 인간
인간의 삶은 아담 이래로 타락한 생활로서 역사와 더불어 죄악의 옷을 입고 살아왔습니다. 앞으로도 수많은 죄악과 더불어 살아갈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이 오늘도 죄성을 망각하고 자신의 우매한 성결을 내세우려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자기 눈의 티도 볼 수 없는 자가 인간이라는 점입니다.
죄된 인간은 남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자격을 이미 상실한 자들입니다. 이러한 인간에게 주님께서는 오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네 죄사함을 얻었느니라’ (눅 7:48)
이제 인간은 자신을 돌아보아 허물을 덮어 주고 상처를 치료하며 죄악을 용서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용서받지 못할 자가 용서함을 받았기에 빚진 자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죄사함을 허락하신 그리스도의 뜻인 것입니다.
B. 하나님의 긍휼
꽃은 뿌리에서 잘려 나가는 순간 이미 죽은 것입니다. 그 꽃이 화병에 꽂혀 아름답게 장식이 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즐겁게 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미 죽은 꽃을 보고 아름답다고 경탄합니다. 꽃이 이미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은 사실을 망각합니다. 인간은 꽃과 같은 존재입니다.
인간은 에덴 동산에서 추방된 순간 이미 죽은 존재입니다. 꽃은 모든 삶은 근원을 뿌리로 합니다. 인간의 삶의 근원은 에덴에 있습니다. 그 에덴이 인간의 타락으로 인하여 인간으로부터 멀어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시기에 타락한 존재인 인간을 존재에의 삶으로 유보시켜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돌 감람나무는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는 순간 참감람나무에로의 새로운 삶을 살아갑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돌 감람나무인 인간에게 참 감람나무이신 그리스도를 허락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이미 죽었던 자들을 살리시는 은혜, 사랑하는 독생자를 죄인에게 허락하신 은혜, 그 사랑이 우리를 살게 하신 것입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사랑하고 용서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용서가 오늘 우리의 용서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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