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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차별이 없는 사랑 (약 0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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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시장에 가서 물건을 삽니다. 예를 들어 옷을 산다고 하면 형편이 나은 사람 같으면 몇 십만 원하는 옷을 살 것이며 가난한 사람이면 몇 만원 내지는 그것도 없으면 몇 천 원 짜리 옷을 사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비싼 옷은 좋은 옷이요 싸구려 옷은 나쁜 옷으로 생각합니다. 시장 경제에서는 가치가 가격으로 결정이 됩니다. 요즘처럼 배추 값이 비싸면 김치를 맛있게 먹다가도 밭에서 배추가 썩어 가면 김치 맛도 떨어지고 맙니다.
이렇게 자본주의가 왜곡되어 발전하다보니 사람도 돈으로 환산이 되는 시대가되었습니다. 학벌과 인물과 직장에 따라 가격이 다르게 책정이 됩니다.
교통사고를 당해서 똑같이 죽어도 보상금이 다르게 나옵니다. 남자가 장가를 들려고 해도 상품 가치에 따라 엄청나게 차이가 납니다. 며칠 전의 신문을 보니까 의사가 자기 아내와 장모를 구타했다는 구석기사가 있었습니다. 혼숫감을 1억 5천만 원어치를 해왔는데 너무 적다고 아내를 때렸다는 것입니다. 옆에서 장모가 말리니 장모도 때렸다는 것입니다. 의사라고 하는 직업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을 하고 자기의 값을 너무 낮게 보았다고 생각해서 이렇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총각은 혼숫감 다 준비해놓고 그냥 빈손으로 오라고 해도 오지를 않아서 말도 통하지 않는 만주 처녀를 아내로 데리고 살아야 되는 현실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값이 안 나가는 것이지요.
남녀가 사랑을 해도 낭만적으로 만나서 사귀는 것이 아니라 상품의 가치를 보고서 사랑에 빠집니다. 여기서는 잠재력까지 따지는데 진행 중에 타산이 안 맞으면 언제라도 그만 두고 맙니다. 그래서 돈이 양반이라고 하는 말이 생겨날 정도입니다. 친구 관계,거래 관계에서도 그 사람의 돈으로 환산되는 상품의 가치를 중시합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 생각이 온통 돈으로만, 계산 속으로만 가득 차게 되고 말았습니다. 모든 것을 돈과 연관을 시켜서 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절에 다녀본 분들이나 무당에게 굿을 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공을 들이는 것과 돈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소원의 내용에 따라 액수가 달라집니다. 그러니 가난한 사람이 죽을 사람 살리는 굿 한 번 하려면 재산이 거덜이 나게 되는 것입니다. 불행한 것은 이런 자본주의의 모든 것을 돈으로 환산하는 의식이 서서히 교회로 들어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그것을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합니다. 사실 교회를 건축하고 땅을 구입하고 하는 교회의 입장에서는 대금 결재 일이 다가오고 있는 상황에서 돈이 얼마큼 절실하게 요구되는가 하는 것은 당해보지 않는 경우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 때 돈이 많은 사람이 등록이라도 한다면 구세주를 만난 것처럼 기쁠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오히려 도와주어야할 사람이 등록을 한다면 별로로 생각을 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오늘 성경에서 야고보는 이런 예를 들어 성도들에게 권고합니다. "만일 너희 교회에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아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 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 밑에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야고보가 이런 말을 한 것은 당시에 이런 일이 교회에서 일어났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초대교회에서는 행 2:44-47>"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이렇게 모두가 공평하게 대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세월이 조금 지난 때에 사람을 차별하는 일이 있었던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하여 배워야 할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1.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아야 합니다.
약 2:1>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오늘 성경은 우리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 것을 권고하면서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의 본체로서 죄악 되고 비천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비천한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셔서 죄인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아낌없이 내어주사 비천한 자들을 존귀케 하셨습니다. 기독교는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바탕 위에 탄생하였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사람을 외모로 취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멸시하는 것이요. 죄인들을 위해 비천한 자리까지 낮아지신 그리스도 자체를 멸시하는 것이 됩니다. 사람의 됨됨이는 오랜 세월을 통하여서 형성이 됩니다. 거기에 비해서 사람의 외모는 즉시 꾸미거나 변경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즉시 꾸미고 변경할 수 있는 외모를 보고서 사람을 평가한 다는 것은 잘못할 가능성이 많은 것입니다.
삭개오는 키가 작은 사람이었으나 솔직 담백함과 주님에 대한 열정 때문에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사울은 용모가 준수하고 키가 장대한 사람이었으나 내적 부실 때문에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의 가치는 결코 그 사람의 외모에 있지 않습니다. 바울 사도는 아마 오늘날 같았으면 교회에도 초빙을 받지 못하였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는 키가 작았습니다. 그는 바세도우씨 병 때문에 눈이 튀어 나왔다고 합니다. 그는 가벼운 간질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말을 아주 못했습니다. 의사인 누가가 항상 그를 돌보아 주어야 할만큼 그는 병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역사를 바꾸었습니다. 오늘 날의 세갹를 만들어내는 위인이 되었습니다. 그가 없는 기독교는 생각할 수도 없을 만큼 그의 영향력은 큽니다.
사람의 외모와 내면의 인격은 일치하지 않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음직도하고 보암직도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였으나 그 속에는 전 인류를 파멸시키는 독소를 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 인류를 그 죄악에서 구원하실 예수 그리스도는 사 53:2>-`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라고 하였지만 하나님의 영광과 자기백성들의 구원을 위해 목숨을 버리기까지 하시는 절대적인 사랑과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시는'영원한 인내가 그 형편없는 외모 속에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전지 전능하시므로 정확하게 보시지만 사람은 불완전함으로 야고보는 사람을 대하거나 평가할 때 믿음 안에서 사랑으로 대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서 놀라우신 하나님의 섭리를 보게 됩니다. 그것은 본문 5절에 있는 말씀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 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들을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
고전1:26-29>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 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자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내놓을 것이 없는 지극히 작은 것들을 가지고 형제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행위를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모두가 다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여기에는 차별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의 몸이 아무 곳이나 상처가 나면 온 몸이 괴로움을 느낍니다. 마찬가지로 한 형제라도 마음에 상처를 받으면 주님의 몸이 아픈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이를 근심하십니다. 우리는 주님을 아프게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2.외모로 판단하여 차별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난 죄가 됩니다.
8절`너희가 만일 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9절-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
형제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행위는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죄악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사람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그 기준을 외모에 두는 것이 사실입니다.하지만 이것은 올바른 기준, 올바른 자세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겉모양이 아니라 속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게 된 것도 외모로 그 분을 평가했다는데 그 까닭이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그리스도의 모습은 가난한 목수일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자신들이 그토록 기다렸던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박고 만 것입니다.
우리는 한 사람의 외모로가 아닌 그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는 존귀한 존재로 받아들이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외모보다는 내면을 잘 가꾸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벧전 3:3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서 갚진 것이니라.
예수님께서는 절대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를 선택하실 때에도 당시 사회적인 기준으로 인정받지 못한 자들을 부르셔서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로 삼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주변에는 항상 세리. 창녀. 죄인. 병자들이 들끌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신 것입니다.
사람의 외모를 보고 멸시하고 차별하는 것은 죄악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자를 우리가 멀리하는 잘못을 범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3.사랑을 베푸는 사람이 됩시다.
13절-긍휼을 행하지 않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여기에서 긍휼은 자비 또는 사랑을 말합니다. 우리가 할 일은 판단하고 차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베푸는 일인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사랑을 베풀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심판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사랑을 베풀면 그 사랑이 나에게 돌아오게 되어 잇습니다. 더욱이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께로부터 사랑을 받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마태복음 25:31-46의 말씀을 보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바로 주님께 한 것이라고하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가르치셨습니다. 여러분이 은연 중에 함부로 대했던 그 사람이 바로 주님이시고 나중에 주님의 영광의 보좌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가 안다면 내가 대하는 모든 사람에게 선을 베푸는 것이 중요한 일인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교회로 성장해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차별이 없는 사랑이 풍성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주의 전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그 보금자리를 얻었다는 말씀처럼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과 형제의 사랑과 자신을 용납하는 삶의 놀라운 은혜가 늘 있어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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