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가장 큰 계명 (마 22:34-40)

첨부 1


I. 하나님에 대한 사랑
마22: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A. 율법사의 질문
본문에서 율법사는 주님께 ‘선생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라는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성도들의 관심사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에 대한 모범적인 답안을 제시해 주는 질문입니다.
성도들 가운데는 예수님을 믿고 섬기는 목적이 그릇된 이들이 있습니다. 육체적 질병의 치유, 당면한 문제의 해결, 고통에서의 구원, 영생의 확보 등을 목적하고 주님을 찾는 자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이들의 목적하는 바가 무조건 그릇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예수님을 믿는 목적을 거기에 한정을 시키기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고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좀더 크고 근원적인 목적을 가져야 합니다.
B. 질문의 의도
본문에서 마태는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물었다고 했습니다. 언듯 보기에는 이 질문이 불순한 동기에서 나온 듯합니다. 그러나 마가의 표현을 빌면(막 12:28) 이 서기관은 예수께서 사두개인의 질문에 대답을 잘하시는 줄을 알고 물었다고 했습니다.
즉 이 서기관은 예수님을 참 스승으로 인정하고 당시 유대인들도 제대로 답을 주지 못했던 600여가지 모세의 계명 중 어느 계명이 으뜸이 되는 것인지를 진지하게 질문한 것입니다.
이러한 순수한 질문의 동기로 인해 서기관은 거기에 대한 예수님의 명확한 대답을 예수님께 들었으며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막12:34라는 칭찬까지 받고 돌아갔습니다.

C. 예수님의 대답
서기관에 대한 답변으로, 첫째 되는 계명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우리의 물질도 바치고 생애도 바치고 생명도 바치고 생각도 바치는 전폭적인 헌신이야말로 첫째 되는 계명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것, 좋은 것을 드릴지라도 그것이 우리의 전부가 아닌 일부분이라면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아무리 작은 것일지라도 정성이 담긴 그것을 기뻐하십니다.

II. 이웃에 대한 사랑
마22: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A. 이웃에 대한 사랑
예수께서는 이어서 둘째 계명으로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셨습니다. 이 계명에서 의미하는 이웃은 첫째, ’우리와 이웃해서 사는 자‘를 말합니다. 부모도 될 수 있고 형제도 될 수 있으며 한 동네의 사람, 직장동료도 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가장 많이 부딪히고 질투하고 다투는 상대가 사실은 가장 가까운 데서 생활하는 이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들과 다투어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실천은 가까운 이웃에서부터 시작이 되어야 합니다. 보는 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말이 되는 않는 소리이기 때문입니다.
B. 불우한 자에 대한 사랑
두 번째 성도들의 이웃은 불우한 처지에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께서는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라고 묻는 한 율법사에게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들려주며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겠느냐라고 반문하셨습니다. 그리고 율법사가 ‘자비를 베푼자니이다‘라고 답하자 ’가서 너도 이와 같이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성도가 만난 불우한 환경에 처한 자들은 그의 지위고하, 자신과의 관계 유무를 떠나서 무조건 이웃입니다. 그들을 저버리는 자는 하나님 나라의 가장 큰 계명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C. 원수에 대한 사랑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는 마5:44에서 원수를 성도의 이웃으로 지적하셨습니다.
세상에는 성도들을 헐뜯고 미워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애매히 미움을 받을 때 사람은 자연히 미움의 감정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러한 감정이 옳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오히려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롬12:20)’고 권면했습니다. 원수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지극히 사랑해야 할 대상입니다.주께서도 원수된 우리를 그처럼 사랑하셨습니다.

III.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
(마22: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A. 율법의 대강령
본문에서의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모두가 구약 율법의 인용입니다.(신6:5, 레19:18) 당시 유대인들은 율법을 가장 큰 자랑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을 자랑스럽게만 생각했지 율법이 무엇을 말하고 율법의 명령에 따라 자신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자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본문에서 보듯이 몇몇 양심 있고 의식 있는 자들이 그들을 향해 신물을 낼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율법의 대강령은 사랑입니다. 율법은 사랑의 정신에서 나왔습니다. 율법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서 나왔으며,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셨듯이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을 담고 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600여가지의 계명을 주었지만 그 모든 것은 사랑함으로서만 지킬 수 있는 것들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법조문만 있었고 사랑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박하와 근채, 회향의 십일조는 드리면서도 율법이 정하는바 더 중한 의와 인과 신은 버렸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그릇된 유대인들의 인식을 바로잡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사랑의 율법을 대강령으로 선포하신 것입니다.
B. 선지자의 대강령
유대인들의 또 하나의 자랑은 선지자였습니다. 선지자란 유대인들에게만 발견할 수 있는 독특한 자들로서 그들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버리고 죄를 범할 때마다 나타나서 그들의 죄악을 꾸짖고 하나님께 돌아와 화를 면할 것을 촉구한 자들입니다.
그들은 선지자들의 퇴락한 무덤을 다시 쌓고 비석을 다시 꾸밀 정도로 선지자들을 존경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했지만 실재로 그들의 가르침에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선지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의 정신에서 벗어나 의식적으로만 하나님을 경배하고 실생활에서는 가난한 자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상황에서 율법의 정신으로 돌아갈 것을 촉구하다 미움을 받아 순교했지만 유대인들은 그들의 선포에는 관심도 없이 그들의 위대한 죽음만을 자랑스럽게 여겼던 것입니다. 나아가 그들은 의인되시는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죽이는 죄까지 범하였습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