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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실패같은 성공 (고후 06: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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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은 누구나 성공의 삶을 원한다. 벤자민 플랭크린은 말하기를 "어떤 사람들은 성공이 하나의 병과 같이 되어 자나깨나 그것이 염두에서 떠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그것이 지나치면 "성공병 환자가 되어 대개 남의 성공을 시기하는 마음이 강하여 결국은 욕하고 중상모략하며 단숨에 2단 3 단을 뛰어 오르려는 욕심 때문에 성공하지 못한다."고 말하였다.
오늘 우리 사회 안에, 그리고 교회 안에서도 이러한 성공주의는 팽배하여 있다. 심하게 표현하면 모두들 성공병에 걸린 환자들 같다.

실패란 무엇이며 또 과연 무엇이 성공인가 개인적인 입장에서 보면 어떤 개인이 추구하던 목표가 이뤄지면 성공하였다고 말한다. 우리가 말하는 성공이란 과연 무엇인가1) 경제적인 면에서 사람들은 사업이 잘되고 물질적으로 부를 누릴 수 있을 때 성공하였다고 말한다.
2) 정치적으로 남을 다스리는 입장에 이르게 되면 성공하였다고 말한다.
3) 그 사람의 이름이 사회적으로 널리 알려 질 때 성공하였다고 말한다.

이 세가지 중에 어떤 경우든지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그러한 경지에 이르게 될 때 사람들은 말한다. "그 사람 성공했지! ......." 그러나 이런 것들은 그 사람의 외면적인 요소들에 불과하다. 요즘 북한 주석 김 일성이 죽은 후에 그를 향한 호칭과 더불어 조문여부 때문에 논란이 많은 줄 아는데 이렇게 보면 김 일성은 성공한 사람 같이 보인다. 그러나 그를 향하여 누가 과연 성공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사도 바울은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난 사람이다. 헬라 철학에 능통한 사람이고 유대종교에서는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다. 이러한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는 자기의 자랑하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살던지 죽던지 오직 그의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여김 받는 것을 크게 원하였다. 바울선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만을 자랑하다가 일생을 마친 사람이다.

바울의 생애를 통하여 볼 때 과연 그에게 성공이란 무엇인가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낸 두번째 편지 속에서 자기를 가리켜 '무명한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라고 말하고 있다. 바울의 승리와 성공은 역설적인데가 있다. 일반적으로 볼 때 그의 성공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바울의 고백에서 성공이란 무엇인가

바울이 지녔던 성공적인 사고를 우리가 이해한다고 하면 우리들도 성공적인 삶의 주인이 될 수가 있을 것이다. 적어도 바울 사도의 이와같은 고백은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결과로 보아야 한다.

바울은 먼저 "가난한 자 같으나 사실은 모든 것을 가졌다."고 말하였다.
세상 사람들은 누구든지간에 많은 돈을 가지고 좋은 저택을 가지고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면 그를 가리켜 성공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바울은 물질적인 풍요를 가지고 생의 만족을 말하지 않았다. 여러분이 아시는대로 바울은 천막을 만들어 팔면서 복음전도를 한 사람이다. 간단한 순례자의 모습으로 소아시아를 누비고 다녔던 사도 바울의 전도여정은 가난함과 외로움을 온 몸에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바울은 비록 가진 것이 없었으나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었다. 바울은 그의 심중에 그리스도를 모심으로 풍부와 만족을 체험하면서 일생을 살아 온 사람이다. 사실 물질적으로 보면 그는 성공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만족하고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은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가진 참된 부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사로 잡힌 까닭이었다.

바울의 이러한 삶의 방법은 어디에서 배운 것일까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가난하게 자라나신 예수님에게 일단의 무리들이 찾아와 예수를 따르겠다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지만 인자는 머리둘 곳도 없다.'(마 8:20) 인간적인 면에서 볼 때 누가 예수님을 가리켜 성공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 분은 태어나실 때부터 기구한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 부모가 집을 떠나 여행 중이었다. 그렇다고 따스한 여관 방에 누운 것도 아니었다. 겨우 바람이나 피한다고 들어 간 마굿간에서 태어나셨다. 그 분은 본래 부요하신 분이셨다. 그러나 가난한 자의 모습을 가지고 태어나신 분이셨다.

오늘 우리 한국교회는 예수의 삶 속에서 새로운 발견을 가져야 한다.
예수님이 가신 길은 고난의 길이요 가난한 자의 길이요 고통 받는 자의 길이다. 그 분을 따르는 우리들은 그 분과 함께 고난 받겠다고 말하면서도 고난과 그의 아픔에 동참하는 일을 주저하고 있다. 우리 중에 누군가 그러한 일을 당하면 하나님에게 복을 받지 못한 일로 판단하고 만다. 인격적인 평가의 기준도 거의 모두 그가 가지고 있는 물량적인 것에 두고 있다.

미국에서 많은 부를 모은 노 부부가 말년에 자신의 전 재산을 교육개발에 헌납할 생각을 가지고 하버드 대학을 방문하였다. 정문을 막 들어서려는데 수위가 이들 부부를 멈춰 세웠다. 총장을 만나러 왔다고 말 하였지만 수위는 아주 경멸하는 태도로 괄세를 하는 것이었다. 노 부부는 수위에게 조용하게 물었다. '이런 대학 하나를 세우는데 돈이 얼마나 듭니까 ' 수위는 들은 척도 아니하고 노 부부를 밖으로 좇아내버렸다. 수위에게 상처를 받은 노 부부는 집으로 돌아왔다. 자기의 전 재산을 정리하여 새로운 대학을 세웠는데 그것이 바로 스탠포드 대학이었다. 나중에 이 사실이 하버드 당국자에게 알려져서 매우 아쉬움을 남게 만들었다. 그 뒤로부터 하버드 대학 정문에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는 문구가 붙어 있게 되었다고 한다.

만일 이 노 부부가 좋은 차를 타고 잘 차려입은 모습으로 대학에 들어갔다면 수위가 그를 멸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겉보기에 늙었고, 가난해 보이고 무식해 보이고 실패자처럼 보였어도 그는 재벌이었다. 그들은 자기 모든 재산을 교육에 투자할 줄 알고 미래를 바라보는 혜안을 가진 자였다.

예수님께서 사람의 모습을 입었고 또 가난하게 되신 것은 우리 인생들에게 부요와 함께 넉넉한 승리를 주시기 위함이었다.

바울선생은 본문에서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라고 기록하였다. 바울의 이러한 고백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징계를 받는다는 것은 벌을 받는다는 뜻이다. 남들이 생각할 때 바울이 징계를 받은 것처럼 생각이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바울은 벌을 받아야 할 뚜렸한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핍박을 여러번 당하였다. 하루는 가이사랴 빌립보지방을 지나는데 귀신에 붙잡혀 점을 치는 여인을 만나 그를 고쳐 주었다. 그런데 주인은 바울과 실라를 고발하여 옥에 가두었다. 비 정상적인 사람을 정상적으로 고쳐 주었는데 치료비는 고사하고 그들을 옥에 가둔 것이다. 얼마나 억울하고 분한 일이겠는가
그러나 바울은 실라와 함께 기도하고 찬송하였다.

바울은 로마에서도 옥에 갇힌 일이 있었다. 그 당시 기록한 편지에서 바울은 기록하기를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하였다. 그의 권면은 눌림을 받은 자가 누린 승리가 어떤 것임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바울은 옥에 갇히고 채찍에 맞으며 온갖 수모와 핍박을 받은 자였다. 이 세상이 보기에 그는 실패자였다. 그러나 그는 승리자였고 성공을 소유한 자였다.

로마서 8 장에 나타난 바울의 승리의 찬가를 읽어 보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바울은 부활의 예수를 만난 후에 그의 삶이 완전히 뒤 바뀐 사람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를 받아 들인 사람 만이 그리스도의 영광의 부활에 동참한다는 이 사실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성공의 모습이다.

사도 바울은 얼마든지 세상적인 부귀와 영화를 누릴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성공에 대한 개념을 달리한 사람이다. 세상 사람들의 판단보다는 보다 더 깊고 넓고 높은 차원으로 자리를 달리 한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 귀하게 여겼던 모든 것을 분토와 같이 여겼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가장 고상하게 생각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자랑하지 않겠다고 말하였다. 바울은 이 복음을 전하는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화가 임하리라 생각하였다.

1940년 여름, 일본 경찰에 잡혀간 주 기철 목사는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하였다. 죄수의 몸으로 폐와 심장이 약하여져서 모진 고문에 몸은 약해 질 대로 약해진 몸이었다. 그런데도 기도하며 성경암송을 힘 쓰고 또 갇힌 사람들을 위로하는 일에 힘을 다하였다. 주 목사님은 옥중에서 7 년 세월을 보냈으나 그의 신앙은 더 더욱 깊어만 갔다.

1944년 4월 스무날 그의 부인이 면회를 갔다. 주 목사는 그의 부인에게 '내 대신 어머님을 잘 모셔주시오. 나는 하나님 앞에 가서 조선의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겠소. 교회 앞에 이 말을 전하여 주십시요.'라고 말하고는 그 다음 날인 4월 21일 오후 9 시에 ' 내 영혼의 하나님이여! 나를 붙드소서.' 하고 최후의 기도를 마친 후 49세를 일기로 인생을 마쳤다.

주 기철 목사의 삶을 대변한 설교는 너무나 유명한 '일사각오'였다. 한번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 분이 평양신학교 부흥회를 인도하는 첫날 밤 설교 제목이었다. 그 설교 내용인즉 첫째 예수를 따라가는 일에 일사각오요, 둘째는 남을 위하여 일사각오요, 셋째는 부활의 진리를 위하여 일사각오였다. 주 기철 목사의 생애는 성공인가 실패인가 총총히 박힌 못 위를 걸어가며 발바닥에서 흘려 버린 그의 피가 오늘 우리 한국교회 성장의 밑거름인 것을!

두 아들의 생명을 앗아 간 원수들을 양 아들로 입적하신 손 양원 목사님과 같은 순교자의 사랑의 터 위에 오늘 우리 한국교회의 기둥이 높이 솟아 오른 것을! 손 양원 목사의 삶은 성공인가 실패인가 세상 사람들의 판단에서 볼 때 이들은 완전한 실패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공적인 삶을 산 사람들이다.

33 세를 일기로 십자가에서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삶도 실패자의 삶처럼 보였다. 제사장들도 환호하고 서기관들도 기뻐하고 로마의 집정자들도 환호하였다. 하늘조차 검게 물들은 그날은 인간 예수의 완전한 실패처럼 여겨진 날이었다. 사단조차 박수를 치며 승리의 개가를 불렀음즉한 날이었다. 그러나 예수는 무덤에서 다시 살아 나셨다.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이기신 것이다.

세상이 판단할 때 바보스럽고 뭔가 모자라고 우습게 여겨져도, 역사의 주관자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가치와 생의 의미를 발견한 사람이라면 그는 이미 성공의 열쇠를 거머 쥔 사람이다.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신 그리스도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세상에서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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