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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의 열매-양선 (삼하 12: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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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가 은혜받고자 하는 말씀의 제목은 "양선의 삶"이라는 제목입니다.

"양선의 삶 !" 여기서 말하는 양선이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공동번역 성경에서는 "선행"이라고 번역되어져 있고, 영어 성경에서는 "굿 디드"(good deed)라는 말로 번역되어진 말입니다.

따라서 양선이라고 하는 말은 선한 행위라고 풀이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때 우리는 지난번 시간에 우리가 묵상했었던 "자비의 삶"이라는 설교에서 살펴보았던 "자비"라는 말과 이 "양선"이라는 말과의 사이에서 혼돈이 생깁니다.

왜냐하면 "자비"도 역시 선한 행위라는 뜻이 내포되어있고 "양선"에도 선한 행위라는 뜻이 내포되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사도바울은 성령의 열매의 요소를 갈라디아서 5장에서 소개를 하면서 이 자비와 양선을 구별했겠습니까 분명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구별한것이 아니겠습니까 . 그 차이가 무엇이겠습니까 그 차이는 다음과 같습니다.

자비 ! 선한 행위입니다. 그러나 이 자비의 선한 행위는 부드럽고 인자하게 팔로 안아 주는 것과 같은 선한 행위를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위로해주고 사랑해주고 긍휼을 베풀어 주는 선한 행위입니다.

그렇다면 양선은 무엇입니까 양선은 자비처럼 그렇게 부드럽고 인자하지 만은 않습니다.

양선은 자비와 같은 그런 선한 행위이지만 보다 더 엄격한 것이라고 정의를 내릴 수 있습니다. 양선을 향하는 자신과 양선을 받아드리는 쌍방간에 공히 마음속에 큰 아픔 을 간직하면서 행해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은 성전에서 양을 팔고 돈을 바꾸는 부도덕한 행위를 보고 채찍을 휘드르 면서 책망했던 예수님의 행위 그것은 선한 행위입니다.

그러나 그런 행위는 부드럽게 인자하게 팔로 안아주는 자비는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양선이라는 강한 성격의 선한 행위였습니다.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죄했을때 나단이 다윗을 책망한 경우도 마찬가지입 니다.

비록 나단은 상대방이 왕이었지만 그가 범죄했을때 아주 실랄하게 책망을 했습니다.

날카로운 비수처럼 죄로 무감각해져 있었던 다윗의 마음을 찔렀습니다.

그리하여 다윗으로 하여금 그의 이중 인격적인 생활에 종지부를 찍게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 이것이 바로 양선입니다.

바로 이런 양선이 우리의 삶속에서 필요하고 또한 있어야만 합니다.

저는 성경을 읽을때 마다 참으로 안타까운 한 가정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무엘 선지자의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엘리 제사장의 경우입니다.

그는 비록 그 직책이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던 제사장이었지만 가정교육에서는 철저하게 실패를 했습니다.

그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저들 역시 제사장으로서 하나님께 대한 '절대 헌신' 과 '절대 성결'을 가져야만 했던 성직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1) 하나님을 무시하고 2) 경건한 제사제도를 문란하게 하고 여호와께 드릴 제물을 강탈하고 3) 다른 사람을 실족케하다가 결국에는 블렛셋과의 전투에서 하나님의 궤를 빼았기고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그 소식을 듣고 엘리 제사장은 의자에서 자빠져 목이 부러져서 죽습니다.

성도 여러분 ! 왜 엘리의 가정에서 이런 비극이 일어나야만 했겠습니까 엘리에게 있어서는 자식을 향한-엽굼견차 하는 책망과 바르게함의 선한 행위가 없었 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 양선을 행할 때에는 때로는 아주 어렵고 괴로울때가 있습니다.

죄를 책망하는것은 위로나 격려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양선을 통해 잘못된 신앙생활에 대해 바로 잡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잘못을 잡는 양선은 어떻게 우리의 삶속에서 행해져야 합니까

1. 양선은 자기 자신에게 행해져야 합니다.

 우리는 늘 자기 자신의 모습을 점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면은 너무나도 끔찍한 일 앞에서 큰 낭패를 당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다윗의 경우가 그러합니다.

다윗에 대해 일반적으로 역사가들은 말합니다.

"다윗이 헷사람 우리아의 일을 제외하고는 평생에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했다" 참으로 놀라운 평가입니다. 어쩌면은 이런 평가를 받는 다윗이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런 다윗을 두고 말하기를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런 다윗이지만 그가 방심하는 사이에 그가 느긋해진 사이에 그의 영적인 삶 은 정지되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도저히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 정도의 큰 범죄 즉 부하의 아내를 빼았고 그에 게 충성을 다하던 부하를 죽이는 끔직한 일이 저지르고 만 것입니다.

이런 다윗의 범죄를 두고 성경에서는 "하나님 보시기에 다윗의 소위가 악했더라"고 평 가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여기서 그의 인생을 끝내지 않습니다. 사울처럼 변명함으로 그의 삶을 망치지 않습니다.

그의 새로운 인생은 그가 그 자신을 철저하게 돌아봄으로서 새롭게 시작이 됩니다.

선지자 나단의 책망을 통해 범죄한 자기 자신을 돌아봅니다.

선지자 나단의 책망 "당신이 그 사람이라 ! 당신이 범죄한 그 사람이라"는 책망을 듣고 다윗은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 앞에서 참회를 했습니다.

다윗의 위대함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잘못된 자기 자신의 모습이 지적당하자 그 어떠한 변명도 필요없이 곧 바로 그 모든 잘못을 인정하고 하나님앞에 참회의 기도를 올렸던 것입니다.

시 51편에 보면 그 당시의 다윗의 참회하는 마음의 상태를 잘 알수가 있습니다.

시 51편을 보면 그 제목이 다음과 같이 씌어져 있습니다.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저에게 온 때에."라는 제목과 함께 시편 51편은 시작이 되면서 다윗이 하나님앞에서 자기 죄를 자복하는 내용이 소상하게 밝혀지고 있습니다.

1절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죄과)를 도말(도말)하소서 2절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3절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4절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적에 악을 행 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5절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6절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 7절 우슬초(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 보다 희리이다 8절 나를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9절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 10절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11절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12절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 드소서 13절 그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14절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 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15절 주여 내 입술을 열어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 16절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17절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 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18절 주의 은택(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성을 쌓으소서 19절 그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저희가 수소 로 주의 단에 드리리이다 구구절절 선지자의 엄중한 책망앞에 자신의 죄악된 모습을 향해 마음속으로 부터 오열하면서 통회하는 내용의 신앙고백인것입니다.

이런 참회의 신앙고백 이것이 바로 자기 자신을 향한 양선인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죄를 합리화하는것이 아니라 인정하면서 자기 자신을 나무라고 바로잡는 양선의 행위인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 나의 영혼이 병들어 있고 , 연약해져 있고 ,냐약해져 있고 그로 인해 나의 영혼의 삶 의 행진이 정지되어 있다면 우리는 다윗처럼 마땅히 우리들 자신을 향해 양선을 행해 야 합니다.우리의 잘못을 바로 잡아야만 합니다.

더 강하게 표현하자면 우리들 자신을 향해 스스로 양선의 포문을 열어야만 합니다.

양선의 포문을 열고 그 옛날 다윗처럼 맹 폭격을 해서 우리 영혼의 잘못된 부분을 바로 잡아야만 합니다.

1절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죄과)를 도말(도말)하소서 2절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3절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이런 양선의 행함의 몸부림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뜻입니다.

 2. 양선은 자기의 가족에게 행해져야 합니다.

우리는 일상생활중에서 어떤 잘못된 일이 저질러 졌을때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타인이 잘못을 저질렀을때는 "어떻게 인간의 탈을 쓰고 저렇게 할 수 있느냐"고 하면 서 상대방에 대해 총 공격을 하는것을 조금도 저주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이나 자신의 가족이 타인 행한 것과 동일한 일을 저질렀을때는 "인간이니까 그럴수도 있지"라고 하면서 너무나도 관용해 버립니다.

바로 여기서 문제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자기 가족을 보는 눈이나 타인을 보는 눈이나 동일하게 볼수 있어야 옳바른 양선이 이루어집니다.

이런 경우는 앞에서 잠시 설명했지만 그 옛날 이스라엘의 대제사장 엘리 가정에서 일어났습니다.

그 당시 모든 백성들을 양선으로 지도했던 엘리 제사장이 자기 자식에게는 그 양선을 사용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께 대한 '절대 헌신'과 '절대 성결'을 가져야 만 했던 제사장이었습니다.그런데도 불구하고 저들의 삶은 어떠했습니까 1) 하나님을 무시했습니다.

2) 경건한 제사제도를 문란하게 하고 여호와께 드릴 제물을 강탈했습니다.

3) 다른 사람을 실족케했습니다.

마땅히 나단이 다윗을 책망했던 그 이상의 책망을 들어야 될 저들이었습니다.

물론 저들은 아버지 엘리로부터 책망을 들었습니다.

사무엘상 2장 23-25절의 말씀입니다.

23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하느냐 내가 너희의악행을 이 모든 백성에게서 듣노라 24 내 아들아 그리 말라 내게 들리는 소문이 좋지 아니하니라 너희 가 여호와의 백성 으로 범과케 하는도다 25 사람이 사람에게 범죄하면 하나님이 판결하시려니와 사람이 여호와께 범죄하면 누 가 위하여 간구하겠느냐 참으로 사랑이 듬뿍 담겨져 있는 책망의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아비로서의 책망에 문제가 있습니다.1) 적절한 때에 책망을 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자기 아들들이 비행의 싹이 보였을때 저들을 책망했어야만 했습니다. 어린 나무는 쉽게 뿌리를 뽑을수 있지만 장성한 아름 드리 나무는 뽑기가 힘이 드는것과 똑같은 이치입니다.

2) 효과적으로 자녀들을 책망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집단적으로 보다는 개인적으로 , 소문보다는 자신이 직접 본것을 토대로 해서 자녀들을 책망했어야만 했습니다.

3) 미온적인 태도롤 책망했습니다. 이것때문에 자녀들은 아버지의 책망을 가볍게 여겨 버리고 계속해서 범죄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엘리 제사장의 자녀에 대한 책망은 인간적인 정에 끌려서 책망다운 책망 을 하지 못한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양선이라고 하는것은 자비처럼 그렇게 부드럽고 인자하지만은 않은 것입니다. 양선은 자비와 같은 그런 선한 행위이지만 보다 더 엄격한 것이고 이 양선이 행해질때는 큰 아픔이 동반되어지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경우 아직 덜 성장한 자녀들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을때 저들은 죽지 않을 정도의 매를 때린다고 합니다.

이런 경우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도 자랄때 저의 부모님이 교회 주일학교의 회계를 했기에 저희집에 늘 헌금으로 받 은 돈들이 있었습니다.(1원 5원 10원짜리 동전등) 한번은 만화가 너무나도 보고 싶어서 그 돈중에서 5원을 훔쳐서 만화를 보았습니다.

결국 그 도둑질 한 것이 들켜서 저의 아버지로 부터 책망을 들었는데 그 책망은 보통 책망이 아니라 허리띠 혁대로 정신없이 맞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는 그렇게 때리는 부모님이 밉고 혹시 나를 다리밑에서 주워다가 키우지 않았 는가 생각도 해 보고 가출할려고도 생각하고 실제로 진주역까지 갔다왔지만 수십년이 지난 지금 그 당시를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소중한 책망이었다는것을 소중한 매였다는것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것은 참으로 그렇게 자식을 정신없을 정도로 때리고 맞아야 될 그런 소중한 것임을 깨닫게 되었고 지금도 그런 신앙의 정신으로 하나님의 것을 확실 하게 성별하면서 살아가기 때문인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문화와 문명이 발전해서 우리들에게 여러가지 편리함을 제공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편리함은 동시에 우리들 주위에서 범죄와 타락의 온실을 만들고 있습니 다. 그리고 그 온실속으로 우리의 자녀들을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아니 우리의 남편을 우리의 아내를 유혹하고 있습니다.

이런 위급한 사회적인 상황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역시 양선의 포문을 열어야 됩니다.

양선의 포를 쏘아되어야 합니다. 집중 사격을 해야 됩니다.

그 옛날 우리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양을 팔고 돈을 바꾸는 부도덕한 행위를 보고 채찍 을 휘드르면서 책망하시던 예수님의 심정으로 양선을 행해야 됩니다.

다윗의 범죄를 목숨을 걸고 감히 왕앞에서 그 잘못을 지적하고 "당신이 바로 그 사람 이요"라고 외쳤던 나단의 심정으로 양선을 행해야 됩니다.

그리하여 자칫잘못하면 타락한 세상의 소굴에 빠질수 있는 위험에서 우리의 가족을 구 해낼수 있어야만 됩니다.

 3. 양선은 타인에게도 행해져야 합니다.

 우리는 다같이 그리스도안에서 한 형제요 한 자매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웃의 잘못을 보고 강건너 불보듯이 보고만 있을수 있겠습니까 언젠가 저는 슬프도소이다라는 제목의 설교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 설교에서 저는 세 대지로 나누어서 우리는 슬프해야 된다고 강론했습니다.1)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지 못하는 자 자신을 보고 슬프해야 된다고 했습니 다.

2) 타락한 교회의 모습을 보고 슬프해야 된다고 했습니다.

3) 우리의 민족과 국가를 보고 슬프해야 된다고 했습니다.

옳습니다 ! 우리가 양선을 베풀어야 될 그 대상은 나 자신과 나의 가족에서만 한정되어서는 않됩 니다.

우리가 양선을 행해야 될 그 대상은 우리 이웃 모두입니다.

우리는 우리 혼자만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가족만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속에서 세상과 더불어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고 말입니다.

세상 밖에서의 소금과 빛이 아니라 세상속에서의 빛과 소금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통해 소금의 역활과 빛의 역활을 하겠습니까 성령의 9가지 요소들을 통해 그 역활을 감당할수 있습니다.

사랑으로 ,희락으로,화평으로,오래참음으로 소금과 빛의 사명을 감당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것들은 자기 자신을 희생하면서 베푸는 선한 행위입니다.

우리는 이런 희생적인 선한 행위위에 더욱더 적극적인 방법인 엄격하고도 강한 성격의 선한 행위도 행할 수 있어야만 됩니다.

내 자신을 향해서 나의 가족을 향해서 이웃을 향해서 발사되어지는 양선의 포는 우리들 자신을 변화시킵니다.

우리의 가족을 변화시킵니다.

우리의 이웃을 변화시킵니다.

그리하여 나약하고 게으르고 병든 심령은 그런 양선의 행함으로 인해 완전하게 파괴 되어지고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나게 될것입니다.

이제 저는 마지막으로 오늘 우리가 묵상한 양선이 행해지는 한 실제적인 모습의 예를 한가지 소개하겠습니다.

어느 여집사님의 이야기 입니다만 그 여집사님의 남편이 하루는 술에 잔뜩 취해서 아내에게 따지면서 말을 했습니다.

"나는 빈 껍대기 남편이야 당신의 알맹이 남편은 예수야" 그러면서 불평을 털어 놓았을때 그 여집사님은 남편에게 한마디만 하겠다고 하니까 남편이 "또 예수 사랑한다는 말인가"라고 되 묻더랍니다.

이에 그 여집사님은 " 내가 추운 새벽에 교회에 가고 싶겠느냐고 정말 새벽잠 단잠을 자고 일어나고 싶지 않지만 예수님께서 내가 너에게 좋은 남편을 주었는데 그 남편 구 원시키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느냐 라는 음성을 들으면 깜짝 놀라서 가기 싫어도 일 어나고 추운 겨울 바람을 맞으면서 남편을 위해 기도하러 간다"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남편은 할말을 잊어버리고 미안하고 고맙다고 했답니다.

그 후 몇달이 지난후 그 남편은 스스로 교회에 나오게 되었다는 아름다운 이야기 입니 다.

성도 여러분 ! 양선은 앞에서 말한대로 강하고 공격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양선이 비록 강하고 공격적인 것일지라도 기도하는 중에 행해져야합니다.

기도없는 충성은 만용이라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기도없이 행해지는 양선은 양선이 아니라 언어의 폭력입니다.

우리는 양선을 행하되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서 양선을 행해야 합니다.

그리할때 여러분의 앞날에는 실패가 아닌 승리의 삶이 장식되어 질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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