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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빌립보 성도들의 신앙생활 (빌 0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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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관록이 붙을수록 어떤 사람은 교만해지고 또 어던 사람은 관록이 쌓일수록 점점 겸손해지는 사람들도 있다.

 교회생활도 예외는 아닌것 같으다.

 계시록 2 장에 두아디아라는 교회가 있다.

이 두아디라 교회의 특징이 있는데 이 교회의 특징을 계2;19절이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라고 했다.

 두아디라 교회 성도들의 신앙은 날이 갈수록 달이 갈수록 점점 더 낳은 편으로 성장해 가고 있었다.

 오늘 우리들이 생각하고자하는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의 신앙이 해가 거둡할수록 점점 새로와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신앙을 보면서 마치 가을 들판에 곳식이 익어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을 본다.

 1,사도의 마음에 들었다.

7절에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라고 했다.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의 일거수 일투족 한가지 한가지가 다 사도 바울의 마음에 쏙-들었던 것을 말함이다.

 단 한가지도 사도 바울의 마음을 번거롭게함이 없다.

오늘까지 하여 온 일들과 또 지금 하고 있는 저들의 신앙생활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바울의 마음에 들었다.

 신앙생활을 교역자 마음에 들도록한다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다.

 사람이 사람의 마음에 든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

그런데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바울의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감옥에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다.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바울과 함께 있을 때에도 그렇게 심앙생활을 잘하더니 이제는 바울과 떨어져서 살고 있는데도 저들의 신앙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시간이 가면 갈수록 점점 사도 바울을 닮고 있었던 것이다.

 어린 아이나 다름이 없었던 저들이 이제는 크게 성장을 하여 사도 바울이 이제 하나님께 들림을 받는다할지라도 염려할 것이 없었다.

 빌립보 성도들은 바울이 어디를 가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힘있게 자랑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된 것이다.

 그런데 어떤 교회는 교역자와 성도간에 서로 서로 마음이 맞질 않는 일 때문에 어려움을 격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럴때마다 사람들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지라고 말들을 하지만 이는 이유를 따질 문제가 못된다.

 서로서로가 서로의 장점만을 볼려고 노력을 했더라면 결코 그런 불상사는 생겨지지 않는다.

 마음에 못되게 역사하는 마귀의 장난에 넘어가 그져 남들의 허물만을 볼려 하기 때문이다.

어디에나 불미스러운 일은 일어나게 마련인 것이다.

 빌립보 교회도 우리들과 똑 같은 사람들이 모인 교회이다.

천사들의 교회가 아니다.

 그렇다면 거기에도 사람들의 냄새가 나기 마련이었다.

여기저기 구린내가 물씬물씬 풍기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표현엔 이런점들을 발견할 수가 없다.

 왜

이는 서로가 서로의 마음이 되어서 서로를 자기 같이 아끼고 도우면서 살았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서로를 위한 십자가를 지는 교회였기 때문이다.

 힘든 일이 있을 때 예수 십자가 바라보면서 어려운 일이 있을 때 골고다의 십자가를 바라 보면서 불평 원망할 일 생길때 모든 것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면서 살았기 때문 이다.

 불평할일 생기거든 기도해보라.

원망할 일 생기거든 금식을 해 보라.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신앙생활은 한 가지도 사도 바울의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없었다.

 2,은혜에 동참을 했다.

 7절을 다시 본다.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신앙생활이 바울의 마음에 들었던 것은 저들이 바울과 함께 은혜에 동참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럼 은혜에 동참을 했다는 것은 무었을 말하는 것인가 바울은 지금 무었을 은혜라고 말하고 있는가

우리들이 생각하고 은혜와 비교를 해보시라.

 첫째 매임을 당했다.

바울이 은혜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바울처럼 복음을 위하여 매임을 받았다는 것이다.

 매였다는 말은 죄를 지은 사람이 그 죄 때문에 사슬에 매여 옥에 같임같이 빌립보 성도들은 복음에 매여 그리스도에게 같인바 된 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둘째 복음을 변명했다.

복음을 변명했다고 말한 구절은 변명이라 하지 말고 변호나 옹호로 번역을 했어야 옳았다.

 이 말은 사도 바울이 빌립보 지방에서 복음을 전할 때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겠나

빌립보 성도들은 바울의 복음 사역에 함께 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변호하기도 하고 옹호하기도 했다는 말이다.

(우리 교회는 아멘이라도 크게 잘했으면 좋겠다)

세째 확정을 했다 확정함에 나와 함께...라는 말씀도 너무 귀한 말이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지방에 와서 복음을 증거할 때 빌립보가 타향이기 때문에 누군가가 바울을 도와주어야 했었다.

 그런데 빌립보 교회는 사도 바울이 증거하고 있는 복음을 확정했다고 했다.

 여기에 확정이란 말은 당시 법적인 술어로써 옥에 같여 있는 사도 바울의 전함이 틀림이 없다는 것이 함께 동의함을 말한다.

 오늘 날에도 웬만히 친하지 않고서는 감옥에 같여 있는 사람의 의견에 변호를 한다거나 증거를 서는 일을 잘 하지 않는게 상식이다.

 그런데도 빌립보 성도들은 옥에 같여 있는 바울과 믿음을 같이하고 잇었다는 것은 당시의 상황으로는 매우 힘든 일이었다.

 복음때문에 매임을 당하는 생활을 은혜라고 햇다.

복음을 위하여 변호하며 옹호하는 일을 은혜라고 했다.

복음을 위하여 옥에 같인 사도와 믿음을 함께함이 은혜라고 했다.

.

이렇게 성장한 빌립보 성도들을 생각만하여도 감사가 넘쳐났던 것이다.

 3,사모의 대상이었다.

8절에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사도 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하다가 8절에 와서는 돌변하여 빌립보 성도들을 사모하는 장면으로 바뀌고 있다.

 사도 바울도 대단한 신앙의 사람인데 ...

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을 생각하다가 반해버린 것이다.

 반한것도 보통반한 것이 아니다.

 "사모한다"고 했다.

그것도 그냥 사모가 아니고 "어떻게 사모하는지"였다.

 "내가 에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라"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모한다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은 죄인들을 친구삼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하여 주신 것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이란 말은 에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어 주신 것과 같은 시장을 말하는 것이다.

 그 심장으로 빌립보 성도들을 사모한다고 했다.

 목회를 하다가 보면 신앙이 좋은 한 두 사람에게 마음이 끌릴때가 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한 두 사람에게가 아니고 빌립보 교회 성도 전부에게 반해러린 것이다.

 반하다가 반하다가 도가 넘쳐서 사모하게 된 것이다.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인가 얼마나 멋있는 신앙의 사람들인가

솔로몬의 아가서를 보시라! 신부되는 술람미 여인도 주님을 사랑하고 있지만 신랑되시는 주님은 자기의 신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니 사모하고 있는지 말로다 형언할 수가 없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우리도 복음 안에서 서로 사랑하자! 주의 복음에 함께 동참하는 자가 되자! 서로가 서로를 사모할 수 있는 사모의 대상이 되자.

 그래서 빌립보 교회처럼 빌립보 성도들처럼 사모할 수 있는 여러분 모두가 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아 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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