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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 원수를 사랑하라 (눅 06:2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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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평지의 보훈”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사랑의 극치를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적극적으로 투쟁해야 할 분야가 무엇인가 발견하고 우리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적극적으로 투쟁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발견하여서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Ⅰ. 사랑의 극치입니다.(27-30)

양심은 우리 마음 안에 있는 성경인데 타락하므로 말미암아 변질되었습니다.
원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우리를 하나님이 지어 주셨는데 죄를 지으므로 변질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은 본래 깨끗한 것인데 마치 깨어진 거울과 같습니다. 깨진 거울에 얼굴을 비추어 보면 어떻게 보입니까 바른 모습 대신에 이그러진 얼굴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와 같이 양심이 깨어지고 변질이 되어져서 하나님의 뜻을 바로 반사해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양심도 바른 기준이 되거나 바른 판단을 못해 줍니다. 이질화된 양심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전서 1:19 착한 양심, 1:5 선한 양심, 3:9 깨끗한 양심이라고 말했습니다. 양심이라면 그대로 양심이지 착한 양심, 바른 양심, 정직한 양심, 깨끗한 양심, 거짓 없는 양심 왠 수식어가 붙고 형용사가 붙어야 합니까 양심에 오물이 붙어서 하나님의 뜻을 잘 반사해 줄 수가 없어서 붙여진 것이겠습니다. 부모를 흉기로 찔러서 죽이고 또 휘발유를 부어서 태워 죽이는 세상이 되었으니 깨끗한 양심, 착한 양심을 가져야 한다고 성경은 일러줍니다. 양심이 바른 기준(canon)이 못되므로 가장 표준이 되는 성경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아니다’하면 아니고, 성경이 ‘옳다’하면 옳은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주시는 “평지의 보훈”을 그대로 받아들여 순종하므로 복된 삶을 가지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27,28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믿지 않을 때는 아무 일이 없었는데 믿음으로 살고자 하고 교회에 나오게 될 때는 원수들이 생깁니다. 믿기 전에는 동기들 간에 사이가 좋았는데 교회 나오고 부터 원수가 생깁니다.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으로 부터 주일날 자기들과 술을 먹고 놀러 다니지 않으니까 자연적 원수가 되어 욕을 얻어먹게 되고 저주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어느 가정에는 형제간에 잘 지내다가 한 쪽이 예수님을 믿게 되자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믿지 않는 형제가 믿는 형제의 집에 불을 질렀습니다. 또 어떤 아버지는 자식이 예수를 믿는다고 심하게 때리고 머리를 홀랑 깍아서 내쫓고 호적에서 까지 지운다고 야단이 났습니다. 이런 이들을 예수님은 이해하고 미워하지 말라 하신 것이 아니고 도리어 “너의 원수를 사랑하며 선대하며 축복하며 기도해 주어라”고 하십니다. 하되 적극적으로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사실 이들은 내 원수이지 하나님의 원수는 아닙니다. 내게 대해서 좀 잘 대해 주지 못하고 핍박하고 하는 것이 사실 하나님의 원수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래도 이런 일은 인간적인 사랑으로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계속하여 괴롭히는 사람들을 향하여 사랑하며 선대하며 축복하며 기도해 줄 수 있습니까 우리의 착한 인간성으로는 한 사람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이렇게 원수를 사랑하고 축복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구속의 사랑 때문이요, 하나님의 구속의 사랑을 덧입고 있는 것을 아는 자는 이 사랑을 할 수 있고 이 말씀을 영접해야 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18:24-33절에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종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일만 달란트는 너무 많아서 계산하기 힘든 숫자입니다. 어느 종이 일만 달란트 빚을 지어서 갚을 길이 없는고로 엎드려 절하며 당장 갚으라는 주인의 어명에 떨면서 갚겠다고 하니 주인이 불쌍히 여겨 그 빚을 몽땅 탕감(蕩減)하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탕감 받은 종이 나가서 제게 100데나리온-한 데나리온은 일일 품삯입니다.-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멱살을 잡고 빚을 갚으라 하매 동관이 엎드려 참아 달라며 갚겠다고 애원을 해도 허락지 않고 빚을 갚을 때까지 옥에 갇우웠습니다. 이런 소식을 주인이 전해 듣고 저를 불러다가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며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에게 붙였다는 비유입니다.

우리는 과거에 모두 다 하나님 앞에 일만 달란트 빚을 진 자요, 우리 모두 다 하나님의 원수였고 진노의 대상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원수된 우리를 위하여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게 하심으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해 주셨습니다.(롬5:8) 나만이 아는 죄, 드러나면 부끄럽고 큰일 날 죄까지 다 탕감을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원수된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고 요한1서 4:10-11절에 말씀하셨습니다.

스테반은 자기를 향하여 돌을 던져 죽이는 사울을 향하여 기도해 주었습니다. 무릎을 꿇고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소서” 예수를 믿는 이를 잔해하고 핍박하고 돌을 들어 치는 원수를 향하여 기도를 했더니 그가 후에 뉘우치고 회개하고 돌아와서 기독교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유명한 바울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속의 사랑을 덧입었기 때문에 우리가 원수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상처 주는 양을 계속 사랑하여 줄 수 있고 뿔이난 양들을 변함없이 품어 줄 수 있습니다. 저도 가끔 불성실하고, 양들을 헤치고 교회 덕을 끼치지 못하는 짓을 하는 성도들을 보면 용서할 수가 없어서 밤잠을 설치고 꼬박 잠을 자지 못하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간신히 마음을 잡고 기도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조용히 찾아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그보다 훨씬 더했다. 나는 너를 그보다 더 큰 죄악에서 용서해 주고 눈감아 주었지 않느냐 내가 너를 얼마나 오랫동안 참았느냐 생각해 보아라” 저는 저를 죄악 가운데서 구원하시고 소망 없이 죄의 종노릇하던 저를 구속해 주신 구속의 사랑을 생각할 때 저의 교만한 죄악을 깊이 회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또 저를 축복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영접하게 될 때 원수 같은 사람도 사랑하며 축복할 수 있었습니다.

29-30절을 보십시오. “네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 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금하지 말라 무릇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돌려 달라지 말라”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선으로 악을 이기도록 영적인 투쟁 방향을 잡아 주셨습니다. 악한 자를 악으로 갚으면 또 다른 악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러나 사랑으로 원수를 감화시킬 때 진정한 의미에서 승리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원자탄>의 주인공 손 양원 목사님은 자기의 아들 동신이와 동인이를 죽인 원수를 양아들로 삼아서 목사로 세웠습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위대한 믿음의 선배가 있다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성경에 다윗을 보면 자기를 죽이려는 사울왕을 끝까지 선대 합니다. 결국 다윗은 선으로 악을 이기고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Ⅱ. 사랑의 공식입니다.(31)

31절을 보십시오. “남에게 대접(待接)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 말씀은 기독교 윤리의 기초가 되는 황금율(Golden Rule)입니다. 복을 받게 되는 법, 공식이겠습니다. 그래서 영어로 Golden Rule이라고 합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죄악된 본성이 있습니다. 남에게 칭찬 듣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남을 칭찬해 주기를 싫어합니다. 남에게 무시를 당하면 속이 상해서 씩씩거리고 잠을 못 잡니다. 그러면서 남을 칭찬해 주지 않습니다. 자기는 인정을 받기를 원하면서 남을 인정해 주기를 싫어하며 남을 인정하기를 어떻게나 싫어하는지 죽기보다 더 싫어합니다. 우리 교회가 사랑이 많고, 우리 교회가 좋고, 우리 교회가 부흥된다는 소리를 들으면 왜 그렇게 좋은지... 왜 다른 교회가 부흥되고 은혜스럽다고 들리면 배가 아픈지...
선물 받기를 좋아하면서 선물 주기를 싫어합니다. 자기는 판단 받기를 싫어하면서 남을 판단하는 데는 굉장히 빠른 선수입니다. 섬김 받기는 좋아하면서 남을 섬기기를 싫어합니다. 이는 타락한 본성 때문에 끊임없이 시기하면서 불평하며 갈등 속에 살아갑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남에게 대접 받기는 원하면서 대접하기는 싫어하는 데서 기인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동서 고금을 비롯하여 많은 사상가들은 말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위대한 유대인의 철학자 필로(Philo)는 “자기 자신이 당하기 싫어하는 일을 다른 사람에게 행하지 말라”고 했고
헬라의 웅변가 이소크라테스(Isocrates)는 “타인의 손에 의해서 괴로움을 당하여 그대가 분개하게 되는 일을 다른 사람에게 행하지 않도록 하라”고 말했습니다.
공자가 “생애를 걸어서 실천해야 할 규율이 있다고 한다면 한마디로 말해서 어떠한 일일까요”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이러한 말이 있다면 호혜주의(互惠主義)가 아닐까 자기 자신에게 원치 아니하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도 행하지 말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말들은 소극적입니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남으로 부터 피해를 입지 않겠다는 이기주의에 기초한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적극적으로 남을 대접하라고 하십니다. 내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하십니다.

어떤 책에 보니까 인간관계는 메아리와 같다고 했습니다.
이쪽에서 말하는 대로 되돌아 오는데 몇 배가 되어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이쪽에서 “야호!”하면 저쪽에서 “야호,야호,야호”합니다. 또 이쪽에서 “이 새끼야!”하면 저쪽에서 “이 새끼야,이 새끼야, 이 새끼야”하고 되돌아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대한 태도가 결정됩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 속에서도 이 황금율을 지키고자 애를 쓸 때 이 복됨을 얻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활을 하고자 할 때 많은 아픔이 따릅니다. 무엇보다도 자존심을 먼저 꺾어야 하는 일이 가장 어려운 것 같습니다. 자존심만 꺾으면 대부분의 인간 문제는 거의 해결됩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12:10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했습니다. 하되 먼저 하도록 하십니다. 먼저 섬기고 먼저 존경하고 먼저 사과하고 먼저 대접하시기 바랍니다.

Ⅲ. 사랑의 차이점입니다.(32-36)

이방 사람들과 그리스도인이 달라야 하는 것을 현대인의 성경으로 그대로 32-36절까지 읽어 드리겠습니다.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한다면 너희가 무슨 칭찬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한다. 너희에게 친절을 베푸는 사람들에게만 친절을 베푼다면 너희가 무슨 칭찬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그 정도는 할 줄 안다. 너희가 다시 받을 생각으로 사람들에게 빌려준다면 무슨 칭찬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되돌려 받을 줄 알면 빌려준다”했습니다.
되돌려 받을 것이 분명하면 빌려주지 않을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세상인이 다하는 것입니다. 받기를 바라고 주는 것은 결국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지 남을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남을 이용하는 것이지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크리스챤의 생활 윤리 가운데 중대한 것은 나쁜 일을 행하지 않는데 있는 것이 아니고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는데 있고, 먼저 섬기는데 있고, 일반 사람보다 선한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35,36절에 “그러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그들에게 친절을 베풀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빌려주어라 그러면 너희가 큰상을 받을 것이며 하나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 그분은 은혜를 모르는 사람과 악한 사람들에게도 인자하시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현대인의 성경)했습니다.

Ⅳ. 사랑하며 사는 자의 받을 축복입니다.(37-38)

오늘 예수께서 설교하신 ‘평지의 보훈’의 핵심은 <사랑>의 요구입니다. 예수께서는 사랑하고 싶은 자 뿐만 아니라, 사랑할 수 없는 자도 사랑해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이렇게 사랑할 수 없는 자를 사랑하고 사랑하고 싶지 않는 자를 사랑하라는 이 말씀을 믿음을 영접하고 사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의 말씀이 37-38절입니다.
“비판(批判)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37)
“주라 그러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주라-주님은 우리 더러 주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하나님이 채워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채워 주시되 말(斗)에 하나님이 친히 후히 되어 주시고 적게 들어가므로 누르고 또 흔들어 그리고 넘치도록 하여 가득 채워 안겨 주리라 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 영접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자에게는 이와 같은 은혜가 넘칠 줄을 믿습니다.

지난 5월 2-4일까지 <실천신학 연구회> 목회자를 위한 세미나를 대봉교회에서 열었습니다. 두번째 날에는 올해 성결교 총회장님을 강사로 모셨습니다. 그분의 강의 중에 충정도 서산 어느 시골 교회 성결 교단 은퇴 목사님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엘리야가 3년 6개월 동안 흉년이 들어 가뭄이 들 때 까마귀를 통해 살아난 것같이 이 목사님은 어려운 일제시대 때며, 보리 흉년에 이 까마귀 역사를 체험했다고 합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들녁에 나가서 사모님이 보리 이삭을 주워서 겨우겨우 살아가는데 하루 종일 주으면 한 됫박 될까 말까 그것을 주워서 목사님네 식구가 살고 또 가난한 교우 집에 나누어 주었답니다. 하루는 보리 이삭을 주우러 가기 전 엎드려 기도하다가 잠이 살포시 들었는데 엘리야가 까마귀를 통해 3년 6개월을 살아 온 그 관경이 보이고 쥐가 사모님 앞으로 보리 이삭을 한 입 물고 쥐구멍으로 들어가는 꿈을 꾸었습니다. 잠이 깨어서 이게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생각하면서 보리 이삭을 주우러 또 들녁으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이삭을 줍고 있는 사모님 앞으로 꿈에서 보았던 것 같은 쥐가 보리 이삭을 한 입 물고 지나가더랍니다. 그래서 꿈을 생각하며 그 쥐를 따라갔더니 쥐구멍으로 들어가더랍니다. 그래서 그 쥐구멍을 파고 돌을 들어내니까 쥐들이 보리 이삭을 얼마나 많이 물어다 두었는지 보리 이삭이 쥐집에 너 됫박씩 있어서 그 후로는 이삭을 줍지 않고 쥐집만 찾아다니며 보리를 주워서 보리 고개를 넘겼다는 이야기입니다.

엘리야는 3년 6개월을 까마귀로 살았지만 이 목사님네는 쥐로 살았답니다. 이렇게 남을 도우며 목회를 하시던 목사님네는 지금은 솔잎으로 국수를 만들어 내는데 [무공해 솔잎 국수]로 특허를 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남는 찌꺼기로 수제비를 만들어 내는데 품절이랍니다. 유명한 백화점에 만들어 가는데도 동이 난다고 합니다. 수 십 억대가 되었답니다. 하나님은 그 가정에 말씀대로 흔들어 넘치게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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