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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여 내가 무었을 하리이까 (행 22: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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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세주의 철학자 쇼펜하우엘 룩셈불크 공원 벤치에 앉아서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 명상에 잠긴다.

"인생이 어디서 왔으며 무었하러 왔는가, 그리고 어디로 가는가"

그렇다 자기가 무었을 해야할지를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1,바울의 질문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 사로 잡히고 말았다.

완전히 주님께 압도된 바울은 주님을 향하여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주여 내가 무었을 하리이까

이 말의 원래의 의미는 "주여 내가 무었을 하기를 원하심니까"라는 말이 된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에 이 질문을 바로 했다.

 우리들은 에수 만지지가 오래된 사람들이다.

바울처럼 이런 질문을 해 보았는가

그리고 가끔 가다가 이런 질문을 다시 해 보시는가

"주님 나는 무었을 해야합니가"라고 묻는가

주님은 바울이 필료했다.

바울을 유용하게 쓰시고 싶었다.

 그래서 주님은 다메섹으로 가고 있는 바울을 부르셨던 것이다.

그런데 즉석에서 바울은 주님을 향하여 물었다.

 "주여 내가 무었을 하기를 원하싶니까"라고 ...

 만약에 주님께서 쓰시고 싶어 부르셨는데 형광등처럼 나를 왜 부르셨느지도 모르고 산다고 가정을 해 보시라.

 우리를 부르신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서글프겠나

우리가 믿음의 생활을 하는 목적이 무었인가 주님의 일을 하기 위한 것인가 아니면 나를 위한 것이가

주님을 위한 것이라면 우리도 주님께 물어야할 것이다.

"주님 내가 무었을 해야할 것입니까"라고 물어야한다.

 어떤 직장에서 사원을 모집했는데 그 선발된 사원이 나름대로 똑똑헤서 매사를 주인의 허락도 없이 일들을 처리한다면 그 사원이 주인에게 칭찬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

아니다 아무리 일을 능율적으로 잘한다 할지라도 주인의 의사를 도외시한 일은 결코 칭찬의 대상은 될 수 없다.

 주님의 일을 할려면 주님에게 수시로 묻는 물음의 생활이 필료하다.

 그리고 그 묻는 물음의 시기가 빠르면 빠를 수록 좋은 것이다.

 예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사장이나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묻곤 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주님께서 우리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직접적으로 물을 수 있는 길을 터 놓으신 것이다.

 그것이 바로 기도인것이다.

 2,다메섹으로 들어 가라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났을 때에 지체 없이 물었다.

"주여 내가 무었을 하리이까" 라고

그럴때 주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음성이 있었다.

10절에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는 주님의 음성이었다.

 다메섹에는 아나니아라는 주님의 제자가 살고 있었다.

12절에 보니 "율법에 의하면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아나니아라 하는 이가" 살고 있었다.

 아나니아라는 사람은 모든 유대인들로부터 칭찬을 받는 훌륭한 사란이었다.

 이 아나니아를 통하여 주님은 바울에게 할 말이 있었다.

 주님께서 다메섹 도상에서 직접적으로 바울에게 사명을 주실 수도 있었을 것이나 주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고 다메섹의 아나니아에게로 바울을 보내고 있읍니다.

 그것은 이미 주님께서 아나니아에게 바울에게 주어야할 사명을 말해 두셨기 때문이다.

 이 일이 바울에게는 급작스러운 일일런지는 몰라도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침밀한 계획가운데 일하시고 계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때 그때 적당 적당하게 일하시는 분이 아니시라 미리 미리 완벽한 준비와 함께 일하고 계심을 우리에게 보여 주심이다.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도 그랬고 야곱을 부르셨을 때도 그랬고 모세를 쓰실때도 마찬가지였다.

 오늘 바울을 부르실때도 같은 방법으로 미리 준비된 계획 가운데 부르시고 계시는 것이다.

 오늘 우리들이 이렇게 부르심을 받은 사건도 하나님의 즉흥적인 것이 아니라 만세전부터 계획된 하나님의 부르심인 것이다.

 바울은 자기와 함께한 일행들의 손에 이끌리어 다메섹으로 들어 갔다.

그리고 아나니아를 만났다.

 아나니아는 바울의 감긴 눈도 안수하여 열어 주고 또 바울에게 앞으로 해야할 일들을도 상세하게 가르쳐 주었다.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인가

주님을 만나는 순간에 "주여 내가 무었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라고 물었더니 주님은 즉각적으로 그 물음에 응답을 주신 것이다.

 무었을 달라는 기도만 하시지 말고 바울처럼 내가 주님을 위하여 무었을 해야할 것인지를 물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3,예루살렘에서 나가라 주여 내가 무었을 하리이까 " 라고 물었더니 하나님께서는 오래 전부터 미리 준비된 계획 가운데 부르셨음을 확인 시켜 주시고 있다.

 15절에 아나니아를 통하여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너의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 는 증인의 사명을 받는다.

 그리고 바울은 비몽하몽간에 다시 새로운 하나님의 응답을 듣는다.

 18절이다.

"보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저희는 네가 내게 대하녀 증거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하시거늘"

그 두번째 들려 온 주님의 음성은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속히 나가라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부르셨을 때에도 그곳에서 나와 하나님께서 자시하는 땅으로 떠나라고 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도 속히 예루살렘을 떠나라고 하신다.

 대대로 예루살렘은 유대민족들의 마음의 고향이다.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이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예루살렘을 떠남은 실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바울은 예루살렘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는다.

 떠나야 하는

첫번째 이유는 유대인들이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둘째번 이유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였다.

 바울의 입장에서 볼때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복음 전하는 일이 어려운 것이라면 생판 낫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얼마나 더 어려운 일인가

하나님에 대하여 한번도 들어 본적도 없는 이방인들이 아닌가 그들 나름대로의 종교 같은 것을 가지고 살아 온 사람들이 아닌가

그런 이방인들에게로 가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떠나라는 명령은 무거운 것이었다.

 21절 "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 고 한다.

 21절에서 재차 바울에게 더나라고 한 것을 보면 처음에 예루살렘을 떠나라고 했을 때 아마도 바울이 망서렸던 것 같으다.

 그래서 21절에 재차 떠나라는 명령을 하시고 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에 "주여 내가 무었을 하기를 원합니까" 라고 물을 때 하나님게서는 분명한 응답을 주셨다.

 사도 바울에게 이런 무거운 명령이 내려 졌을 때 바울이 어떻게 했나 끝까지 망서렸는가

아니다.

바울은 이 거룩한 하나님의 명령이 자기에게 내렸을때 지체하지 않고 예루살렘을 떠더나서 이방인들의 땅으로 갔던 것이다.

 지금 사도 바울이 어디서 돌아오고 있는 것인가 바로 이방인들을 위하여 복음을 증거하다가 그의 인생 마지막 가는 길에 마지막 오순절이나마 예루살렘에서 보내고 싶어서 불원천리하고 찾아 온 것이 아닌가

바울이 이렇듯이 예루살렘을 그리워했던 것을 보아서도 이방인들의 사역이 대단히 힘들고 어려웠던 것임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러나 어렵드라도 힘이 들더라도 가다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이 바울을 부르신 하나님의 명령이면 준행을 하고 싶었던 바울이었다.

 바로 이런게 주님을 위한 일이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따로 있는게 아니다.

 내 마음에 들고 내 하고 싶은 일만 하고자한다면 이는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이여 !

어떤 일이 마음에 들던지 아니 들던지간에 그게 주님의 일이라면 어쩌실건가

주님의 일이라면 반듯이 행해야하지 않겠나

그렇다면 일이 있을 때 그 일을 놓고 주님께 기도하라.

반듯이 기도하라.

주님의 일에 실수 하지 않기 위하여 기도 하시길 바란다.

 "주여 내가 무었을 하리이까" 라고 기도로 물어 보시라.

 그리고 응답이 되시거든 지체 말고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을 떠날 수 있었던 것처럼 과감한 결단을 해야한다.

 주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타입은 사도 바울과 같은 타입이다.

 이방땅의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성공적으로 복음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게 도우셨던 하나님께서 지금 사도 바울처럼 주님의 일에 동참하기를 원하시는 분들을 역시 도우실 것이다.

 바울처럼 결단하고 바울처럼 승리 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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