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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베드로의 설교 (행 02:2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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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제자들이 방언을 해서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많은 사람들이 놀랐다. 제자들이 방언을 하자 새 술에 취하였다 조롱하자 자신들에게 나타난 일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는데 그것이 베드로의 첫 번째 설교이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이 설교와 오늘날 일반적으로 우리가 기독교를 소개하고 있는 것과 조금 차이가 있다는 사실이다. 현대에 오면서 기독교는 설명을 통해서 상대방을 납득시키려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런데 베드로의 설교를 보면 전혀 그런 경향이 없다.
베드로의 설교의 두 기둥은 이것이다. 하나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과 너희가 못박아 죽인 예수를 하나님은 주와 그리스도를 삼으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우리 신앙의 두 기둥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의 부활을 다윗과 견주면서 이야기 하는데 다윗은 예수님의 부활을 알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실제로 ‘예수님은 부활하셨고 우리가 그 일에 증인이다’ 말하고 있다.
예수님의 부활은 왜 그렇게 강조되어야 하는 것인가 고린도전서 15장을 통해 부활사건이 어디로 연결되고 있는가를 더 깊게 추적해 보자.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 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그러므로 내나 저희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고전 15:1-11)”
신앙의 최고 핵심을 ‘너희가 내 말 가운데 거하라. 그것을 굳게 지켜라 그러면 구원을 얻는다’이다. 그것은 3절에 있는 바와같이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고전 15:3-4)”이다. 곧 그의 죽음과 부활이다. 이것이 무엇과 연결되는가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전 15:12-19)”
이 말은 예수님을 높여서 예수님을 믿는 것이 다른 종교를 믿는 것보다 더 세다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곧 그것이 우리에게 적용될 새로운 질서와 세계, 새로운 사실에 관한 시작을 증명하는 증거로 등장하기에 그것을 높이는 것이다.
주님이 다시 사신 것이 곧 우리도 다시 산다는 것에 대한 증거요 하나님께서 죽음에서 그를 부활시키셨으니 우리도 죽음에서 부활할 것이요, 죽음으로 끝나는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고 새 나라 새 땅 새 하늘이 있다는 새로운 우주관과 인생관을 가지는 새로운 가치 체계를 아는 자의 깨우침, 그 사실을 소유하고 있는 자의 확신, 그 모든 계획과 모든 일에 대한 어떤 근거로서 이것이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신자들의 신앙생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근거로 해야 되는 것이다. 신앙생활이란 우리 마음이 뜨거워서 우리가 어떻게 했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영적 차원의 가치의 중요성을 깨우치는 방법으로 오는 것이지 뜨거움이 새로움의 내용은 아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을 가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다. 그의 빛을 보고 음성을 들은 것이 그를 변화시킨 것이 아니다. 자기가 생각할 때 하나님을 반대한 참람죄로 죽은 예수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았고 자기 앞에서 말씀하고 있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살리셨고 그래서 그가 맞다면 내가 틀린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가 가진 가치 체계가 뒤집어지는 것으로 만나는 것이다.
오늘날의 신자는 신앙의 내용을 뜨겁고 놀랍고 감격스러웠던 것만으로 몰아가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무엇이 그를 감격으로 몰고 갔는가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자의 신앙생활은 속에서 무엇이 올라오기를 기다려서는 아무 것도 아니다. 직장은 쉬고 싶어도 나간다. 가고 싶어서 가는 곳이 아니라 안 가면 안되는 곳으로 너무나 현실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간다.
신앙이란 그런 근거가 있어야 한다. 이것은 너무나 확실한 사실이기 때문에 그 길을 갈 수밖에 없어야지 마음이 뜨거워지기 전에는 갈 수 없습니다라는 식은 항상 매를 맞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사실을 인식해서 움직여야 한다. 우리가 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 우리가 보고 만지는 것, 세상에서 힘쓰는 가치가 영원한 가치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사실을 바르게 인식하고 있는 사람은 군대에 있는 동안 짬짬이 영어도 공부하고 사회에 나갈 준비도 한다. 그것이 신자가 이 세상을 사는 모습과 방불하다. 그 생활을 하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신자가 아니다.
여기에 대해 신자들은 핑계대기를 뜨거움을 달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영원을 준비하는 것은 눈에 안 보이고 실감이 안 나지만 세상 사는 것은 너무나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핑계를 대면서 사실은 놀고 있는 것이다. 회개하여야 한다.

베드로 설교의 두 번째 기둥은 예수 그리스도가 주가 되셨다는 것이다. 그가 주와 그리스도가 된다. 그런데 이 표현을 할 때마다 성경은 ‘너희가 못박아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고 표현한다. 사도행전 4장으로 가면 이런 설명이 나온다.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행 4:11-12)”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과 구원의 유일한 문이 되심. 이것을 강조하는 것이 베드로 설교의 또 하나의 기둥이다. 기독교를 말할 때마다 일반인들과 가장 크게 충돌하는 것은 왜 너희만 옳으냐 하는 문제이다. 기독교의 유일성과 배타성이 문제가 된다. 사실 너희도 옳고 우리도 옳지만 우리가 더 세다 하면 좋겠는데 우리만 옳다는 것이 꺼려지는 신자들도 있을 것이다.
여기에 무슨 문제가 있느냐 하면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종교상의 옳다 그르다는 절대성을 근거로 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생각할 때 옳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종교란 무엇이다’라고 자기가 설정해 놓고 자기가 옳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문제를 자기가 내고 자기가 답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다 정답인 것이다.
종교를 논하자면 절대 진리에 관한 싸움으로 종교를 논하는 것이냐, 아니면 인간이 말하는 윤리와 도덕으로써 종교를 말하는 것이냐 하는 선을 일단 긋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윤리와 도덕을 종교라 한다. 그들이 생각할 때 나는 이것을 가치있게 생각한다. 충이다 효다 또 예의다 하며 그런 것들을 최고의 가치라고 해놓고 그 가치에 맞게 종교를 보니까 불교가 괜찮고 이슬람교가 괜찮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해 보라. 입학시험에서 합격자 불합격자를 가릴 때 수험생이 얼마나 최선을 다했느냐로 여부를 가리지 않는다. 오직 정답이냐 아니냐로 가린다. 연필이 좋은 것이냐 나쁜 것이냐 오른 손으로 썼느냐 발로 썼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정답을 썼느냐가 중요하다. 여기서 정답은 본인이 얼마나 정답인가를 확신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문제를 낸 사람이 요구한 답을 썼느냐 하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종교는 그런 문제를 낼 분이 있느냐 없느냐로 돌아가야 한다. 그런데 종교 이야기를 할 때 모두가 자기가 문제를 내고 있으니 누가 신인가 각자가 신이니까 정답도 인간 수 만큼 나온다.
문제를 내는 사람과 답을 쓰는 사람은 따로 있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계시다,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다 하는 이야기다. 예수 그리스도가 주라고 하면 그가 문제를 내는 주인인 것이다. 그를 믿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우리가 주를 믿는다, 주님이 계신다, 창조주가 계신다라는 것을 모르는 한 문제는 본인이 낼 수밖에 없다. 이것이 가장 큰 싸움거리이다. 이것을 기독교의 배타성이라고 하지만 이것은 배타성이 아니라 진리이다.
대학 시험을 치를 때 아무리 본인이 불쌍해도 점수가 되지 못하면 합격시키지 않는다. 우리는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시험을 내서 우리가 답을 풀지 않는다. 하나님이 시험문제를 냈고 그 시험을 통과할 방법은 예수를 믿는 방법밖에 없다. 왜 예수냐 석가면 안되냐 해도 할 수 없다. 하나님이 낸 문제의 답은 예수여서 인간이 아무리 따져서 자기 답대로 해도 그 댓가는 천국이 아니다.
겨우 커트라인에 매달려서 붙을지라도 떨어지고 붙는 차이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알아야 한다. 이상은 우리가 결단코 얼마나 잘났는가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결국은 절대적인 권위로써 증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것이 베드로의 설교의 두 기둥이다. 그가 부활하셨다는 새로운 질서, 부활, 생명이 우리에게 적용되는 것, 영원한 나라를 소망해야 될 자로서의 우리의 확인과 그 길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들어갈 수 없다는 이 절대 진리에 대한 제시가 신앙의 근거요 유일한 내용이요 기둥이요 전부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말씀이 지금 성령이 오셔서 제자들을 충만케 하여 남들이 보기에 놀랄 만한 외적인 어떤 현상으로 ‘어찌하여 너희가 그렇게 됐느냐’에 대한 답변으로 제시되고 있다.
여기서 오순절 성령강림을 첫 번째 문제인 부활생명, 죽음이 모든 일의 끝이 아니라 생명이 모든 일의 끝인 세계로 이제는 우리가 초대를 받았으며 그 세계가 시작되었다는 것의 증거라고 말한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 8:9-11)”
이제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은 예수님에게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새로운 부활 생명, 부활 세계, 영원한 세계를 향한 시작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같이 우리는 부활할 것이다. 이미 거기에 참여했다. 예수님의 부활은 첫 열매이다’ 그리고 주의 주 되심에 대한 증거로도 등장하고 있다.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 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행 5:30-32)”
예수를 구주로 높이신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이신 일의 증인이다. 성령의 오심은 오늘 본문에도 그렇게 등장하고 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행 2:32-33)”
성령은 자의에 의해 오시지 않고 예수님이 보내셨다. 예수님은 성령을 보내실만한 위치에 계신 분이시다.
베드로 설교의 두 기둥은 부활 생명, 새로운 질서와 새로운 세계에 우리가 들어가 있다. 그 일이 시작되었다. 그 다음에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인이시다. 그가 하나님이시다. 그를 통해서만 그 나라에 간다. 성령강림마저도 이 두 일에 증인으로, 증거자로 우리에게 오셨다. 이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 신앙의 두 기둥이어야 한다.
주께서 기뻐하시는 것으로 나의 기쁨을 삼아야 한다. 모든 일에 주를 의지한다. 세상을 의지하지 않는다. 주께 피하며 주께 의지하면 모든 문제를 해결하시리라. 이것이 우리들의 신앙의 최고 핵심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모든 삶의 목표와 원리를 이 두 원리에 의해서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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