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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판별식 (갈 05: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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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5장 16절 이하의 본문에서 유명한 부분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이다. 우리는 자주 ‘성령의 열매를 맺자’라는 말을 한다. 그리고 성령의 열매를 맺으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그런데 잘 안될 뿐더러 나아가 반대로 육체의 열매만 남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렇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이 말씀이 어떤 열매를 맺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놓쳤기 때문이다. 성경은 ‘열매를 맺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좇으라’고 언급되어 있다. 이것은 아주 다른 것이다. 성경은 한번도 ‘열매를 맺으라’고 하신 적이 없다. 열매는 언제나 ‘그것이 무슨 나무인가’를 분별하라는 것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 는 이리라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 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마 7:15-18)” 열매를 ‘판별’의 기준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열매를 달리게 하는 나무는 잘 몰라도 열매를 보면 그 나무가 어떤 나무인지 알 수 있다. 좋은 나무에서 나쁜 열매가 맺지 않으며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 그래서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알라’는 것이다. 나무는 가만히 둔 채 ‘좋은 열매’만 맺으라고 한 곳은 하나도 없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5장에서 ‘성령의 열매를 맺어라’하는 주장은 이쪽과 관계가 없다.

지금 갈라디아서 5장 16절 이하의 말씀에서 우리에게 성령의 열매를 요구하고 있는 것은 무슨 뜻인가 또 이 열매로 무엇을 알아야 하는가 성경은 우리가 지금 ‘성령을 좇아가고 있는지 육체를 좇아가고 있는지’를 확인하라고 이 열매들을 나열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열된 이 열매를 맺으라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이 열매는 맺힌다. 그러나 ‘너희가 지금 성령을 좇고 있는지 육체를 좇고 있는지를, 네가 하는 일의 열매가 무엇으로 맺히고 있는지로 분별하라’는 말이다. 그래서 본문은 육체와 성령을 구별하는 판별식이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 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6-17)” 육체의 열매를 맺지 않는 법은 성령을 좇아 행하는 길 밖에 없다. 그리고 진술된 것은 맺히는 열매로 인하여 네가 어디에 속했는지를 알라는 것이다. 신자들이 겪는 가장 큰 실수는 ‘옳다는 것’ 때문에 싸우는 것이다. 이단과의 싸움이라면 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아닌 ‘내가 옳다는 것’ 때문에 다른 사람을 심판하고, 상대방을 죽음의 자리로 몰아 놓는 일들이 생기곤 한다. 말하자면 나와 남을 옳고 그름으로 구별을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여기서 중요한 점은 육체의 열매나 성령의 열매가 다 같이 성품적이라는 것을 놓치면 안된다. 즉 능력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의 성도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능력적’인 면이 아니라 ‘성품적’이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이런 열매들에 대하여 신자들은 보통 ‘신앙’이 어떤 ‘능력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 능력들이 문제를 해결해 놓고 상대방을 죽이는 데 있다.

하나님이 신자들에게 요구하는 신앙준수, 신앙의 방향이라는 것은 ‘성품적’이고 ‘인격적’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일을 이루는 면으로만 이해하려 한다. 우리는 참으로 일을 해결하려는 쪽을 좋아한다. 그러기 위해서 능력을 달라고 기도한다. 그러나 다음의 말씀을 살펴보자.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 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0-23)” 거짓 선지자들이 그들의 열매로 제시하는 것은 ‘능력적인 것’이다. 놀랍게도 거짓 선지자들은 능력 일변도이다. 그러나 성경은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했다. 성경이 진술하고 있는 것은 열매를 구할 때는 ‘능력인가, 아닌가’ 쪽으로 하지 않고 ‘성품적’으로 했다. 성품적으로 ‘거룩한가, 사랑이 있는가’를 물었다. 결코 ‘능력이 있느냐’고 묻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가 무슨 일을 할 때, 그 일로 말미암아 어떤 열매가 맺혀지는가를 구별해야 한다. 내가 하는 일이 아무리 좋아도 그 일이 ‘육체의 열매’가 맺혀졌다면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는 길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선지자, 귀신 쫓아냄, 권능, 이런 일들이 너무나 기독교적이기에 이 일을 행하는 한 주님께 인정받지 못하는 일은 없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성경은 이 일꾼들을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심판했다. 이 일을 더 분명하게 이해하려면 빌립보서 2장 1절로 8절의 말씀을 보아야 한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그가 어떻게 자신을 비우시고 낮추사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죽기까지 복종하셨는가를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 말씀은 환난과 핍박에 처한 자들에게 주신 말씀이 아니고 오히려 정반대의 입장에 처한 자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리스도 안의 권면’, ‘사랑의 위로’, ‘성령의 교제’ 등등 바로 이와 같이 신앙적 차원에서 높은 일을 한다. 그러나 이 일을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하라고 말씀하신다. 그 장한 일이 다툼이나 허영으로 물들 수 있다는 것이다.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을 품고 겸손히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일, 이것이야말로 성령의 열매인 것이다.

마태복음 7장 23절에 의하면 이런 사람들을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요 주께서 도무지 알지 못하는 자들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 뜻을 분명히 하기 위해 24-27절까지 그 유명한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 비유를 베푸신다. 우리는 보통 주의 말씀을 듣고 실천한 자는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자요 주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치 않는 자는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자라고 생각을 한다. 그러나 이 비유가 실천의 유무를 대조한 비유라면 지은 집을 비교하여야 한다. 곧 본문의 비유는 주님의 말씀을 기초로 하여 집을 지은 사람과 주님의 말씀 외의 것에 기초하여 집을 지은 사람을 비유한 것이다. 집을 지은 것에 대한 비교가 아니라 무엇에 기초하고 있느냐를 비교한 비유이다. 집이 견고한 것도 또 무너지는 것도 둘 다 기초 때문이다.

결국 얼마나 종교성이 짙은 일을 했느냐-선교사, 목사, 전도 등등-보다 그런 일들로 얼마나 주님의 모습이 드러났느냐-사랑, 겸손, 온유 등등-로 자신의 신앙을 판단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좋은 나무냐 나쁜 나무냐의 구별을 짓는 기준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열매를 맺는 신앙만이 나중에 주님으로부터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칭찬을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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