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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인내와 자비와 양선 (갈 05: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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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인 아침 시간에는 성령의 열매 아홉가지 가운데서 첫째인 사랑과 둘째인 기쁨 그리고 셋째인 화평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이 열매는 사람이 하나님께 대해서 맺는 열매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힘써서 되는 게 아니고, 내가 결심해서 하는 일이 아니고, 성령을 충만히 받으면 자연히 이웃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해서 즐거워하는 사람은 어떤 환경과 조건 가운데서도 기뻐할 수가 있습니다. 이 기쁨은 세상이 주는 기븜과 같지 아니합니다. 이 기쁨이 있는 사람에게는 심령의 힘이 있습니다. 봉사할 수 있는 힘이 생깁 니다. 시럼을 이기는 힘이 있습니다. 왜 사람이 시험에 듭니까 마음에 기쁨 이 없기 때문에 여기 가면 기쁨이 있나 저기 가면 있을까 기웃기웃 하다가 유혹도 받고 시험을 받습니다. 마음 속에 기쁨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화평의 열매를 맺습니다. 어떤 사람이 화평 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과 화평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나님과 화평할 수 있습니까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마음 속에 죄를 품과 있는 동 안은 하나님과 화평할 수가 없습니다. 죄를 마음에 품과 있는 사람은 쫓아 오는 사람이 없어도 도망간다고 했습니다. 왜 도망갑니까 두려워서 그럽니 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죄 용서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 길이 어디에 있 습니까 십자가 밑에 나와서 예수님이 흘리신 보혈과 정결함을 받고 성령의 물로 씻음을 받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생각함으로 은혜 받고자 하는 것은 그 다음 열매인 인 내와 자비와 양선입니다. 지난 시간 생각한 사랑과 기쁨과 화평이 하나님을 향해 맺는 열매라고 할 것이면 오늘 우리가 생각하게 되는 인내와 자비와 양선은 인간을 향해서 맺는 열매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회적인 덕목입니다.

그 첫째가 인내, 오래참는 것은 우리를 억압하거나 핍박하는 사람들에 대해 서 인내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오래 참 는 것이 부족해서 불행한 일을 당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구약 잠언에 보면 인내에 대한 교훈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이것은 인간 사회에서는 오래 참는 것이 얼마나 필요하다고 하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라 고 생각합니다. 가령 잠언 12장 16절에 보면은 "미련한 자는 분노를 당장 나타내거니와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느리라." 잠언 15장 18절에 보면 그 치게 하느니라" 했습니다. 잠언 16장 32절에 보면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리 라."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성을 빼앗는 것보다 낫습니다.

옛날 장군 가운데 왕양명이 '산중유파적이나 신중난파적이라.' 그러지 않 았습니까 산속에 있는 적을 물리치는데는 그렇게 어렵지 않은데 내 마음 속에 있는 적을 물리치는 게 그렇게 어렵다. 그 말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 아가노라면 억울한 일을 당하기도 하고 분한 일을 만나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감정을 가지고 있기 대문에 그것을 참는 게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닙 니다. 그래서 저는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서 한 사람인 야고보와 같은 사람, 요한 같은 사람 예수님의 생활을 보고 닮아가노라고 했지마는 참는 일에는 실패했습니다.

여려분 알다시피 예수님의 일해이 전도를 하러 가시다가 날이 저물어 가 는데 사마리아 동네 앞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자 몇 사람을 보 내 이 동네에서 좀 쉬게 해 달라고 부탁을 하러 들어보냈습니다. 요사이 같 으면 숙박시설이 다 잘 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구차스러운 부탁을 할 필요 가 없지만 예수님 당시만 하더라도 특정한 지역 외에는 어디에나 숙박 시설 이 없기 때문에 날은 저물어 오고 밤을 지내야 되게 되면 민가를 찾아 가서 내가 사정이 좀 이렇게 되었으니 날이 밝을 때까지 여기서 하루 저녁 쉬어 갈 수 있도록 부탁을 해가 지고 밤을 지내게 되는 것이 그 당시의 상황이었 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일행은 한 두명이 아니고 열명이 넘었습니다. 여기에 문 제가 있었습니다. 더구나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 에는 아주 적대관계에 놓여 있지 않았습니까 피차가 서로 헐뜯고 싫어하는 사이인데, 예수님의 일행이 하루 저녁 쉬고 갈 수 없으냐 하는 청원이 그 만 한마디로 거절 당하고 말았습니다. '아니, 아니 우리를 사람으로 취급 한 하겠다고 하는건지 그것도 하룻밤 자고 신세 지겠다는 것이 뭐냐.어림도 없 다.'딱 거절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예수님에게 보고 했습니다. '뭐 바늘 구멍도 들어가지 않습니다. 어림도 없습니다.' 단 한마디에 거절 당했 습니다. 이 말을 보고를 듣고 있던 요한이 '선생님 그 놈들은 그냥 놓아두 어요, 아예 이번에 하늘에서 벼락을 내려서 몽땅 쓰러 버립시다.' 벼락 떨어 지면 어떻게 됩니까 홀딱 타 버립니다. 그럼 별명을 어떻게 지었습니까 환옥에 우뢰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팔팔해서 성나면 참지를 못해서 성령 을 충만히 받지 못하면 억울한 일 당하고, 화를 내고 참지 못하는 것 야고 보, 요한만이 아니고 누구에게나 있는 본성입니다.

가령, 베드로를 보십시오. 예수님을 체로하겠다고 로마 병사들이 달려드니 까 그 베드로가 얼마나 화가 나겠습니까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가 있느냐.

우리 선생님을 누가 다치게 하느냐. 그래서 제자장에 종 말고라는 사람이 있는데, 내가 치는데 귀가 싹 잘라졌습니다. 사실 베드로가 말고의 귀를 자 를려고 한 건 아니고 가눙데를 자를려고 했는데 말고가 피하니까 귀가 싹 잘라졌습니다. 그것 옳은 말입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떨어진 귀 를 주워 붙이면서 이것까지 참아랴.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해. 참아라 하고 말씀하셨읍니다. 공교롭게도 예수님이 가장 사랑하시던 제자 베도로, 야곱, 요한 이 세상이 성경에 나오는데 인내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저희가 오순절 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완전히 변화해서 인내할 줄 아는 사람들이 되었습 니다.

여러분 우리 스스로 한번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내가 어 떤 억울한 일을 당할 때 발칵 화는 내는 경우는 없습니까 아직도 나는 성 령 충만히 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오늘 읽은 말씀 중에 갈라 디아서 5장20절에 육체에 열매에 대해 말하면서 분내는 것이 그중에 하나라 고 했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가 없다고 말 했습니다. 에베소 4장 31절에 하나님이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고 말씀 하시면서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게 버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여러분 성내는 것, 분노는 하나니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일이라는 사실 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오래 참지 못하고 성령으로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해 드린 적은 없었습니까 그래서 에베소4장26절 이하에 "분을 내 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하여금 틈을 타지 못하게 하여라" 그랬습니다. 여러분 분한 마음을 품고 있으면 결국 마귀한 테 시험듭니다. 가인이 아벨에 대한 분한 마음을 품고 있더니 결국 그 동생 을 들로 끌고 나가서 쳐서 죽였습니다. 분한 마음은 살인을 낳습니다. 사람 이 살아가다 보면 분한 생각이 날 때가 더러 있습니다. 심지어 자기 자신에 게 대해서 그런 생각을 가질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가만히 보십시오.

자기 자신에게 분한 생각 가지고 며칠이나 갑니까 그러나 가만히 보십시 오. 자기 자신에게 분한 생각 가지고 며칠이나 갑니까 며칠은 고사하고 몇 시간이나 갑니까 왜 잊어버리지 않습니까 그러나 대부분 다른 사람에게 분한 생각을 품으면 그것 오래 가지고 있어서 그것 때문에 자기 자신에게도 하나님의 은혜가 떠나게 되고 결국 다른 사람에게도 손해를 입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분 마음 속에 분한 생각을 품고 있으면 하나님의 은혜는 떠 났다는 사실을 꼭 아셔야 합니다.

그래서 잠언 20장 22절에 "너는 악을 갚겠다 말하지 말고 여호와를 기다 리라 그가 너를 구원하시리라" 했습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의 품격 가운데 오래 참는 성품, 인내는 정말 귀한 것입니다. 왜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이 핍박하고 경멸할 때 오래 참아야 합니까 히브리서 10장 35절 이하에 "그러 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고 했습니 다. 우리가 잘 인내하게 되면 분명히 들으세요. 하나님이 우리게 약속하신 것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 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옥편에 앉으셨다고 하면서 우리가 어려운 일을 당하여 피곤하고 낙심하지 않기 위해서는 죄인들이 이처럼 자기에게 거역한 것을 참으신 예수님을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끝까지 참으 셨습니다.

여러분 사랑은 오래 참는다고 했는데 사랑의 화신인 예수님의 생애는 한 마디로 인내의 생애였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부터 세상을 떠나시는 순간까지 갖은 육신의 빈곤과 곤욕을 겪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래 참으 셨습니다. 공생애가 시작되면서 심리적인 고통은 말로 다할 수가 없습니다.

친척들은 예수님이 미쳤다고 말했습니다. 고향 사람은 그의 전도를 방해했 습니다. 그래서 오죽했으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를 '선지자가 제 고향에서 는 대접 받는게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이것도 참으셨 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중상하고 모략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줄줄 따 라 다녔습니까 예수님의 일생은 한 마디로 중상과 모략, 욕, 선전의 연속이 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잘 참고 견디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도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딴 궁리를 해서 마음을 섭섭하게 하지 않았 습니까 더구나 제자 중 한 사람 그것도 가장 신임할만 해서 돈을 맡겼던 사람의 손을 빌어서 할 일을 배신을 당할 때 그 마음 얼마나 아팠을까. 짐 작이 갑니다. 그는 십자가에 고통까지도 참으셨습니다. 야고보서에 보면 "인 내를 온전히 이루리라는 너희를 온전하게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인내가 있어야 우리 신앙 생활이 온전해서 구원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혹 육신에 노고로 허덕이고 고생하는 분이 계십니까 빈곤한 생활 로 어려운 짐 지고 고생하는 분이 있습니까 다른 사람의 오해로 상심한 분 이 계십니까 모략과 중상으로 가슴 아파하는 분이 계십니까 고독한 가운 데서 외로워서 남물래 눈물 흘린 분이 계십니까 이 시간 오래 참고 견디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다. 인내의 주님을 생각하십시다. 그래서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피곤하지 아니하고 낙심하지 아니하고 맥빠지지 아니하고 인내의 주님을 따라 승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는 자비입니다. 영어 성경 번역에 보면 자비라는 말을 (Gentleness 혹 은 Kindness란 말을 썼습니다. 그런데 헬라어에는 善자를 썼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념적이 아니고 실천적인 의미에서 남을 대할 때 부드럽게 대하고, 인자하게 대하고, 친절하게 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태복음 5장 7절에도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긍휼은 자기를 희생시키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는 받고 남에게는 주는 것이 기독교 윤리에 대원칙이고 받고 주는 일이 잘되면 잘 될수록 우리의 생활은 더욱 더 건전한 생활을 될 것입니다.

저는 영국에 빅토리아 여왕이 나이팅게일 여사에게 주는 기념 훈장 속에 헬라에 유명한 웨시야스이 말이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 다. '긍휼을 행하는 일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돈으로서만 아니라 말 로도 할 수가 있습니다. 돈으로도 말로도 할 수 없을 때는 눈물로 할 수 있 습니다. '자비를 베풀 수 있는 복스러운 모습을 보여 준다고 말할 수가 있 습니다. 자비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특별하게 불쌍한 환경에 있는 이들을 대해서 하는 태도로 말합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인과 동시에 긍휼과 자비의 하나님이십니다. 자비 는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하나입니다. 물론 자비를 강조해서 말한 건 우리 기독교에서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에서도 자비를 강조했습니다. 유교 에서도 자비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양해동서를 막론하고 모든 성령들 도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이 자비에 대해서 말씀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진 리는 하나의 자연계시에 의한 것으로 사람의 양심을 통해서 이미 우리에게 가르쳐진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에서 특수한 것은 같은 자비인 것 같지마는 하나님은 자비 하신 성품을 단순히 우리에게 가르친 건만 아니고 그 아들되는 예수 그리스 도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세상에 나타나서 세상에서 그러하여금 자비가 무엇인가를 실지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가르치신 것만 아니라 보여 주셨습 니다. 나타내 주셨습니다. 성경에도 "자비한 마음을 가져야 행복하다"고 했 습니다. 주님도 주님말씀하시기를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과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세상에서 어떻게 자비를 나타낼 수가 있습니까 우선 불쌍 한 사람을 돌보아 주는 것이 곧 자비입니다. 우리가 가난한 사람을 어떻게 대합니까 그거야 옛날 부터 가난한 나라도 어떻게 못한다고 했는데 그것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혹 그렇게 대답하신 분이 계실런지 모릅니다. 얼른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 습니다. 잠언21장 13절에 분명히 보세요. "귀를 막아 가난한 자의 부르짖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면 자기의 부르짖을 때에도 들을 자가 없으리라." '가난 한 사람 하나 도와 주세요' 하고 부르짖는데 귀 딱 막고 안 도와 주면 그만 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히 기억할 건 내가 어려울 때 하나님 앞에 나 와 '이거 도와 주세요'하면 하나님이 귀 딱 막는다는 사실 그거 하나만은 알아야 합니다. 누가 복음 6장 38절에도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 니 곧 후이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주리라." 이 말 씀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가난한 사람을 향해서 내 힘껏 자라는 것 주면 하 나님은 그냥 계시지 아니하고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하여 안 겨 주겠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자고로 남 불쌍한 사람 너무도 많이 도와 주 었기 때문에 저 사람 폐가 했다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그런 일이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거짓 입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폐가할 정도로 도와 줄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도와 주면 하나님은 갚아 줍니다. 하나 도 우면 하나님은 열로 갚아 줍니다.

그리고 잠언에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은 하나님께 꾸이는 것이니 하나님이 갚아 주리라." 어떤 때는 아버지가 애더러 갑자기 무얼 구할려고 했는데 돈이 부족해서 아들에게 '야, 너 돈 까지고 있으면 돈 좀 꾸어 달라.' 그래서 아들은 아버니께 천원을 꾸어 드렸습니다. 다음에 아 버지가 갚을 때 아들에게 천원으로 갚아 줍니까 이천원 삼천원으로 더 줍 니다. 이게 아버지 입니다. 가난한 사라을 도와 주는 것, 하나님께 꾸어 주 는 일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넉넉한 것으로 반드시 갚아 주실 것입니다. 비단 많은 물질로 도와주는 것이 못되더라도 우리가 언제나 할 수 있는 사소한 친절을 얼마나 요구하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마태복음에 기록된 산양과 목양의 비유를 기 억합니다. 오른편에 있는 구원 받은 양 어린 소자 하나에게 친절을 베푼사 람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릴 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고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 너흐가 영접했고 내가 벗었을 때 옷을 입혔고 내가 병들었을 때 돌아보았고 내가 옥에 갇혔 을 때 와서 보았느니라.' 이때 의인들이 뭐라고 말씀했습니까 '주여, 우리 가 어느때 주에 주리는 것을 보아서 공개했으며 주님이 목마르신 것을 보 며 언제 마시게 했습니까 어느 때 나그네 되시는 것을 보고 우리가 영접했 으며 주님이 벗으신 것을 보고 옷을 입혀 주셨습니까 어느때 병들고 또 옥 에 갇힌 것 보고 가서 뵈였습니까 그때 임금이 대답하기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라고 말씀했습니다.

내가 갚을 수 없는 사람에게 하는 것 곧 그것이 소자입니다. 내가 갚을 수 있사람에게 주는 건 꾸어 주는 겁니다. 또 더 많은 이득을 기대하고 주 는 건 뇌물입니다. 열을 주고 백을 받겠다는 건 뇌물이지요. 만일에 그대로 안되면 어떻게 하는 줄 압니까 사직 당국에 고발합니다. 저놈 내가 얼마 주었는데 안 해 주었습니다. 요새는 둘 다 걸린다니까 고발할지 모르겠습니 다만 이게 세상적인 계산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건 나한테 갚을 힘이 없는 사람을 돕는 게 이게 바로 자비다. 그 말입니다.

20세기의 성자 알버트 슈바이쳐는 유능한 의사였고, 백년대학교의 교수 였고, 유명한 철학자여, 바하 음악을 전공한 세계적인 파이프 올리겐리스트 요 또 훌륭한 신학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수많은 불쌍한 사람을 돌봐 준 자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손은 자비의 손이었습니다. 그 손을 가지고 바하 음악을 연주한 올리겐스트요, 병든 사람을 치료하는 의사의 손이었습 니다 때로는 병원을 짓기 위해서 손수 벽돌을 쌓느라고 거칠어지고 피가 나 는 봉사와 자비의 손이 요구됩니다. 그 손 위에 행복을 하나님이 선물로 주 실 줄 믿습니다.

 끝으로 양선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착한 일입니다. 여러분 오해하지 마시 기 바랍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선을 행해야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 전혀 아 닙니다. 성령을 통해서 우리가 예수를 구주로 믿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성령의 열매로 자연히 착한 행실의 열매로 맺게 된다는 말입니다. 에 베소서 5장 8절에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 니라" 했습니다. 빛의 자녀인 그리스도인이 맺어야 할 열매는 착함입니다.

착한 것은 적극적인 겁니다.

로마서12:19 이하에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 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 을 이기라." 마태복음 6:35절에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며 선대하며 그 러니까 원수를 착함으로 대하라"고 했습니다. 일본 속담에 "향나무는 자기를 찍는 도끼에게 향 냄시를 피운다"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의미 깊은 말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내가 사랑하고 나를 돌보아 주는 사람을 돌보아 주 고 나를 위해 주는 사람을 위해 주고 나를 아껴 주는 사람을 내가 아껴 주 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나에게 손해를 주고 헐뜯고 나를 비난하고 나를 미워하고 악선전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 쉬운 게 아닙 니다. 나를 저주하는 사람을 축복하는 것 아무나 하는 일이 아입니다. 여러 분 우리는 이렇 때마다 우리는 만인의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을 원합니다. 예수님은 아무런 흠과 죄가 없으신데 우리 죄를 대신해서 십 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십자가 위해서 자기를 못 박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이 지금하 는 일을 몰라서 그럽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면 용서 못할 죄가 어디에 있 겠습까 선한 사람은 원수와 다투지 않습니다.

잠언에 보면 "의인이 악인 앞에 굴복하는 것은 우물 흐리어짐과 샘이 더 러워짐과 같다." 그랬습니다. 의인과 악인이 다투면 으례히 악인이 이기지 요. 그러나 의인이 악인 앞에 일시 굴복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물 물이 잠 시 흐려지는 것과 같다. 그 말입니다. 나쁜 사람이 조용하고 맑은 우물물에 와서 막대기로 휘저어 놓으면 잠시 동안은 그 맑은 물이 흙탕물로 변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나 오래갑니까 곧 맑아집니다 왜요 샘물 이 맑은 물이 계속 솟아나기 때문에 곧 깨끗해집니다. 의인이 악인 앞에 잠 시 굴복하는 것이 완전한 실패는 아닙니다. 결국은 의인이, 선이 이깁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이 나에게 악하게 굽니다. 그러나 내가 대항하지 아니하 면 그 악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가령, 어떤 사람이 무슨 물건을 하나 가져 왔는데 내가 그 물건을 받지 아니하면 그 물건을 어떻게 할 겁니까 가지고 자기 집에 돌아갈 겁니다. 어떤 사람이 나를 저주하는데 내가 그 저주를 받 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 저주는 그 사람이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러므로 여러분 함부로 저주하면 안됩니다. 그 사람이 저주 받을 일 안했으 니 그 저주가 누구에게 옵니까 나에게 옵니다. 그러므로 될 수만 있으면 자주 칭찬을 칭찬 자격이 없으면, 축복 받을 자격 없으면 그 축복이 누구에 게 옵니까 여러분 성경의 교훈이 얼마나 적그적인지 몰라요.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생활입니다. 악을 악으로 대하는 일 은 보통 사람들이 하는 일이고, 악을 선으로 대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만 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예수님 말씀하셨습니다.'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 어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힁게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내 오른 빰을 치거든 왼 뺨도 돌려대라.' 또 '너희 이웃을 사랑하고 내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던 말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 핍작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 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라' 말씀했습니 다.

 여러분 인내의 열매 맺게 되시를 바랍니다. 좀 분한 일이 있어도, 억울한 일이 있어도, 어려운 일이 있어도 성령으로 예수님처름 오래 참는 열매를 맺읍시다. 그리고 자비의 열매를 맺게 되시를 바랍니다. 불상한 사람 돌봐 주는 자비의 열매 맺을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 다. 그리고 양선의 열매, 착한 일의 열매 맺게 되시를 바랍니다. 선으로 악 을 이기는 승리의 생활을 해서 우리 모두 하나님의 자녀다 하는 인정을 받 는 승리적인 삶을 사는 여러분 모두 되시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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