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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부르심과 아브라함의 반응2 (창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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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각 절의 주해

< 1절 >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이 구절은 한 사건이 시작되는 점을 암시하지만, 사실 그 보다 먼저 소개된 구절들이 있다. 그것들은 11장 27절부터 32절로서, 아브라함의 정체와 그가 처한 환경에 관한 정보를 제 공한다. '너는 …가라'라는 도덕적 명령을 함축하고 있는 여격이 사용된 점, 2절까지에 걸쳐 다섯번이나 [카] ^ 로 발음되는 인칭대명사 접미어나 동사의 주어가 사용된 점,그리고 본토, 친척, 아비 집으로 점층적인 맛을 느끼게 하는 단어가 사용된점 등은 아브라함에게 제시된 하나님의 명령이 심각한 것이라는 점을 독자들이 시각적이고도 청각적으로 느끼게 만든다. 11장 31절에 의하면 이 절에서 암시되는 본토는 하란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준행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점을 아셨기 때문에, 그가 떠나야 하는 대상들을 보다 일반적인 것으로부터 보다 개인적인 것으로 이르게 하셨다. 즉, 먼저 그가 살던 땅을 언급하고, 다음에는 친척을, 그 다음에는 아비 집(가장 가까운 친척들)을 언급하셨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하신 이유에 관해 학자들의 견해가 분분하다. 베스트만은 아브라함과 그의 유목민 부족들이 그 당시에 자유롭게 이주해 다닐 수 있었던 상황임에도 불구 하고 떠나도록 명령을 받은 것은, 그들이 어떤 위기적인 상황에 직면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시려는 의도에서였다고 이해한다. 그러 나 벤함은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가 하란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는 점 (11:31-32), 그 이후에도 이삭과 야곱의 아내를 찾기 위해 하란으로 사람 들을 보낸 일 등을 근거로 해서 베스트만의 견해가 합당하지 않다고 본다.

벤함을 비롯하여 궁켈(H. Gunkel), 스키너 등은 하나님의 명령이 아브라함 의 믿음을 시험하는 것으로 간주했는데, 이러한 견해는 창세기 22장 1절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유사한 형태로 명령하시는 내용과 비교해 볼 때, 그리고 그 명령을 하시는 이유가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시기 위한 것임 을 고려할 때 수긍할 수 있다고 본다.

 여기에 덧붙여 생각할 수 있는 하나의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신적인 계획에 있어서 새로운 장을 여셨다는 점이다.

수많은 민족들과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의 의지에 따라 한 사람을 택하시고 그를 통해서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계획을 새롭게 나타내 보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브라함을 택하셔서 인간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하나 님의 선취적인 구원 행위에 감사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하나님께서 아브 라함을 부르신 것처럼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사람들을 부르셔서 그분의 구 원 활동을 이루어 가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우리가 그러한 부르심에 올바르 게 응답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2-3절> 이 절들은 1절에서 언급된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 조건 하에서 체험하게 되는 하나님의 약속들을 소개하고 있다. 왜냐하면 문법적으로 볼 때, '이 루다,' '복을 주다,' '창대케 하다,' '저주하다' 등의 동사들은 1절의 '가 라'는 동사에 종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절들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비롯하여 땅의 모든 족속을 축복하 신다는 약속이 핵심적이다. [바라크] ('축복하다') 는 동사에서 파생된 단어가이 절에서 다섯 개나 언급되고 있다. 이 동사는 구약성서의 다른 책들에서보다 창세기에서 더욱 빈번하게 나타나는데, 다른 책들에서 310번 언급되는데 비하여 창세기에서만 88번이 나타나고 있다. 구약성서에서 소개되 는 하나님의 축복은 철저하게 현세적이다. 이 세상살이와 관련이 있다.그것은 장수, 부귀, 평안, 풍년의 수확, 자녀의 번성함 등을 포함하는 개념이다(창 24:35-36; 레 26:4-13; 신 28:3-15). 아울러 구약성서는 이러한 축복을 제공하시는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 절들에서 다섯 번이나 강조되는 "내가"라는 외침이 이 사실을 단적으로 증거한다.

 2절에서 맨 먼저 소개되는 하나님의 약속은 '큰 민족을 이루게 하는 것이 다.' 이 약속은 조금씩 변화된 형태로써 18장 18절에서 언급되고 있으며, 이스마엘에게(17:20; 21:18), 그리고 야곱에게도(46:3) 언급되고 있다.

출애굽기 32장 10절에서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아닌 모세의 자손들이 큰 민족을 이루게 될 것을 약속하고 있다. 이러한 점은 하나님께서 각 시대 마다 그의 뜻을 따라 순종하고 살아가는 자들에게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제공하고 계심을 발견하게 한다.

 특히 여기에서 사용된 '민족'([고이])이라는 개념은 '백성'([암])이라는 개념과는 달리 정치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의 후손들을 통해 많은 인구와 넓은 지역을 지닌 국가가 되게 할 것을 약속하셨다. 유목민적인 생활을 하던 아브라함 과 그의 후손들에게 이러한 약속은 매우 기대되는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아울러 통일왕국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이 누리던 풍요를 하나님 의 약속의 성취로 이해했을 법도 하다.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라. 이 구절이 구약성서의 다른 부분들이나 고대 근동의 문헌들에서 왕과 관련되어 사용되고 있거나(삼하 7:9) 하나님을 묘 사할 때 사용되고 있는 점(수 7:9; 삼상 12:22; 시 76:2; 말 1:11)으로 미 루어 볼 때, 이 구절은 아브라함을 그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로 이해되게 하려는 하나님의 의도를 나타내고 있다. 아울러 어느 정도 역사가 흐른 뒤에 아브라함과 유사한 왕이나 지도자가 출현했을 때, 그도 아브라함처럼 높임을 받게 하는 근거가 되었다(삼하 7:9). 그리하여 이 구절은 족장들 의 이야기와 이스라엘의 역사를 연결지어 이해하게 하는 중요한 바탕이 되 고 있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이 구절은 두 가지로 해석되어 왔다. 하나는 수동태로 해석해서 '너는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너는 축복의 화신이 될 것이다'라는 해석이요(딜만, 프락쉬, 슈미트), 또 하나는 능동태로 해 석하여 '너는 다른 이들에게 축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라고 이해하는 것이 다(카일, 델리취, 볼프, 베스트만). 위의 해석과는 조금 특이하게, 벤함 은 이 구절이 사용된 스가랴서 8장 13절에 근거하여 '하나님께서 다른 이 들을 아브라함처럼 축복하실 것이다'라는 의미로 이해했다. 궁켈, 스키너, 스파이저 등은 이 구절을 '그 이름이 축복이 될 것이다'로 바꾸기를 선호 하지만, 이 경우는 사람에게서 사람에게로 축복이 전이되는 성격을 약화시 키는 결과를 초래하기에 합당하지 않은 해석으로 간주된다.

 3절에서 언급되는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 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라는 구절은 교차대구법을 사용하고 있는 시 적인 구절이다. 창세기 27장 29절과 민수기 24장 9절에서도 이와 유사한 구절들이 언급되고 있다. 구약학자들은 후자의 구절들이 본문에 언급되는 구절보다 더 오래된 것으로 간주하면서, 본문의 구절은 이것들을 보다 발 전시키고 또 인격적인 하나님과 연관시켰다고 보았다. 2절에서 언급된 축 복들이 발전적인 삶의 형태를 비추어 주고 있다면, 3절의 이 구절은 삶의 보호적인 형태를 소개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이 아브라함에 게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그들에게 합당하게 대하신다. 하나님께서 그 의 백성들을 괴롭히는 적들로부터 그들을 보호하시는 행위도 그의 백성들 에게는 크나큰 축복이 된다. 특히 물질만능주의 시대와 과학주의 시대가 만들어 낸 수많은 두려움과 공포의 요소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주위에 공 존하고 있는 시점에서 이 구절이 주는 위로와 평안은 의미 있는 것이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구절은 하나님의 축복 을 받는 대상이 단순히 그의 택한 백성들만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족속들이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복을 얻게 된다 는 말은 하나님으로부터 택함받은 백성들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전하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암시적으로 가르치고 있다(사 49:6).

 < 4절 > 이에 아브라함이 … 갔고 ([웨옐렉]). 이 구절은 그가 1절에 언급되는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렇게 아브람이 하나님께 순종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 갔다는 구절이 첨 가되고 있다. 델리취, 궁켈, 프락쉬, 딜만, 야콥, 폰라트 등이 아브라함 의 행동에서 순종하는 면을 발견하고 있지만, 베스터만은 그가 단지 임박 한 위기를 피하기 위해 떠났다고 이해하고 있다. 이때의 아브라함은 정해 진 목적지도 없었고 여정을 안내해주는 지도도 가지지 않았다. 그 당시의 유목민적 삶의 풍습 속에서 소수의 사람들이 가족을 떠나 낯선 곳으로, 다 른 부족들이 거하는 곳으로 간다는 것은 많은 위험을 감수하는 행동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떠났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행동에 대해 '아브람의 묵시록'을 기록한 후대의 해석 자들은 그가 조상들의 종교를 거부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는 종교적인 해 석을 가하고 있지만, 아브라함의 행위에 대해 본문이 제시하는 가장 단순 한 실마리는 그가 여호와의 말씀에 따라 갔다는 점뿐이다. 이것에 근거해 서 우리는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표본으로 삼을 수 있다.

롯도 그와 함께 갔다. 이 구절은 11장 27절부터 31절에서 언급되는 서론 부분을 독자들이 이해하고 있다는 전제 속에 언급된 것이다.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 오세였더라'라는 구절은 아브라함이 그의 아버지가 죽기 육십년 전에 하란을 떠났다는 점을 시사한다(11:26, 32).

이 점은 아브라함이 그의 가족들에게 충성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르는 것을 더 중요하게 간주했다는 점을 암시한다.

 < 5절 > 이 절은 11장 31절과 유사하면서도 또한 대조점을 많이 지니고 있다. 데 라는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했으나 하란에 정착하여 거기서 죽었고, 아브 라함은 결국 가나안에 도착했다. 둘 다 친척들을 데리고 다녔지만, 아브라함은 '모든 소유'(움직일 수 있는 재산)와 '얻은 사람들' (종들을 암시함)도 동반했다. 그가 이러한 소유들을 가지고 다녔다는 점은 이후에 그가 이방의 왕들 앞에 서는 사건들을 독자들이 쉽게 이해하게 하기 위해 필요한 정보가 된다(12:16; 20:14). 가나안 땅의 영역에 대해서는 10장 19절에서 간단하게 언급되고 있으며, 민수기 34장 2절부터 12절에서 보다 자세하게 언급되고 있다.

 < 6절 > 아브라함이 그 땅을 통과하여. 이 구절에서 그 땅은 가나안 땅을 뜻한다.

그가 처음 머문 곳은 세겜인데, 이곳은 가나안의 도시들 중에서 가장 오래 된 곳들 중의 하나이다. 이곳은 기원전 이천년 경에 매우 중요한 지역이 었으며, 구약성서에서도 빈번하게 언급되고 있다(33:18; 35:4; 37:12-13; 여 24:1; 삿 9:6; 왕상 12:1). 여호수아서 20장 7절에 따르면 그 땅의 중 앙에 위치하고 있었다.

'모레 상수리나무' ([엘론 모레])는 난해한 단어이다. [엘론]의 정체에 관해 학자들의 견해가 분분하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이것을 테 레빈나무 terebinth 로 번역하고 있는데, 조하리 Zohary 는 이것을 상수리나무로 간주하고 hla 를 테레빈나무로 본다. 그는 다볼 산의 상수리나무가 보다 큰키를 보이고 있기에 예배드리는 데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추정한다.

[모레]는 '교사'라는 뜻을 지닌다. 그러므로 아마도 신적인 예언을 얻을 수 있는 곳임을 암시한다(참고:삿 4:5:드보라의 종려나무 아래). 고대나 현대의 근동 지역에서나 우리 나라에서도 나무들이나 돌들이 신적인 예언을 받는 신성한 곳으로 간주된 점을 미루어 볼 때, 모레의 상수리나무도 가나안 사람들이 그들의 신들에게 예배를 드리던 곳으로 추정할 수 있 다(창 28:18-22; 35:8; 여 24:26; 삿 6:11, 19-20). 7절에 의하면 아브 라함은 가나안 사람들이 전통적으로 예배드리던 지역 근처에서 처음으로 하나님께 단을 쌓았다. 그에게 축복을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그 땅의 참 주인이심을 공포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하였더라. 이 구절은 아브라함이 하나 님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땅을 빨리 차지할 수 없었던 이유를 미리 설명한다(15:7). 그것은 이미 가나안 사람이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문의 7절과 창세기 17장 8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의 자손들에게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하실 것을 약속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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