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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은혜로 주신 자녀 (창 33: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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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어머니가 외출을 했다가 집에 돌아와보니, 국민학교 3학년인 딸아이가 제 나이에 걸맞지 않는, 아주 두꺼운 책을 읽고 있더랍니다. ‘무슨 책을 보니’하고 옆에서 보았더니, 책 제목이 [육아교육법]입니다. 어머니는 하도 어이가 없어서 “왜 그 책을 보느냐”하고 묻습니다. 그랬더니 이 어린아이는 “교육적으로 내가 교육을 잘 받고 있는지, 그것을 살피는 거예요”하고 대답하더랍니다. 요새 아이들이 이렇습니다. 지나칠 정도로 이기적입니다. 도덕성 이전에 실리부터 배우고 자랍니다. 본 게 그것이니까요. 철저하게 실리적인 인간으로 교육을 받고 있습니다. ‘공부해라’-그 말도 실리적인 것입니다. ‘열심히 공부해라’-이 말도 철저하게 이기적인 목적으로 소화되고 있는 것입니다.

어른들도 다를 것 없습니다. 현대를 가리켜 ‘비혼시대’ ‘불임시대’라는 말을 합니다. 옛날에는 못듣던 얘기입니다. ‘비혼시대’-결혼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미국에서는 결혼 연령의 40퍼센트, 일본에서는 60퍼센트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아마 머지않아 우리나라도 이제 결혼하는 사람을 만나보기 어려울 때가 오지 않을까 저어됩니다. 왜입니까 거추장스러워서 귀찮아서 결혼을 안한다고 합니다. ‘비혼시대’-앞서 말한 것은 엄청난 통계입니다. 그로부터 오는 도덕적, 윤리적, 정신적, 심리적 파괴가 연쇄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비인간화하여 가고 있는 것입니다. 정상적이 아닙니다.

그런가하면 ‘불임시대’입니다. 아이를 낳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아직 이에 대한 통계는 없다고 합니다. 일본의 경우를 보면, 두 사람이 결혼해서 평균

1.5명의 아이를 낳습니다. 그러니까 인구가 차츰 줄어듭니다. 그래서 걱정합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바람직한 가정에서는 자식을 낳지않고, ‘아이를 좀 덜 낳았으면 좋겠다’ 싶은 가정에서는 아이를 더 많이 낳는다고 합니다. 여기에 더 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장래도 세계도 하나님의 뜻도 전혀 상관하지 않고, 철저하게 이기적이고, 실리적이고, 자기 중심적입니다. 나 하나 편하게-그런 시대입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미 낳아놓은 자녀에 대한 문제입니다. 이미 태어난 자녀를 내다버립니다. 정확한 통계에 따르면, 줄잡아 1년에 4명의 아이가 버림을 받습니다. 한쪽에서는 내다버리고 한쪽에서는 이것을 수습하느라고 애씁니다. 그러느라고 구청에서는 여간 고생이 아니라고 합니다. 내다버린 아이들-어떻게 하겠습니까 이 아이들을 누군가가 맡아서 키워야겠기에 알게모르게 이 문제에 관계하는 분들이 많은 고생을 하는 것입니다.

입양 문제도 그렇습니다. 이렇게 내다버려진 아이들이 입양됩니다. 국내 입양이 작년에 1천1백 명입니다. 또, 외국으로 아이들을 내버립니다. 외국 입양이 2천2백 명입니다. 세계적으로 아주 부끄러운 일입니다. 특별히 유럽에 이민가 있는 분들은 이것 때문에 고개를 들 수 없다고들 합니다. 입양되어 오는 한국의 아이들 때문이지요. 여러분, 어쩌다 이런 민족이 되었습니까 낳아놓은 자식을 외국에 팔아먹습니다. 이러고도 복받기를 바랍니까 이런 땅 위에 하나님께서 복내리시기를 바랍니까 참으로 큰 문제입니다.

가만히보면, 잘못된 격언들이 많습니다. 말조심해야 됩니다. 오늘을 기점으로 일생동안 이 말을 하지 않도록 맹세해보십시오. ‘무자식 상팔자다’-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이렇게 저주받을 소리가 어디 있습니까 무자식이 상팔자라니요. ‘자식이 원수다’-자식이 어떻게 원수입니까 어떤 이유로든지 간에 이 말을 했다면, 그 다음에 그 자식에 대한 장래는 묻지 마십시오. 기도할 자격이 없습니다. 어떻게 자식이 원수라는 말입니까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어쩌자는 얘기입니까 야구선수가 되겠다며 방망이를 들고 아무데서나 휘두르는 어린아이가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유리창을 깨뜨렸어요. 그러니까 어머니가 속이 상해서 아이에게 말합니다. “이 웬수야, 너 때문에 정말 못살겠다. 이 주름살 늘어가는 것 좀 봐라.” 그런데 요새 아이들이 말 그대로 그렇게 쉽게 받아들입니까 이 아이, 낯빛도 바뀌지 않고 제 어머니한테 대꾸합니다. “어머니는 얼마나 할머니 속을 썩였으면 할머니 얼굴에 주름살이 저렇게 많습니까” 어디에다 대고 함부로 얘기를 하는 것입니까 어수룩한 세상이 아닙니다. 똑똑히 정신차리세요. 말 한마디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말 한마디가 아이들을 가출시키는 것입니다. 아이가 집을 나갔다며 저한테 와서 우는 어머니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에게 저는 꼭 물어봅니다. “아이 보고 ‘나가 죽어라’고 말을 한 일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종종 그런 말을 했다고 대답합니다. 그래서 저는 “그래요 그런데 아직 죽지 않았으니 효자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무슨 소리입니까 어떻게 감히 그런 말을 할 수 있습니까 이러고서 무슨 교육을 논하고 있는 것입니까 문제는 자녀의 존재 가치를 어떻게 평가하느냐입니다. 이에 따라서 자녀들의 마음 속에 자기 존재의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쉽게 이런 말을 합니다. “그 자식 키워서 언제 덕보려나” 간혹 남의 자식을 양자로 들인 집이 있습니다. 그럴 때에도 쉽게 하는 말이 “남의 자식 키워서 덕볼까”입니다. 또, 계모로 들어간 어머니가 전처 자식을 키우느라고 정성을 들일 때에 옆에서 꼭 쓸데없는 입방아를 찧습니다. “제 자식 키워도 덕 못보는 세상에 남의 자식 키워서 뭐하려고.....” 도대체 이 입방아가 문제입니다. 자녀는 결코 노후 의존 대책이 아닙니다. 이 아이 키워가지고 덕보겠다고 하는 망상이, 그런 발상이 얼마나 잘못된 것입니까 덕을 보기는 뭘 봅니까 무슨 효도 받자고 자녀를 키우던가요 싹 잊어버리세요. 효도와는 관계 없습니다. 부모된 도리만 다하면 되는 것입니다. 내 부모님들이 나를 키워주었으니까 내가 내 자식을 키우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닙니까 자식 키우는 것이 무슨 되돌려받기 운동입니까 노후 대책이 어떻다는 말입니까 상관하지 마세요. 그것부터 신경을 쓰니까 얘기가 안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미국에 유학을 갔을 때, 처음에는 영어가 서툴러서 그런지 이런저런 실수를 많이 한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늘 마음에 두고 생각나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제가 어떤 장로님 댁에 초청을 받아서 하룻밤을 거기에 묵고, 다음날 미국 교회에 나가서 설교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장로님 가족과 저녁에 식사를 같이 하고, 한가하게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장로님 가족이라고는 그 두 내외뿐입니다. 그 부인이 제게 물었습니다. “어린애가 몇입니까” 그 당시 제 자식이 둘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들 둘입니다”라고 대답하였지요. “아, 그렇다면 사진을 좀 볼까요” 저는 가지고 있던 아이들의 사진을 보여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아, 참 귀엽군요”하십니다. 이렇게 아이 얘기가 오고가니, 저도 그렇게 물어보아야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부인에게 “이 댁에는 어린애가 몇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 부인이 목을 놓아 우는 것입니다. 엉엉 울어요. 저는 도대체 내가 무슨 말을 잘못했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어린애가 몇이냐고 물은 것밖에는 없는데 말입니다. 남편되는 장로님이 울지 말라고 달래도 부인은 자꾸 웁니다. 그렇게 한참을 울고나서 제게 들려준 얘기는 이렇습니다. 장로님 내외분은 결혼을 일찍 했습니다마는 공부하고, 사업하고, 또 무엇을 하고.... 여러 가지 하는 일들 때문에 아이를 낳지 않았답니다. 계속 피임을 했습니다. 서른다섯 살이 되어서야 ‘이제는 어린애를 갖겠다’고 생각했는데 아이가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두 분 다 아무런 병도 없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그 전에 중절 수술을 몇 번 한 일이 있답니다. 이제는 아무리 애써도 아이를 가질 수가 없습니다. 이것 때문에 수술받고, 병원에서 치료받고, 갖가지 방법을 써보아도 허사입니다. 그래서 어린애가 몇이냐는 말을 듣자, 그만 너무너무 서러움이 복받쳐서 우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참 난처했습니다. 할말이 없었습니다. 이럴 때에는 도대체 어떻게 말해야 됩니까 정말 곤란했던 그 때에 체험을 저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자녀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내려주신 가장 큰 축복입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복이 다 당대에 끝납니다. 그러나 축복은 자녀를 통해서 계계승승 이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실 때에 그 첫째가 자녀의 복이요, 둘째가 땅의 복입니다. 자녀의 복은 영원성을 말하고, 땅의 복은 권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시편 127편 3절은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자녀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업이요, 또한 가장 귀한 기업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아브라함의 손자인 야곱의 이야기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야곱을 두고 이렇게 질문하는 것을 들을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등이 나옵니다. 이 가운데 야곱은 인간적으로 참 못된 사람인데, 하는 짓도 아주 나빴는데, 어찌하여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복을 주셨습니까”-바로 며칠 전에도 강의실에서 제가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왜 복을 주셨는지 모르겠다’-그러나 한 가지는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을 보시고, 그 중심을 보십니다. 사람이 보는 그것과 같지 않습니다.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것의 야곱의 축복관입니다. 야곱은 수고도 하고, 노력도 하는, ‘노력형 인간’입니다마는 특별히 축복을 받아야만 한다는 그런 간절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이것 때문에 그는 실수합니다. 그래도 그 마음만은 높이 평가해야 합니다. 또한 이 축복은 무형적인 것이었습니다. 야곱은 ‘복을 주십시오’-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땅뙈기를 주십시오’ ‘자식을 주십시오’-그런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아야겠다는 것입니다. 무형적이요, 미래지향적인 것이었습니다. 특별히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이 종교적인 관계에서,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야 한다’-그 마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철저한 사람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이야기는 라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라헬을 야곱에게 주셨습니다. 야곱은 라헬을 사랑합니다. 무려 14년에 걸쳐서 연애를 하고, 기다리고 기다려서, 라헬은 드디어 야곱의 아내가 됩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14년을 연애하고, 결혼해서 야곱의 아내가 되었습니다마는 그녀는 이상하게도 아이를 갖지 못합니다. 그 언니는 아들 넷을 낳았습니다. 언니 레아가 아들 넷을 낳는 동안에 동생 라헬은 아이를 못낳았습니다. 그러니 이 질투 많은 여자가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그런데 자기가 괴로우면 괴로운 것이지 덤터기로 남편을 괴롭힙니다. 라헬이 야곱에게 하는 말을 우리는 창세기 30장에서 읽을 수가 있습니다. “나로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창30:1)” 대개 보면, 질투하는 사람들이 죽는다는 소리를 잘 합니다. 걸핏하면 죽는다고 합니다. “내가 죽겠노라”-이에 야곱이 노를 발하여 대답합니다. “그대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창30:2)”-야곱의 중요한 신앙고백이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너를 사랑할 수도 있고, 내가 너와 결혼할 수도 있고, 너와 함께할 수도 있지만, 자식을 가지고 못가지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내 능력 밖이다, 그런데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 내가 너를 사랑할 수는 있어도 너로 자식을 낳게 하는 것은 내 재주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여기서부터 생각해야 합니다. 인간의 노력과 수고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위에 하나님의 허락이 계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야 합니다. 더구나 생명 문제에 관한한, 엄청난 은혜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보면, 야곱이 20년 간을 형님과 원수로 지내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자식과 모든 재산을 거느리고 이제 형님을 만납니다. 원수로서가 아니라 형님과 동생의 관계로 만나게 되는 바로 그 순간이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형님이 깜짝 놀라서 묻습니다. 혼자서 도망갔던 야곱이 큰 일행을 이끌고 오는 것을 보고, 이 사람들이 다 누구냐, 이 청년들이 다 누구냐 하고 묻습니다. 본문 5절은 그 때에 야곱이 대답한 말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주의 종에게 은혜로 주신 자식이니이다”-대단히 중요한 고백입니다. ‘은혜로 주신’ 것입니다. 그는 확실히 믿고 있습니다. 자녀는 은혜로 주신 것입니다. 자기 나름대로 수고도 있겠고, 노력도 있겠습니다마는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 노력도, 내 공로도, 내 아무것 때문도 아니요, 하나님께서 은혜로 내게 주신 것입니다.

결혼해서 자식을 낳은 사람이 세상에 어디 한둘입니까마는, 제가 만난 한 사람은 결혼을 해서 자식을 낳았는데 얼마나 눈물을 흘리면서 감사하는지 말도 못합니다. 왜 그렇게 감사하느냐, 그 이유는 저만이 아는 그녀의 신앙고백에 있습니다. 그녀는 결혼 전에 애인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결혼 전에 임신해서 중절 수술을 한 일도 있습니다. 이런 경험이 있으나 지금은 결혼을 해서 잘살고 있습니다. 나같은, 죄인, 이제 결혼을 한 것만도 감사한데 하나님께서 내게 자식을 주실까, 생각했답니다. 결혼하고 3년이 지났는데도 자식이 없었습니다. 아차, 아무래도 나는 과거가 있기 때문에 무자식으로 사는가 했는데, 3년 후에 자식을 낳았습니다. 보통 자식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향하신 용서요 구원입니다. 내 과거를 묻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여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 너무너무 감사해서 그 자식을 안고 울면서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가 은혜로서입니다. 큰 은혜를 내게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내게 주신 것입니다. 내게 맡기신 것입니다. 이 믿음 하나만 가지고도 가정교육은 충분합니다.

죄송하지만 제가 어렸을 때에 말썽을 좀 부리든가 하면, 제 어머니께서 저를 앞에 놓고 한마디 하십니다. 오직 한마디입니다. 말도 안하고 조용하게 “내게 너를 어떻게 낳았는데.....” 어머니가 마흔한 살에 저를 낳으셨거든요. 내가 너를 어떻게 낳았는데-이 말 한마디에 저는 꼼짝을 못했습니다. 10년 동안을 기도해서 너를 낳았는데-이 말이 저한테는 얼마나 무서운 매인지 알 수 없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것은 다 세상에서 배우지만 기도는 어머니로부터 배웁니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현재의 생활 전부와 내가 장차 바라는 생활 전부는, 천사와 같은 나의 어머니에게서 배운 것이다.’ 그는 어머니를 천사라고 부릅니다. 그의 어머니는 계모입니다. 친어머니도 아닌 그 어머니가 에이브러햄 링컨에게는 천사와 같은 분으로 비치고 있습니다. 천사와 같은 그 어머니, 바로 그분에게서 배운 것이라고 링컨은 말합니다.

우리는 자녀 교육에 있어 종교성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게, 하나님 앞에서 은혜로 받은 것입니다. 그런고로 다른 것은 없어도 좋습니다. 자녀를 통하여, 자녀 때문에 하나님 앞에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여러분의 모습을 본 그 자녀라면, 절대로 곁길로 갈 수 없습니다. 감사 하나로 자녀 교육은 충분합니다. ‘나는 너 때문에 행복하다’ ‘나는 너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나는 너로해서 생에 보람을 느낀다’-바로 이것입니다.

자녀는 말로 키우는 것이 아니라 생활로 키운다고 합니다. 원만한 부부 사랑, 부모의 신앙적 자세, 안정된 가정, 교회를 바로 섬기는 경건과 그 가치관-이것으로 충분합니다. 자녀는 귀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배운다고 합니다. 모든 가치관과 기준이 부모로부터 그대로 물려받은 것입니다. 은혜와 감사, 은혜로 주신 바에 대한 감사한 그런 응답-오늘도 여러분이 자녀를 향해서 이래라 저래라 긴 말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에 너를 주신 것을 나는 하나님께 이렇게 감사하노라’-이 한마디로 교육은 충분한 것입니다.

보십시오. 은혜로 주신 자식들입니다. 이 야곱의 고백이 모든 문제의 근본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기 도>-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귀한 가정을 주시며, 귀한 자녀를 주신 것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은혜로 주신 자녀에 대한 바른 감사가 없었기에 원망과 불평으로 일관되고, 축복대신 저주가 많은 이 무서운 우리의 생활을 불쌍히 여겨주시기를 기도하옵나이다. 진정 은혜로 주신 자녀에 대하여 참감사가 있고, 주의 은혜에 대한 찬송과 기쁨이 있으며, 특별히 자녀들을 위해서 수고하는 것 그 자체를 하나님께 기뻐하며 감사할 수 있는 은혜의 가정들이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은혜의 자녀, 약속의 자녀로 하나님의 축복이 이어지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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