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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의인의 기도 (합 02:1-4, 눅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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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이스라엘은 찬란했던 다윗의 권세와 솔로몬의 영화도 사라진 지 오래되고, 백성들은 이방 민족들의 틈바구니에서 암울한 현실을 개탄하면서도 어찌할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내외 상황이 호조될 기미는 없었고, 과중한 세금 부담과 노동력 착취로 인하여 신음하고, 신흥 바벨론은 유다를 괴롭혀 이미 몰락의 기운이 감돌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이 당하는 폭정의 압박은 좀처럼 삶의 숨통을 열어놓을 줄 모르고, 절망과 한숨과 고통의 틈바구니에서 하나님의 영광이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던 바로 그때 한 예언자의 절규와 신탁이 우리의 가슴에 새로운 파문을 일으킵니다. 여기서 우리는 참된 기도자의 자세와 의인의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크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1. 기도자의 바른 자세

오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기도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복종의 자세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마치 예수께서 드린 겟세마네의 기도를 상기시켜 주는 듯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 자체에 헌신이 담겨 있는 것이요, 이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결단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오히려 듣는 것입니다. 그 분의 뜻이 나를 통하여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오늘 한 예언자는 그 마음 속에 울분과 회의 속에서 하소연하듯이 고통스러운 외침을 발하지만, 그는 결국 하나님의 하시는 말씀에 초점을 두고 대답을 기다립니다. 성루에 서서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는 악인들 속에서 선한 자들이 고통당하는 현실을 푸념하듯이 하나님께 묻지만(1장), 본래 예언자란 일체의 자선행위든 인권행위든 자의가 아니 천명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요, 천명이 바뀔 때에는 또한 그에 순응하는 것입니다. 예언자란 그의 무게 중심을 땅에 둔 것이 아닌, 하늘에 둔 자입니다.

예언자는 양심이나 용기라는 명목으로 활동하는 인간이 아니라, 신의 말씀에 따라 움직입니다. 하나님이 침묵할 때는 본성대로 처신하며, 흙으로 지어진 인간의 나약함에 떨어질 때에는 아이처럼 떼를 써서 신의 침묵을 깨게 하는 것으로 힘의 근원을 삼는 존재입니다. 예언자는 인간의 판단으로 볼 때 이랬다 저랬다,하는 신의 말씀까지도 그대로 수용해야 하는 어려움을 짊어진 존재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관념이나 이념이 아니기에 인간의 예측을 불허하는 것이요, 따라서 예언자는 자기의 판단이나 명예를 죽이고 신의 의지에 전 존재를 걸어야 하는 '신에게 사로잡힌 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와 같은 전적 의탁, 전적 신뢰를 말하는 것이요, 기도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기다리는 자세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2. 의인의 기도는 응답됩니다.

역사상 삼대악처(三大惡妻)라 하면 욥의 아내와 소크라테스의 아내와 존 웨슬리의 아내를 꼽습니다. 욥의 아내는 고통 중에 신음하는 남편을 보고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어버리라고 했습니다. 그녀는 남편의 고통에 고통을 더해 주는 아내였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아내는 남편을 학대하고 애정을 주지 않음으로써 남편으로 하여금 젊은 남자들과 어울리게 했습니다. 또 웨슬리의 아내는 남편에게 온 모든 편지를 뜯어보기까지 하면서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남편을 괴롭혔습니다.

아내가 악하면 그 남편의 사생활은 완전히 무너지고 맙니다. 사생활의 기쁨이 무너지면 그 남자는 힘을 쓰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문이 닫히면 창문이라도 열어서 숨을 쉬게 하십니다. 이런 위대한 사람들이 가정에서 기쁨을 누리고 거기만 틀어박혀 있었다면 세계가 알아주는 인물들이 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욥은 그의 아내에게서 받지 못한 위로를 하나님의 품에서 받으면서 하나님의 깊은 세계를 알았고, 소크라테스는 아내의 학대에 쫓겨 생각하는 세계로 들어갔고, 웨슬리는 그의 아내 때문에 하나님 앞에 더 무릎을 꿇게 되었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게 되었을 때 그는 승리할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무엇이나 좋습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게 하는 것이라면 달게 받으십시오. 그것이 질병이든지 당신을 괴롭히는 사람이든지 무슨 상관이겠습니까(고후 12:7-10).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교만한 자, 정직하지 못한 자를 물리치시고 의인의 기도를 찾으시는 하나님께 구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인내와 용기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3. 인내와 소망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오늘 신약의 말씀 중에 어떤 과부(chera:khay`-rah)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봅니다. 과부는 힘없고 무력한 사람의 전형적인 인물입니다. 그녀의 구하는 바는 정의로운 판단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하여 그의 내림때까지 희망을 포기하지 말고 기도할 것을 제자들에게 격려하셨습니다. "오래"(makrothumeo:mak-roth-oo-meh-o)라는 말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다"는 말로서 "더딘,느린"의 뜻이나, "참을성 있는"이라는 뜻이 됩니다. 의인의 기도는 이해할 수 없고, 볼 수 없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 것(히 11:1)"입니다.

우리의 안타까움은 지식의 부족에 있는 것이 아니고 성결의 부족에 있으며, 이는 우리가 지식이 많은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의(義)에 대해 묵상하고, 깨어있고, 주시하고 견고하여 항상 충분한 기도로써 충만된 생활을 영위치 못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언자는 외칩니다. "하나님을 믿으라, 그는 모든 수수께끼를 통해 세계사를 자신의 목표쪽으로, 즉 악인은 멸망하고 의인은 살도록 조종하신다!"
우리는 흔히 내 자신의 시간 개념 속에 하나님의 뜻을 맞추려는 조급함을 갖고 기도합니다. 빠르고 신속한 배달꾼의 동작을 하나님께 요구하는 기도는 믿음의 자세가 아닙니다.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특별한 목적(치병, 사업번창, 선거당선)을 갖고 교회를 찾거나 신앙에 입문하는 자들이 그들의 소기의 목적을 이루지 못했을 때 교회를 떠나거나 신앙을 버리는 쓸쓸한 모습들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시간 계획 속에 오히려 우리가 응답하고 순종하는 자세를 가질 때 늦은 비와 이른 비를 골고루 내리시면서 역사하십니다. 과부의 기도는 절박한 상황에서 좀처럼 포기할 줄 모르는 기도의 전형이요, 수치와 치욕을 감수하는 고통을 참고 인내하는 기도의 모본입니다. 예수께서는 바로 제자들에게 이러한 믿음과 기도를 권고하셨습니다. 사실 우리의 요구를 알고 계시고, 우리의 요구를 채워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가 또한 기도도 할 수 있는 자라고 봅니다.

4. 기도

기도의 횟수와 기도의 시간적, 양적인 것으로 자랑을 말고 폭넓은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과, 그의 계획과 뜻을 한번 들어보려는 기도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절실히 요구됩니다. 기도로써 새로워지고,기도함으로써 마음의 평안을 누리고, 기도함으로 삶의 윤택함을 얻는 성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권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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