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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얍복에 있는 유다 (호 12:1-14)

첨부 1


호세아 선지자가 50여년 간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종으로서 말씀의 사역을 감당하는 동안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은 각각 제길을 걸어갔습니다.
솔로몬 왕이 죽은뒤 그 아들 르호보암은 북쪽 백성에게 너무 금하게 밀어붙여 그들의 반발을 사게 되었습니다.
북쪽 사람들은 과중한 부담을 좀 덜어 달라고 했지만 그의 대답은 오히려 짐을 더 지워 주었으므로 그 결과 북쪽의 10 지파와 남쪽의 두 지파가 갈라지는 비참한 역사적 사건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주전 721년 앗수르에 의해서 북 왕국이 무너지기까지 거의 200년간 남북은 분단 상태에 있었습니다.
우리 나라가 1945년 이후에 49년이 되도록 분단의 비극을 안고 있는 것도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인데 2백년이 넘도록 갈라져 있을 때의 그 민족의 설음이 어떠한 것인가를 짐작이 갑니다.

1.남북의 공통 분모
“여호와께서 유다 와 쟁변하시고 야곱의 소행대로 벌 주시며 그 소위대로 보응하시리라”(12:2)

하나님 앞에서 두 왕국의 공통 분모는 하나님을 잊어버렸다고 하는 점입니다.
그래서 호세아는 12장 2절부터 남유다에 대해서 말씀하기 시작합니다.
이제까지 북이스라엘 대해서만 예언을 하다가 갑자기 남유다에 대해서 예언을 하기 시작합니다.
유다의 죄는 이스라엘의 죄와 매우 비슷합니다.
유다의 법죄를 말할 때에 호세아는 여호와께서 유다와 쟁변하신다는 말로 말씀했습니다.
4장 1절에는 이스라엘과 쟁변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말씀했습니다.
북이스라엘이 법한 죄를 남유다가 지금 재연을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북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난 죄값으로 망했던 것처럼 남 유다도 하나님 앞에 돌아오지 못하면 받아야 할 죄값은 멸망 밖에 다른 것이 없다는 것이 12장의 메시지입니다.
이것은 너무나도 엄연한 진리이고 성경 전체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무서운 예언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베푸신 에브라임은 어떤 자였습니까.
위선과 속임으로 하나님을 에워쌌던 자였습니다.
‘바람’은 공허한 것을 말합니다.
배부르게 먹기는 먹는데 건강에 필요한 것을 먹는 것이 아니라 헛배만 부릅니다.
‘동풍’은 팔레스틴의 동편 사막으로부터 불어오는 열풍으로 건조하고 뜨겁고 황량한 바람입니다.
앗수르를 상징합니다.
에브라임은 헛것을 쫓아간 것입니다.
에브라임은 힘의 균형을 위해서 앗수르와 애굽과 동맹을 맺었습니다.
한 세력과 다른 세력을 맞붙어 싸우게 하여 어부지리를 얻는 방법은 정치 게임에서 항상 사용되고 있는 방법입니다.

오늘날은 하나님의 교회에서 심판이 온다고 하는 예언의 말씀이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인에게 방언 하기 보다 예언하기를 즐겨 하라고 한 이 예언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불교 신자들이 샤미니즘과 융합하므로 불교가 타락한 종교가 되었듯이 기독교가 불교처럼 샤미니즘적인 방법으로 예언을 함부로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말씀은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구약은 예언과 율법의 책이라고 했습니다.
이 책들은 전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입니다.
예수님이 베들레헴에 오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재림하신다고 하는 말씀이 창세기에서부터 말라기까지 맞추어진 초점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구약의 모든 말씀이 다 이루어졌는데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은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재림입니다.
그날은 바로 심판의 날입니다.
바울 선생님이 방언 하는 것보다 예언을 하라고 하는 뜻은 예수님에 관한 예언을 하는 중에 이루어지지 않은 예수님의 재림에 관한 말씀을 열심히 증거하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심판의 사건, 재림의 사건을 열심히 전하라는 말씀입니다.
교회가 예수 재림에 관하여 메시지가 흐려지면 교회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에게서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즐거운 기대와 열심히 사라지면 교회는 흔들리게 됩니다.
바울 신학을 연구해 보면 바울의 모든 윤리를 예수님의 미래, 다시 말해 예수님의 재림에 맞춰 놓았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윤리적으로도 깨끗하게 살게 되고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려고 교정도 하고 회개도 하게 됩니다.
내 인격이 깨끗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이 재림하시고 심판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바른길을 가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불교의 철학은 한마디로 원(써클)입니다.
돌고 돌아 끝이 없습니다.
끝이 없이 억겁을 지나는 것이 불교 철학인데, 기독교 역사관은 처음과 끝이 있는 직선적인 역사관입니다.
기독교는 반드시 시작이 있고 반드시 끝이 있습니다.
알파와 오메가입니다.
처음과 나중, 시작하신 이가 있고 마치신 이가 있습니다.
적당히 넘어가겠지 하고 그냥 살다가 끝이 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성경의 역사는 분명히 마지막이 있습니다.
심판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두려워 떨며 하나님 앞에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2.호세아의 권면
호세아 선지자는 유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는 것을 더 이상 볼 수 없어서 심판을 외치며 돌아오기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1).야곱과 같은 유다
“유다와 쟁변하시고 야곱의 소행대로 벌주시며”(12:)

호세아는 여기서 유다를 야곱과 동일시 하고 있습니다.
이삭과 리브가에게서 난 쌍둥이 형제중 한 사람인 야곱은 날 때부터 형님의 발꿈치를 붙잡고 나왔다고 해서 이름이 야곱이 되었습니다.
이 말은 뒤통수를 쳤다는 말입니다.
남을 해롭게 하는 일은 결국 남을 속이는 일입니다.
야곱의 성품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아버지도 속이고 형도 속이고 오늘 표현대로 하면 일등 사기꾼입니다.
결국 외삼촌 집으로 도망가서 20년 일한 대가로 두 딸을 아내로 삼는 일까지 저지릅니다.
그러나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형님이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다가 하나님과 겨루는 장면이 오늘 본문에서 회상됩니다.
로마서 9장 13절에는 말라기서를 인용하면서 하나님이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고 기록하고 잇습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사랑하신 것은 그의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쁘신 뜻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입니다(롬5장).
그러므로 비록 야곱처럼 간사하고 속이고 남을 해롭게 하는 행위가 우리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니 낙심하지 말고 외로워하지도 말고 곤고 하지도 말고 감사와 평강과 기쁨을 소유해야 합니다.
야곱은 도망가면서 벧엘에서 돌베개했던 돌로 하나님 앞에 단을 쌓고 고향으로 돌아오게 하신다면 이 돌을 성전의 주춧돌로 삼을 것이며 십일조를 바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서원의 기도가 벧엘 뜰에서 이루어집니다.
그가 온 가족을 성결케 하였으니 곧 회개를 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겨루어서 환도 뼈가 부러지는 이을 통하여 그는 겸손하지 아니하고서는 하나님과 동행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선택받은 백성입니다.
우리에게 사기에 능숙한 면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택하셨기에 사랑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비행이 용납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징벌하실 것입니다.
다만 회개하고 돌이킬 때에 한없는 은총을 입게 될 것입니다.
항상 우리의 끝날이 도래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살아갑시다.
야곱의 성품을 버립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옷입읍시다.
사기 극을 벌이다가 죄인으로 낙착되지 망고 사랑의 찬가를 부르는 거룩한 성도가 됩시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야곱처럼 미천한 존재였던 것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죄의 종살이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하였기 때문입니다.

2).하나님께 돌아 오라
“그런즉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와 공의를 지키며 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라볼지니라”(12:6)

유다가 마땅히 취해야 할 자세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과 같은 너희를 살려주시고 사랑을 베푸셨으니 너희도 돌아와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고의를 지키라는 말씀입니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 거리를 빨리 왕래하며 공의를 행하는 한 사람을 찾아다녔지만 한 사랑을 찾지 못해서 결국 예루살렘이 망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렘5:1-2)
공의가 물같이 쏟아지는 이 시대에 우리는 하나님께로 돌아와 의와 진실과 사랑을 행해야 하며 인애와 공의를 지켜야 합니다.
인간의 역사는 하나님께 향한 태도가 인간을 향한 태도를 결정하여 왔습니다.
유다는 이웃에 대한 태도를 갱신하므로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여호와’는 하나님의 기념 칭호로서 세상의 모든 무가치한 신자로부터 구별시켜 주는 칭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위대한 조상을 대하신 하나님의 태도와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여 하나님께 돌아와서 이웃에게는 인애와 공의를 다하고 하나님께 대하여는 의무를 다하라는 권면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이켜야 할 유다 는 ‘사취를 좋아하는 자’라고 호세아는 말합니다(7절)
그는 유다를 에브라임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에브라임은 여기서 좋은 뜻으로 사용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에브라임은 부정한 것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죄가 있다고 표현을 하려고 애를 씁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장사하는 일에 정직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윤리적으로 부패한 백성들이었고 종교적으로 도덕적으로 부패한 사람들이었으므로 양심이 마비되어 상거래에서 부도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에브라임이 이와 같이 되었다고 호세아는 열변하고 있습니다

야곱이 얍복강 나루터에서 하나님의 앞에서 결정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이제 유다는 결단의 시기에 놓였습니다.
북이스라엘은 회복의 시기를 넘겨서 이미 하나님의 심판의 칼이 놓여졌고 남유다는 지금 결정하지 않으면 북이스라엘 같은 순간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오늘도 위선과 속임수가 삶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위에 올라앉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니다.
도마 위에 올려진 물고기가 소망이 없다면 심판대 위에 선 죄인이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회개하고 돌이키면 심판대에서 하나님의 품으로 옮겨집니다.

3).꿈을 가지라
“내가 여러 선지자에게 말하였고 이상을 많이 보였으며 선지자들을 빙자하여 비유를 베풀었노라”(12:10)

선지자의 사역은 늘 하나님의 말씀을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자기가 말하는 것이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것을 늘 기억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환상을 보여주는 거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무엇이라 말씀하시는지를 교회를 통해서 날마다 듣고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꿈을 가져야 합니다.
환상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6장을 보면 바울이 마게도니아의 환상을 가졌는데 그것은 그가 만들어 낸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때 환상이 생기는 것이지 자기의 어떤 생각을 늘어놓는 것이 환상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유다와 같은 결단의 순간에 놓여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과거에 우리를 구원하신 것으로 만족하시지 않고 현재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하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옛사람을 버리고 게을렀던 생활에서 헌신적인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고 속심령이 변해서 새사람이 되기를 원하시는데 바로 지금이 그러한 때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새로운 환상이 아름답게 펼쳐지는 시간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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