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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을 힘입은 용기 (삼상 3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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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대로 양을 치는 목동으로서 어려서부터 시와 악기에 재주가 많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음악가이면서 시인이 되었습니다. 또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전쟁터에 나갔다가 골리앗 대장을 죽이는 전쟁의 경험을 바탕으로 가는 곳마다 백전백승하는 전술가로 변신도 했습니다. 또 그는 한나라를 다스리는 왕으로서 훌륭한 정치가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많은 세월을 쫓겨다니는 삶을 살았습니다. 너무나 큰 고통을 사울왕 때문에 당하던 그는 결국 정치망명을 했습니다. 그 나라는 블레셋이었는데 다행으로 블레셋왕이 선처를 베풀므로 시글락이라는 곳에 거주할 수 있는 특혜를 얻었습니다.
쫓기는 삶을 살고 있어도 시글락에서 그런대로 평온한 삶을 살고 있는 어느 날놀라운 일이 발생했습니다. 유대나라의 사울왕이 진멸하지 못한 아말렉 군사들이 유대나라 백성의 일부가 시글락에 살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다윗이 없는 틈을 타 온 성을 불태워 잿더미를 만들어 놓고 처자들을 모두 사로 잡아가는 기가막힐 일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 광경을 목도한 다윗은 그 일행들과 함께 기력조차 없을만큼 심하게 통곡을했습니다. 형편이 이렇게 되자 다윗에게 충성을 하던 일행들이 다윗 때문에 당한 고을 참지 못하고 일제히 돌을 들어 다윗을 치려했습니다. 다윗은 깊은 근심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를 오늘 본문은 군급(窘急)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도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도 때론 이런 상황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럴만한 이유가 없는 것 같은데도 잿더미에 앉아 울기력이 없도록 탄식하는 때도 있는 것입니다. 구국공신이던 그가 축출당하여 마지못해 정치망명을 했는데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따르는 자가 600명이나 있을지라도 언제나 쫓기는 신세였습니다.
누구라도 짧은 고통에는 강할른지 모르지만 긴 고통에는 약하게 마련입니다. 현실은 어디를 가든지 쫓겨 다니는 사람에게는 냉혹합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들도 이상한 생각을 품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 있는 말씀을 중심으로 다윗이 잿더미에 앉을 수 밖에 없는 이유와 처자를 빼앗기고 노략질 당해야 할 이유가 어디있었는가를 살펴보고 또 그가 어떻게 힘과 용기를 얻었는가를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넘어가서는 않될 국경을 넘은 다윗을 생각해 봅니다.

구약시대의 하나님의 백성은 아무리 큰 고난이 다가와도 유대나라 안에 머물러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유대나라의 국경을 넘어서 블레셋이라는 이방나라로 들어갔습니다. 이는 환난 날에 피하여 할 곳이 어디인지를 망각한 신앙인의 처사였습니다. 삼상27:1에 보면 "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망하리니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피하여 들어가는 것이 상책이로다 사울이 이스라엘 온 경내에서 나를 수색하다가 절망하리니 내가 그 손에서 벗어나리라 하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환난날에 주께 피하여야 복을 얻습니다. 시59:16에는 "나는 주의 힘을 노래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리니 주는 나의 산성이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시17:07에도 "주께 피하는 자를 그 일어나 치는 자에게서 오른손으로 구원하시는 주여 주의 기이한 인자를 나타내소서"라고 말씀하고 있을뿐만 아니라 시31:19에는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인생 앞에서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환난 날에 주께 피한 것이 아니라 블레셋 나라로 그리고 블레셋 왕의 그늘 아래로 피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자 나오미와 아비멜렉은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을 데리고 이방나라인 모압으로 이주해 갔습니다. 그러나 양식을 얻기 위하여 모압으로 갔던 그들은 양식보다 귀한 생명을 잃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남편 아비멜렉이 죽고 두 아들도 죽고 말았습니다. 떡집이라는 뜻을 지닌 베들레헴, 그곳은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이었는데 하나님의 자녀가 육신에 필요한 양식을 얻기 위하여 말씀을 버린 결과였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한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이 책임을 지십니다. 사43:02에는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치만 다윗은 어떤 생각을 했습니까 "사울의 손에 후일에 내가 망하리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고"라고 고린도후서4:8-9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의 국경을 넘어서는 안됩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 속에서도 우리는 이 모습으 보게 됩니다. 탕자는 먼 나라로 갔습니다. 먼나라는 이미 유대나라의 국경을 넘어버린 상황으로서 이는 아버지의 간섭의 손길이 도무지 미칠 수 없는 지역을 상징합니다. 국경을 넘어선 탕자는 허랑방탕했으며 돈을 허비한 가운데 흉년을 만났으며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로 배를 채우는 불쌍한 신세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브라함도 가나안에 흉년이 들자 국경을 넘어 애굽으로 피신하였습니다. 신앙의 국경을 넘어간 그는 자기의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다가 왕으로 하여금 자기 아내를 빼앗겨 간음당하게 할 뻔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은 혹시 신앙의 국경을 넘어서 세상으로 향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믿음으로 살던 내가 믿음으로 살지 않고 있다면 당신은 지금 신앙의 국경을 넘어서고 있는 자입니다. 무슨 일이든지 기도를 앞세우던 당신이 기도 쉬는 죄를 범하고 있다면 신앙의 국경을 넘어서고 있는 자입니다. 찬송을 즐겨 부르던 입술에 찬송이 끊겨지고 원망불평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면 신앙의 국경을 이미 넘어선 상태입니다.

둘째,국경을 넘어 불의한 이방인들과 멍에를 같이 멘 다윗을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의 품을 벗어 나기를 좋아하는 자는 반드시 세상의 품에 안기고 맙니다. 제가 어렸을 때 시골에서 병아리를 날개에 품고 있는 어미닭을 여러번 보았습니다. 솔개라고 일컫는 매가 병아리를 나꿔 챌려고 하여도 어미닭의 품에 있는 병아리는 절대 안전했습니다.
그러나 가끔 어미닭의 품을 빠져나온 병아리는 여지없이 솔개의 밥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품은 절대 안전한 곳인데 하나님의 품을 떠나 다윗은 이방인들과 함께 멍에를 맸습니다. 고린도후서 6:14에는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차라리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는 마태복음 11:28-29 말씀처럼 주님의 멍에를 메야 할 것입니다.
어떤 조류학자가 카나리아의 아름다운 소리를 까마귀에게 가르치기 위하여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두 마리의 새를 한 곳의 새장속에 집어넣고 관찰을 했습니다. 그는 까마귀가 카나리아의 아름다운 소리를 하기를 기대했으나 이와는 반대로 얼마 후에 카나리아가 까마귀의 목소리를 먼저 배운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도가 불신자와 함께 살아가면서 불신자의 행동과 삶의 태도를 그리스도인이 먼저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도 하나님의 법보다 사탄의 법을 먼저 배우고 말았습니다. 우리 인간은 이상하게도 죄성때문에 선한 것보다 악한 것을 먼저 배웁니다. 입으로는 나쁘다고 말하면서도 행동으로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쁘다고 말하는 것을 배워가는 것이 한 두가지가 아닙니다. 분명 다윗은 이방인의 불신앙을 배웠을 것이고 그들 삶의 태도를 배웠을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셋째, 국경을 넘어가 그들의 생활을 배워버린 다윗에게 어떤 결과 왔을까요
①시글락에 있는 재산이 한 순간에 잿더미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3)②그런대로 평온을 유지하던 시글락이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습니다.(1)③처자들이 어디로 끌려갔는지 아말렉 군사에게 잡혀갔습니다.(2)④생명을 걸고 충성을 다짐하던 자들이 돌맹이로 다윗을 칠려고 했습니다.(6)⑤엎친데 덮치는 고통이 다가와 울 기력조차 없이 탄식했습니다.(4)이것이 신앙의 국경을 넘어 정치망명을 하여 블레셋 왕에게로 피하였던 다윗의 결과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잿더미 위에 앉아 기도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히멜렉의 아들 제사장 아비아달에게 물어서 군사적 행동을 개시하는 신앙의 회복을 하였습니다.(9)
이 때에 다윗이 하나님을 힘입어 용기를 얻게 되었다고 본문에는 기록하고 있습니다.(6下) 그렇습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당하고 있을 때에는 꿇어 엎드려야 합니다. 선지자의 생도의 아내가 살아생전 진 빗을 갚지 못하고 죽었던 남편의 채무를 갚을 능력이 없어서 하나님의 종 엘리사에게 물었던 것처럼(왕하4:1-7) 하나님의 종들에게 물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살 길이 열려지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시 말하면 불신앙의 국경을 넘어 신앙으로 귀환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탕자가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왔던 것처럼, 고멜이 호세아의 품으로 돌아왔던 것처럼, 나오미가 베들레헴으로 돌아왔던 것처럼, 요나가 니느웨로 발 길을 돌렸던 것처럼 하나님께로 돌아서야 하는 것입니다.
그 때에 다윗은 아말렉의 행방을 알아낼 수 있었고 400명만으로도 아말렉 군사를 추격하고 진멸하여 처자들과 잃은 모든 것을 다 찾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삼상30:16-20)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의 국경을 지나 불신앙의 세계로 나아가고 있지는 아니한지요 그리하여 어려움을 만나 힘과 용기를 잃고 있지는 아니한지요 이제 불신앙의 국경을 넘어 신앙으로 돌아와 기도하셔서 하나님을 힘입은 용기를 가지고 모든 것을 회복시키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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