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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요한복음 15장은 포도나무에 관한 비유입니다. 이 비유가 진전되어 9절에서 는 나의 사랑 안에 거할 것을 요구하고 있으며, 또한 그것은 10절 말씀에서처럼 계 명을 지키는 것으로 연결되고 있습니다.

종종 우리 신자들에게 까다로운 문제 중 하나는 `율법과 계명이 신자들에게 어떤 구실을 하는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의 신자들이 이 문제를 잘 정리하지 못하 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 믿고 난 다음에 율법이 어떤 역활을 하며 우리의 신앙 생활에 있어서 진심을 가지는 것과 그 진심을 실천하기 위하여 계명을 지 키는 것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는 것이 원리적인 차원에서 명백하지 않아 보이 는 것입니다.

내 안에 거할 것을 말씀하셨던 예수님께서 이 문제를 열매맺는 문제로 연결하시면 서 8절에 있는 것같이 `과실을 많이 맺으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신다'고 하신 다음에 사랑을 제시해 놓고도 10절에서 `계명을 지켜 내 사랑 안에 거하라'는 말씀 때문에 잘못 이해하면 열매를 맺는다든가 영광을 돌린다는 것이 뭔가 사탕발림에 속아서 하나님 앞에서 이상하게 함정에 빠지는 것같은 생각을 갖게하기 일쑤입니다 내 안에 있어라고 해서 주님 안에 있기로 마음을 먹고 주님을 사랑하며 노력하였는 데 알고보니 결국은 계명을 지키라는 율법의 자리로 되돌아 온 것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이 쉬운 부분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신자들이 쓰는 단어 중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아버지의 기쁘신 뜻 을 이룬다'고 하는 말처럼 그 말이 갖는 깊은 뜻만큼 제대로 이해되지 않고 있는것 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헌금을 드리고 찬송을 드 리는 것이 뭔가 하나님을 위해서 해드리는 것같은 기분이 들때가 있지 않습니까 이런 것들이 우리가 가지는 참으로 나쁜 편견들일 것입니다. 우리가 주일 아침에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이 우리의 자랑이고 아버지께 영광이 되며 우리의 특권이고 보람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마치 우리가 하나님께 뭔가 해드리는 것같아 서 그렇게 많은 신자들이 열심을 내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요15장에 나타난 포도나무 비유를 통해 볼 때에 신자의 자리란 얼마나 풍 성한 자리인지 모릅니다. 포도나무에 있어서 그 원둥치와 가지와 잎과 열매들이 풍 성하고 아름답고 생명력으로 말미암아 그 가치를 가지겠지만 만일 원둥치에서 잘려 버려서 말라버린다면 그것만큼 볼품없는 것도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가지는 그 원둥치에 잘 붙어 있는 것으로서 그 존재의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가지 가 둥치에 잘 붙어 있을 때 비로소 아름다움이 있고 풍성함이 있고 열매가 있는 것 입니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오늘 말씀 중에 나타난 계명을 지키라는 문제를 추적 하여 봄으로 기독교인이 신앙을 지키고 계명을 지키는 것이 도대체 어떤 자랑거리 인지를 확인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본론>

우선 몇가지 사실을 추적해 보아야 됩니다. 우선 4절을 보십시다. "내 안에 거하 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고 했습니다. `안에 거할 것'을 요구한 것이 9절로 오 면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합니다. 즉, `내 안에 거하라!'가 조금 더 확장되어서 `사랑 안에 거하 라!'가 되고, 이것이 10절에 와서는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그렇 게 너희도 내 안에 내 계명을 지켜 내 사랑 안에 거하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아 버지 안에 거한 것은 사랑 가운데서 그 안에 거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 가운 데 거하는 그것은 그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 의 방법론으로 제시된 것은 아닙니다. 계명을 지키고 사랑 안에 거하는 방법을 우 리에게 보여 주시기 위하여 이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보통 사랑이니, 은혜니 하는 말을 들으면 보통 책임이나 계명이 따 라 오는 것으로 생각하곤 합니다. 그래서 계명을 지킨다든가 책임을 지킨다는 것을 대할 때, 할 수 없이 해야 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평안과 과 축복과 사랑과 같은 것들을 위해서는 어찌할 수 없이 책임을 다하고 계명을 지 켜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같은 생각이 맞는것 같지만 얼마나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문제들은 주님과의 인격적 인 교제로 초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단순하게 책임을 다 한다든지 어 떤 장소에 거하는 식으로 장소적인 의미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내 안에 거하라!'는 이 말씀은 같은 아파트나 같은 방에 산다는 뜻이 아닌 것입니다. 장소 적인 의미가 아니라 사랑으로 요구되는 인격적이고 성품적인 차원에서의 문제인 것 입니다.

어떻게 보면 인격적으로 대등한 수준으로서의 초대나 요구라고 볼 수도 있는 것입 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공부를 열심히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것을 자녀가 부 모에게 효도하기 위해서 한다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도 없지 않습니까 물론 부모에 게 효도하기 위해 공부한다는 것이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공부를 효도라 는 차원에서 하는 것은 부모가 자식에게 요구한 참 의미와 가치를 모를 때의 일입 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부모가 `하라'니까 한다는 수준에서 하지만 나중에 요구한 그 내용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알게 되면 그것은 부모님이 요구할 문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도 해야될 일이라는 것을 째닫게 되는 것입니다.

효도라는 것은 그것이 `할 만하냐' `할 필요가 없느냐'를 떠나서 효도할 마음을 가지는 그 자체가 행복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함께 산다는 것은 쉬 운 문제가 아닙니다. 서로가 양보를 한다든가, 용서를 한다든가, 사랑을 한다든가 하는 것을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신자는 확인해야 됩니다. 우리에게 는 원래부터 그런 요소가 없습니다. 오직 신자만이 그것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부모에게 효도를 하며 자식을 사랑하는 것도 잘되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순종과 사랑과 계명은 새로운 시각을 가지고 추적 하지 않는 한 이 내용의 가장 깊은 것을 알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결론으로 나타난 계명, 즉 율법으로부터 추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보통 우리가 율법이라고 하면 그것은 `쓸모 없는 것, 심판하는 것, 정죄하는 것' 이라는 생각이 우리를 너무 압도적으로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롬13:8-10절을 보시면 뜻박의 말씀이 나옵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탐내지 말 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 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사랑은 율 법의 완성이니라" 왜 예수님께서 우리를 예수님 안으로 초대하시면서 그것을 `사랑 안'이라고 이야 기하고 계명이라는 이야기로 확장하셨어야 했느냐 하면 율법과 계명이라는 것은 크 트라인(cut line)으로 제시해 놓고 여기에 못 미치면 벌을 주겠다는 식으로 제시된 기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쫓아가야 할 과정과 수준을 재어보는 척 도로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제 신자에게 있어서는 율법이 더 이상 심판 이나 정죄를 위한 기준이 아니고 우리를 목적지까지 도달케 하기 위하여 중간에서 나를 검토해 보게 함으로 목적지로 가는 길이 어그러뜨리지 않고 걸어가게 하는 안 내서로서의 역활을 하는 것입니다. 즉 율법은 정죄나 심판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 라 사랑으로 완성된다는 말입니다. 이게 힌트입니다.

그런데 사랑이 뭐라고 되어 있는지를 고전13:7-8절을 보십시다.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 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 라" 여기서 사랑을 왜 시간적인 차원에서 기다림으로 제시했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문 제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율법을 심판과 정죄용으로 쓴다면 기다림은 필요없을 것입니다. 모든 사건에 대해 그때그때마다 율법을 제시하여 처리하면 될 테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사랑은 모든 것이 완성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란다고 했 습니다. 완성될 것을 바라보며, 완성되기까지 기다리며, 완성되기가지 견디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것이 바로 율법의 완성인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에게 있어서는 율법 이 심판의 도구로서가 아니라, 사랑의 완성을 위한 방편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 은 율법의 완성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공부라는 것이 원래 사람이 얼마나 똑똑한가를 구별해 내기 위해서 시키 는 것이 아니라, 훌륭한 사람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시키는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그렇게 어려운 율법을 감당하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구원받을 자질이 있느냐를 구 분해 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받은 자로서의 자질과 인격이 성숙되게 하기 위해 서인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계명을 밝히 보고 깨달게 하는 것은 우리에 게 책임을 요구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즉 `이렇게 해라! 만일 안 하면 죽인다!' 는 책임을 부여하려고 율법을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수준과 영 광의 자리에 도달하는 과정과 안내자로서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의 생활 속에서 이 계명과 율법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에 참 여 하는 포도나무에 견실히 붙어있는 가지가 되어 열매를 맺힌다는 것을 확인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의도입니다. 율법의 도적질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 라, 살인하지 말라, 내 이웃을 네 몸과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을 통하여 나 자신이 무엇을 얼마나 더 힘써야 되며 부족한 부분이 무엇이며 잘못하고 등한시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늘 분별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예수를 믿기는 쉽습니다만 예수를 믿고 신앙 생활을 하기에는 훨씬 더 어렵습니다. 신앙 생활을 하면 할수록 우리는 점점 더 자기의 부족함을 느낍니 다.

원래 공부를 잘하는 학생과 못하는 학생이 어디서 구별이 되느냐 하면 시험치고 나온 다음의 표정을 보면 알수 있습니다. 언제나 못하는 학생은 시험을 잘 봤다고 장담을 합니다. 그런데 몇점입니까 70점입니다. 반면 잘하는 학생은 언제나 못보 았다고 그럽니다. 그런데 몇점입니까 98점입니다. 그러면서도 시험을 치고 난후의 표정은 언제나 우거지상입니다. 왜 그렇게 인상을 쓰는 것일까요 다 맞출 수도 있 었는데 놓쳤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앙 생활이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죄책감과 죄에 대한 감각이 훨씬 더 심해지는 법입니다. 그래서 주눅이 들고 당황해 지는 것이 원칙입니다. 아마 이 래서 더 겸손해지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싸움에서 문제가 생깁니다. 계 명을 지키는 문제에 관한 것입니다. 즉 계명을 지켜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거하라 는 그것이 왜 하필이면 사랑을 거쳐서 계명을 지키도록 되어있느냐 하는 점입니 다. 그것은 우리 인간의 나약한 이중성 때문입니다.

신자들이 곧잘 하는 고백이 있습니다. `나는 예수를 믿는다. 그렇지만 막상 살아 보니까 언제나 내 마음 속에는 더러운 것이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면 서도 우리는 언제나 그렇지 않은 척하며 늘 웃고 다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어 떤 부류의 사람들은 `좀 솔직하라!'고 충고합니다. 속에서는 화가 나서 부글부글 하는데 아닌 척하고 생글생글 웃는 것은 틀린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직하게 화를 내고 싶을 때는 화를 내고, 슬플 때는 울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문제가 훨 씬 쉬워질 것이라고 그럽니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시작한 것이 심리학과 교육학 적 차원의 세상 해답들 중의 하나인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습니다. 만일 솔직한 것인 그 속에 있는 것 이 아름다운 것이고 겉에 있는 것이 누더기 같은 것이라면 과연 정직해 지고 솔직 해 지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속이란 우리의 생각처럼 그렇게 아름 다운 것이 있지를 않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의 껍데기를 벗겨 속 마음을 밖으 로 드러내 놓는다면 우리 자신들의 모습이 훨씬 더 험악하고 더러워진다는 것입니 다. 왜 그렇게 되는지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우리가 죄인이기 때 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가리켜 뭐라고 묘사하셨는지 아십니까 "저희 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라고 했습니다. 무덤에서는 썩은 것밖에는 나올 것이 없 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속에서는 언제나 나오는 것이 시기와 질투와 미움과 더러운 생각들 뿐입니다. 저 위대한 사도 바울께서도 오죽하셨으면 '오호라, 곤고한 사람 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부르짖었겠습니까 사람들이 그 마음 속에 있는 것들을 까뒤집어 놓고 내 보이는 것을 솔직한 것이라는 이 이야기 에서 우리는 늘 속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좋은 것같지만 오히려 문제를 복잡하게 만드는 일들이 더 많은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인간 자신의 속이 한결같이 더럽기 때 문입니다.

다른 예를들어 봅시다. 어떤 자녀가 공부를 하는데 자꾸 나가서 놀고 싶습니다.

바로 그때 이런 생각을 하였습니다. `나는 지금 나가서 놀고 싶은데 나는 책상에 청승맞게 앉아 있으니 이 얼마나 이중인격자냐 나는 위선자다. 더 이상 위선떨지 말고 나가서 솔직하게 놀자!' 여러분, 이것을 솔직이라고 할수 있습니까 이런 것 을 기리켜 맹하다고 그럽니다.

우리가 예의라든가 교양이라든가 인격이 심후하다는 이야기는 어디에다 씁니까 그것은 악을 폭팔시키지 않으며, 더러움을 흘리지 않는 데에 사용합니다. 바로 그 렇게 할때에 인격이 고매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더러운 것이며, 무엇이 깨 끗한 것인지를 분별할 줄 아는 사람을 괜챦은 사람이라고 하는 법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열매에서도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가 나타납니다. 성경에서는 특히 성도들에게 절제라는 것을 많이 요구하고 있 습니다. 다시말해 그것은 우리 인간이란 쏟아져 나오는 것이 더러운 것이며 악이 기 때문에 그것을 억누르고 막아서 쏟아 놓지 말아라고 그 절제를 많이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악한 성품을 누르는 것이 온유와 겸손과 거룩한 길로 가는 경건의 연습인 것입니다. 우리 중에는 그 누구도 그 마음 속에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쏟 아 놓아도 좋을 만큼 괜챦은 사람은 없습니다.

또 여기서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은 속에 있는 것만이 겉으로 나타나는 행동을 좌우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우리의 행동 그 자체도 우리의 마음 속을 좌우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가까운 사람의 장래식에 혹 참예할 때가 있습니다. 거기가서 우는 광경에 괜히 자신의 서러움까지 꺼내놓고 울다가 도취되어 밤새도록 웁니다. 한참 울고 난 다음에 눈물이 매말라서 `다 하늘나라 가서 만날 것인데요 뭐' 하면서 이야기 하다 가 보니까 괜히 또 그것이 극복된 것같아서 괜챦아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 것입니까 말하자면 사람의 감정과 행동이 서로 상관관계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속의 감정이 행동을 좌우한다고 주장할 수도 없으며 행동이 감 정을 주장한다고도 할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서로 상호관계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의 속사람인 지성이나 감정이나 의지적으로 괜챦은 사람이 되 는 것 이상으로겉으로 나타난 사람의 행위와 습관 자체를 고치는 것도 병행해야 된 다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에 있어서 수없이 많은 갈등을 겪을 것입 니다. 우리는 죄가 무엇인지를 잘 몰라서 짓는 것이 아닙니다. 죄가 무엇인지 잘 알면서도 짓는 것입니다. `이러다가 한 대 맞지' 하면서도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율법이라는 것을 주신 것은 우리를 심판하여 정죄하 고 처리하기 위하여서가 아니라 우리를 제대로 이끄시고 훈련시키시기 위해서 주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신분은 원둥치 나무되신 그리스도께 붙은 가지로서 절대 보장을 받는 것입니다. 결코 원둥치에서 떨어져 나가는 일은 불가능 한 것입니다. 우리 중에서 그 누구도 율법을 심판의 기준으로 사용하여 잰다면 합 격을 받을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단번에 십자가로 우리를 구원하신 다음에 구원 에 합당한 자격을 갖추도록 완성해 나가시는 것입니다. 그 완성의 날까지 오래 참 으시며 기다리시며 하나님의 계획과 열심으로 추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넘어지고 실패해도 주님은 우리를 사랑으로 용납하십니다. 우리가 일곱 번 넘어지면 여덟 번을 일으키시기로 작정하시고 우리를 철저히 간섭하신다고 우리에 게 약속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직 우리가 더러움이 남아있고 훈련되지 못 한 심성과 낮은 영적 수준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좌절해서는 안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와같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 안에 거하라고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같은 사랑이 우리를 위로하며 감격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의 운명과 신자된 신분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여러분 마음대로가 아 닙니다. 여러분이 이 자리에 나아온 것이 은혜였듯이 이 자리에서 신자로서 완성며 며 영광의 자리에 가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이루어질 뿐입니다. 바로 이 런 기독교적 사상 때문에 이런 서양 속담이 있습니다. `참새가 머리 위를 지나가는 것은 막을 수 없다. 그러나 그 참새가 머리 위에 둥지를 틀고 집을 짓지 않게 막을 수는 있다'는 속담입니다. 참새가 머리 위에 집을 짓게 되는 것은 뻔히 알면서도 가만히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참새가 머리 위로 지나가는 것은 어찌할 수 없습 니다. 다시말해 우리 속에서 악하고 더러운 생각이 나는 것이야 말릴 방법이 없습 니다. 즉 우리가 아차하는 순간에 마음 속에 더러운 생각이 떠올리는 실수는 늘 있 을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계속 연장하여 생각하는 것은 얼마든지 막을 수 있습니다. 그 더럽고 악한 길을 고집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틀렸다면 거기 서 돌아서야 합니다.

계3:21절에 보면 신자들에게 요구하는 삶의 방식이 있습니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 좌에 앉은 것과같이 하리라" 이렇게 이길 것을 요구합니다.

뭘 이기는 것인지 아십니까 20절을 보십시다. 20절은 그 유명한 구절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 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그리고 나서 나오는 결론이 "이기는 그에게는"입니다. 보통 이 계3:20절을 구원에 의 초대에 많이 사용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본문은 구원에의 초대가 아닙니다 이미 구원얻은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그의 참 주인으로 섬기며 순종하는 생활을 하도록 요구하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계3:20절 말씀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이미 믿고있는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그 결론인 22절 말씀에 "귀 있는 자는 성령 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로 되어 있습니다. 즉 신자들이 주님을 알되 주님을 주인으로 섬기지 않는 교회에 대한 책망의 서신입니다. 계3:15-16절에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 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주를 믿되 주의 자녀 된 걸음걸이와 열심과 생활과 항복이 없습니다. 그래서 요구 하고 있습니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나를 영접하여 주인으로 삼으라, 내 안에 거하라, 나의 계명을 지켜라, 나를 주인으로 섬겨라, 순종하고 충성하라는 것 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나 내 욕심과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것과 꼭 대치시켜 버리고 있습니다. 나를 누르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삼는 싸움, 자기를 죽이 는 싸움, 그것을 이기라는 의미에서 `이기는 그에게'라는 겁니다. 이기는 그는 하 늘 보좌에 앉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도 그의 참된 영광과 보람과 가치와 의미를 만끽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뭐냐 생활이 무엇인가 행복이 무엇 인가 하는 문제들이 신자와 불신자와는 전혀 그 방법과 정의가 다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제발 신앙을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위해서만 도입하지 마십시오. 그 렇게 안 하는 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적극적인 신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조금 전에 말씀드린 바와같이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는 것이요. 주님을 주인으 로 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포도나무의 가지된 자로서 충실히 붙어있어 싱싱한 열 매들과 푸르른 나뭇잎으로 그 생명력을 여러분의 생애에 채우셔야 합니다. 구체적 으로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그렇게 채우실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의 계명을 사랑 안에서 지키십시오.

누차 말씀드리지만 이것은 방법론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나의 주 인이 되며, 사랑과 신령한 교제를 나누며, 생명과 진리와 참다운 것과 절대적인 것 을 목적으로 삼고 원리로 삼아서 살아가는 삶인 것입니다.

 <결론>

신자는 더 이상 먹고 마시는 것이 전부가 된 자들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6장식으 로 말하자면 우리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또한 하 나님께서 우리의 삶들을 통하여 나타내실 일들이 있는 한은 우리의 생활은 보장되 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 생활에 있어서 실제로는 얼마나 이것이 주객이 전도되어 있 습니까 재미있는 일낙을 위하여 하나님을 부르고, 자신을 위한 생명을 연장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이 하나님을 심부름 시키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문제의 해결사가 아닌 것입니다. 신자된 참 맛이 어디에 있는지 이제는 제대 로 붙잡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누려야 합니다. 그렇게 할때에 비로소 우리 는 기적 속에 걷고 있음을 알게 되고, 영원한 나라에 이미 들어가 있는 것을 체험 하데 될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것과 절대적인 것여 여러분들의 발을 옮겨 놓는 변화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너무도 빈약합니다. 다 만 어지러운 발자국들과 방황하는 마음들 밖에 보이는 것이 없다는 것이 안타까움 인 것입니다. 그래서 요15:11-15절에 이렇게 아름다운 결론으로 우리를 유도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이 충만케하게 함이니라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사로 사랑하라 하는 이 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 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 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그렇습니다. 신자 된 자가 누리는 가장 큰 행복과 축복은 주님과 영적인 교제에 들아가며, 그 분이 가지시는 세상을 향한 계획과 심정과 뜻에 동참함으로 보람과 가치와 삶의 의미를 느끼는 것입니다. 바로 거기에 여러분들 모드가 초대받고 있다 는 것을 제발 놓치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이기는 자들이 누리 는 영광의 자리에 나아가시게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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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317 설교 사랑과 미움 (요 15:5-18) file 2013.05.07 172 운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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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315 설교 제자가 됩시다 (요 15:7-10) file 2013.05.07 91 운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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