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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후에는 알리라 (요 13: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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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언젠가 한번 제주도에서 열리는 집회에 갑자기 가게 되어 비행기를 탓었습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비행기를 타면서 그렇게 부끄럽게 여겨본 일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승객 전원이 신혼부부이고 나 하나만 아니더군요. 어디에 앉아야 좋을지 그저 몸둘 바를 모르겠습디다. 어쨌든 결혼식장에서 바로 나온 신혼부부들과 같이 가면서, 그들의 모습을 자세히 볼 수가 있었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뭐 그렇게 신통하게 생긴 것도 아니던데, 좌우간 서로 좋아 죽겠다는 표정입니다. 그렇게 마냥 좋은, 그런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식장에서 방금 나온 터인데 벌써 싸우고 다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제가 그 얘기를 제주도에 가서 했더니 네주도에있는 목사님들 말씀이 “그것만이 아닙니다. 여기서 이혼하고 가는 사람들도 많습니다”해요. 사랑 없는 결혼, 미숙한 사랑, 또 허약한 사랑이 있습니다. 보아하니 신랑이 다른 여자를 눈여겨보았다 해서 싸우던데, 이렇게 사랑이 허약해 가지고야 어떻게 한평생을 살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 무엇입니까 무엇보다도 귀한 것이 무엇입니까 사랑만 있으면 어떤 처지에 있어도 천국입니다. 가난하고 부하고, 병들고 건강하고는 사실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랑만 있으면 어떤 처지에서도 행복합니다. 또 사랑하는 사람만 있으면, 사랑을 받으면, 사랑을 주면, 사랑을 느끼면, 누구하고도 행복할 수가 있습니다. 그 대상이 인물이 좋으냐 나쁘냐, 지식이 있느냐 없느냐,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일전에 어느 회갑잔치에 참석했었는데, 축하의 인사를 받은 그 잔치의 주인공되는 분이 이렇게 답사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육십이 되는 오늘에 와서야 비로소 깨달은 것이 있어요. 내가 이거 배우는 데 40년이 걸렸소”라고 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니 대답합니다. “행복은 사랑 그것뿐입디다. 돈있어야 될 줄 알았고, 출세해야 될 줄 알았고, 명예가 있어야 될 줄 알았고, 또 다른 무엇이 있어야 행복할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닙디다. 사랑뿐이더군요. 사랑에는 이유가 없어요. 사랑하려 할 때에는 얼마든지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40년 걸려서 배웠다고 합니다. 진작부터 알았더라면 좀더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 텐데하는 회한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확실히 사랑에는 이유가 없습니다. 사랑은 생명과도 같은 것입니다. 가장 귀중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병들고, 사랑이 변질될 때에 여기에 타락이 있습니다. 사랑에 피곤이 있습니다. 사랑이 뒤바뀔 때에는 사랑이 원망으로 바뀌고, 사랑이 증오로 바뀌고, 사랑이 한으로 맺히고, 무서운 결과와 끔찍한 일들이 생깁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사랑했기에 다 그러하다고 둘러대는 아주 무서운 결과들이 있음을 여러분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했던 사람, 결혼했던 사람, 헤어졌든 만났든, 사랑이 원한으로 바뀔 때에는 총으로 쏘아 죽이기까지 합니다. 도대체 이래도 되는 것입니까 이것도 소위 사랑이라는 것입니까 혹 그 사람에게 물으면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병든 삶입니다. 그처럼 뜨겁게 사랑했고, 결혼했고, 새로운 약속을 했고, 출발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왜 이렇게 깨지느냐, 왜 미움으로 곤두박질하느냐, 왜 피곤하고 절망하게 되었느냐 말입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생각해보십시오.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근본적으로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사랑인 줄로 착각을 하였습니다. 결혼도 하지 말았어야 했고, 사랑한다는 말도 하지 말았어야 했고, 처음부터 시작을 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처음부터 사랑이 아니었고, 스스로 속고 있었습니다. 욕정과 사랑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사랑 아닌 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고로 오늘의 본문으로 돌아가서, 이 성경의 맥락에서 사랑이 무엇인지, 주님께서 보여주신 구체적 사랑에 대하여 다시한번 생각해보고, 거울 보듯이 자신을 비춰보시기 바랍니다.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이야기는 십자가 전야의 사건입니다. 몇 시간 후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것입니다. 예수님 스스로 이것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마지막으로 만찬을 가지게 됩니다. 바로 그 때에 있은 일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교훈을 주려 하시고, 교육하려 하시고, 제자 훈련을 하시려는 시간입니다. 어쩌면 3년동안 교육하신 모든 교육의 결론이요, 요샛말로 말하자면 종강파티입니다. 교육을 끝맺는 시간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주시해보아야 합니다. 이 마지막 말씀, 마지막 행위가 참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대조적인 사건이 있습니다. 본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1절)”-요한의 증거입니다. 정말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그 자리에, 그 현장에 있었던 요한이 훗날 이렇게 한마디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사랑하셨다-예수님께서는 시간적으로 끝까지, 내용적으로 끝까지, 질적으로 끝까지, 사랑의 본질에서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원수사랑’이라는 말을 합니다마는 원수사랑은 쉬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사랑받지 못한 가운데서 사랑하니까 쉽고, 또 내가 사랑받지 못한 사람에 대한 일시적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친구를 사랑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조금더 깊이 생각하면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를 끝까지 사랑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본문의 이야기를 그 당시로 돌아가서 생각해보세요. 예수님께서는 지금 십자가를 앞두고 제자들과 함께 만찬을 잡수시고 계십니다. 유대사람들의 풍속으로는, 유월절 잔치를 준비할 때나 다른 큰 잔치를 준비할 때, 보통때도 그렇습니다마는 저녁에 식사를 하기 위해서 집에 들어갈 때에는 반드시 발을 씻어야 합니다. 주로 잘사는 집에서는 발을 내놓으면 종이 씻어주도록 되어 있습니다. 중동지역이 대부분 사막이고, 모래가 많고, 또 옛날에는 신발이 좋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신발이 바닥만 있고 그것을 끈으로 발등에 매어 신는 샌들 (sandal)이거든요. 그러니 자연 발에 먼지가 많고 형편없습니다. 그래서 발을 반드시 씻어야 됩니다. 이때, 종이 발을 씻어주게 되어 있는데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서로서로 씻기어주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게 무슨 말인지 잘 못알아듣던 터에, 언젠가 한번 미국에서 이런 광경을 보았습니다. 배가 굉장히 많이 나온 사람이 자기 구두끈을 자기가 못매더군요. 그래서 구두끈을 맬 때마다 왔다갔다하며 어디 높은 곳을 찾아서 그곳에 발을 올려놓고야 간신히 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아, 이래서 발을 서로 씻기어주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우리네는 늘 땅에 앉아서 사는 습관이라 별 문제는 없습니다마는 늘 의자에 앉고 침대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발씻는 것도 상당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서로서로 씻기어주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아내가 남편을 씻기어주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서로서로 씻기어줄 경우에, 먼저 씻기어주는 자가 아랬사람입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을 보십시오. 예수님과 제자들이 유월절 잔치음식을 잡수시는데 마침 거기에 발을 씻기어줄 시중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 집이 노예가 있는 집이 아니었던 것같아요. 그러니 서로서로 씻기어주어야 할 텐데 아무도 먼저 씻기어주겠다는 사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의 마음 속에 지금 시기 질투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예수님께서 분명히 유대나라 왕이 되실 것이다. 왕이 되시면 우리들은 좌,우정승이 될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 우편에 누가 앉고, 좌편에 누가 앉고, 그 다음 자리는 누가 앉고, 그 다음 자리는 누구일까.....’ 이런 자리다툼에만 마음을 쓰고 있기 때문에 서로가 ‘네가 먼저 내 발을 씻겨라. 그러면 내가 네 발을 씻길 것이다’하고 버티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결국은 예수님의 발도 씻기어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발씻지 못한 채로 그대로 떡하니 앉아서 지금 음식을 먹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돌아보시니 참 한심해요. 도대체가 철이 없지요. 지금이 어느 때입니까 유월절만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유월절 잔치가 이래도 되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려 하시는데 그 앞에서 이런 꼴이니 말이 되는 일입니까 또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자 한다면, 왕 앞에서 이게 말이 되는 일입니까 스승 앞에서도 말이 안되고, 왕 앞에서도 말이 안되고, 어른 앞에서도 말이 안되고, 제자로서 도대체 못할 짓입니다. 어쨌든 제자들이 서로 시기 질투하는 가운데 예수님의 발까지도 씻기어 드리지 못하고 이 만찬을 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식사 도중에 일어나셔서 수건으로 허리를 동이고, 대야에 물을 떠다가 제자들에게 가셔서 ‘발을 내놓아라’하십니다. 먼저 씻기어드려야 할 분이지만 지금 제자들은 그렇게 하고 있지 못한 상황입니다. 그러다보니 그 말씀 앞에, 그 권위 앞에 할수없이 발을 내놓습니다. 성경에서 보는대로, 베드로의 차례가 되자 베드로는 ‘아닙니다. 제 발은 영원히 씻기지 못하십니다’라고 사양을 합니다. 당연히 그래야 하겠지요. 예수님을 씻기어드리지 못한 바에는 씻김받는 것도 죄송한 일이지요. 이런 관계, 이런처지에 놓여 있었습니다. 시기, 질투..... 참 한심한 사람들이지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저같으면 이 자리에서 가만두지 않겠어요. 한바탕 하겠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아무 말씀도 없이.
교부 크리소스토무스는 예수님께서 맨먼저 가룟 유다의 발부터 씻기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발을 내놓아라’하시며 차례차례 열두 제자들을 씻기셨습니다. 이렇게 형편없는 사람들을 그 순간까지 그렇게 사랑하셨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 자신으로 보더라도 이제 십자가를 지실 것입니다. 이 자기 처지, 자기 앞에 있는 이 무거운 십자가를 생각하고 여기에 집착한다면, 지금 누구를 사랑할 경황이 없습니다. 지금 이 처지에 누구 발 씻기게 되었습니까 지금 이 처지에 누구 사랑하게 되었습니까 생각하면 그렇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까지도 저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런고로 내 처지가 어떻게 곤두박질을 하든, 가난하든 부하든, 병들든 죽든 상관 없습니다. 그것을 초월해야 합니다.
대개 사람들을 보면 자기 처지에 매여서, 자기 기분에 매여서 남을 사랑하지 못합니다. 내가 지금 누구 사랑하게 되었느냐고, 누구 생각하게 되었느냐고 따집니다. 그것은 사랑의 본질을 잃은 것입니다. 제가 아는 장로님의 일입니다. 그 부인이 디스크에 걸려서 여러 해를 두고 고생을 합니다. 젊은 사람이 무엇 하나 제대로 들지도 못하고, 허리를 굽히고 살아요. 게다가 시아버지되는 분이 3년 동안을 누워 있습니다. 그래서 그 온갖 더러운 오물들을 다 받아내야 합니다. 아주 가난하게 삽니다. 며느리는 자기 몸은 생각도 않고 지성껏 시아버지 시중을 듭니다. 이 며느리와 시아버지 사이에 얼마나 뜨거운 사랑이 있는지 모릅니다. 며느리는 그저 “제가 좀더 잘해드려야 할 텐데 제 처지가 이래서 죄송스럽습니다”라고 하면서 안타까운듯이 허리를 굽힙니다. 그런가하면 시아버지는 “아이구, 내가 빨리 나아서 너를 좀 도와주어야 할 텐데 이렇게 오래 누워 있으니 네가 안됐구나”라고 말합니다. 그러던 중 시아버지는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 댁 사정을 잘 아는 장로님 한 분이 우연히 가게에서 마주친 그 며느리에게 이렇게 말을 하였답니다. “시원하시겠습니다. 오랫동안 그렇게 어렵고 지저분한 일을 다 하시다가, 이제 편하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이 말을 들은 며느리가 그대로 그 자리에 서서 엉엉 우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어떻게 시중 들었기에 남들이 나를 피곤한 사람으로 보았을까, 누가 나를 우리 시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해주신 것처럼 사랑해줄까”하면서요. 여러분, 사랑이라는 것이 금덩이 가지고 되는 줄 아십니까 디스크 걸린 며느리와 3년이나 누워 있던 시아버지 사이의 그 사랑이야말로 끝까지 사랑한 것입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내 처지가 어떻다는 이야기입니까 사랑 못할 처지가 따로 있다는 말입니까 쓸데없는 소리입니다. 사랑의 진실은 오히려 그 깊은 곳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사랑의 대상의 처지는 아무 상관 없습니다. 사랑하는 주체인 나 자신의 처지도 아무 상관 없습니다. 사랑은 어떤 것보다도 강하고, 어떤 것보다도 위대하고, 모든 것을 다 초월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한심하고 어리석은 제자들에게 실망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사랑하십니다. 놀라운 사랑의 신념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오늘의 성경에서 가르쳐주는 소중한 결론이 있습니다. 그것은 ‘겸손’입니다. 모든 지식에 다 통달하고, 모든 사랑이 있다 하더라도 이것을 겸손으로 묶을 때에 소망이 되고, 소망으로 굳게 설 때에 인내가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대상으로는 오늘의 성경에 보는 바와 같이 사랑의 뜻도 모르는 사람, 허영에 들떠 있는 사람, 배신자 가룟 유다까지 포함합니다. 행동적으로 사랑합니다.
더욱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속사적인 차원에서,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큰 역사 안에서 이 사건을 소화하고 계십니다. <회남자(淮南子)>에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운명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쓸데없이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자기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남을 원망하지 않는다.” 저는 이것을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큰 뜻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앞에 있는 자기 모습을 아는 사람은 누구에게나 겸손할 수 있다.” 별도의 노력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제 사랑으로 듣고, 사랑으로 보고, 사랑으로 섬깁니다. 사랑으로 들을 때에 여유가 있고, 사랑으로 보기 때문에 소망이 있고, 사랑으로 섬기기 때문에 신뢰가 있습니다.
제가 잘 아는 목사님 한 분이 중학교 3학년 때에 깡패기질이 좀 있었다고 합니다. 당수도 하는, 아무튼 골목대장이었다고 합니다. 어느 때인가 들판을 지나가는데 풀밭에 소한 마리가 매여 있더랍니다. 소는 사람이 가까이 오면 으레 한번씩은 머리로 받는 척을 하거든요. 그 소도 사람이 가까이 지나가자 머리로 받는 시늉을 한 모양입니다. 그러자 이 중학생, 너 왜 나한테 대드느냐며 그 소를 때려 죽였습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이 사실을 안 소임자가 와서 아버지에게 따졌습니다. 당신의 아들이 내 소를 죽였으니 소값을 물어내라고 을러멥니다. 저쪽 방에서 이 소리를 엿들은 아들은 ‘아이쿠, 이제는 죽었다. 남의 소를 때려죽이고, 그 사실을 아버지가 알았으니 나는 이제 죽었구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벌벌 떨고 있는데 아버지가 방에 들어와서 아들에게 묻습니다. “얘야, 네가 그 집 소를 죽였느냐” “예,” “왜 죽였느냐” “아, 그 놈이 나를 받으려고 하잖아요” “알았다.” 그리고 아버지는 아무 말없이 소 임자에게 소 값을 물어주더랍니다. 아들은 어버지 앞에 가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아버지, 그동안 속만 썩이고 못된 짓 한 것 참아주신 것도 감사한데 오늘 여기까지 참아주십니까 이제 저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그 때부터 변한 아들은 뒷날 목사가 되었습니다. 지금 서울에서 목회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언제나 어디까지라도 참사랑을 하는 자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습니다. 끝난것이 아니예요. 아직도 몇 번은 바뀔 수 있습니다. 계속 소망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지금은 모르지만 이후에는 알리라.” 이 철없는 놈들아, 하고 책망하지 않으셨어요. 지금은 뜻도 모르고, 왜 이렇게 하는지도 모르고, 왜 이런 일이 있는지도 모를 터이지만,some day-언젠가는 네가 알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그 형편없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갈릴리에서 만나자,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나를 위하여 너희가 큰 고난을 당할 것이다, 내가 네게 본을 보였노라 하십니다.
여러분, 우리의 사랑에 왜 문제가 있는 것입니까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어찌하여 피곤하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큰 듯을 아는 자는 실망하지 않습니다. 신앙적인 사랑을 하는 사람은 불평이 없습니다. 참으로 겸손한 삶은 절망이나 낙심을 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어떤 처지에서도 피곤함이 없습니다. 그만은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먼 미래가 보입니다. 내 장래도 보이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미래도 소망적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지금은 모르지만 이후에는 알리라”-얼마나 여유있고, 얼마나 아름다운 말씀입니까 이래서 주를 따르고, 이래서 주의 본을 따라 증인이 될 것입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끝까지, 여기까지 사랑해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립니다. 하나님, 사랑 아닌 것을 사랑으로 착각하고, 사랑 없는 세상에 살면서 괴로워했던 지난날을 용서하시고, 이제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사랑을 다시 중생케 하고, 그 새 의미로, 그리스도적 의미로 다시 돌아갈 수 있게 하여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정말로 사랑하며, 사랑을 느끼며, 사랑을 베풀고, 그 안에서 주님의 뜻을 이루어갈 수 있는 확실한 사랑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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