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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지막 계시의 특성 (계 22: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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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결론 부분인 본문에서 사도 요한은 마지막 계시의 특성 에 대해서 기록했습니다. 계시라는 것은 본래 뚜껑을 열다(u ncover)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마음 속에 있던 비밀을 뚜껑을 열어 공개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과 계획 과 경륜과 인도하심, 그리고 역사에 대한 그분의 뜻을, 계시된 그분의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요한계시록은 역사의 마지막에 있을 종말에 관한 계시입니다. 이 마지막 계시 가 다 펼쳐졌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의 비전까지 다 보았습니다 .

이제 사도 요한은 지금까지 요한계시록에서 우리가 함께 살펴보았던 마지막 계시가 도대체 어떤 것인가에 대해 그 특성을 세 가지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축복의 계시

우리는 계시록이라고 하면 지나치게 신비한 책이라는 인상을 갖기가 쉽습니다. 흔히 요한계시록과 관련된 종말에 관한 많은 책자들 중에서 어떤 책들은 우리에게 필요 이상으로 겁을 주고 위협적인 내용들을 담고 있습니다. 지나치게 자극적인 음식이 우리 몸에 좋 지 않은 것처럼 종말의 예언을 전개하는 방법에서도 그것을 지나치 게 자극적으로 전개하는 것은 일단 건전한 접근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해도 무방합니다. 자극적인 것은 당장에는 짜릿하고 우리의 호 기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체의 흐름을 살펴보면 요한계시록은 우리가 생각한 것처럼 자극적인 책이 아닙니다. 상당히 건전하게 역사를 전개시켜 보여 주고 있는 것이 요한계시록의 방법입니다. 이런 사건이 일어날 테니까 기다려라 하는 식으로 겁을 주지 않습니다. 어떤 책을 읽다가 지나치게 자극적이고 지나치게 위협적이라면 그것은 건전하 지 못한 책이라고 생각해도 좋습니다. 또 한 시대의 어떤 현상에 요한계시록을 무리하게 뜯어 맞추어서 푸는 사람도 건전한 해석자 는 아니라고 일단 결론을 내려도 괜찮겠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물론 많은 재앙의 메시지가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사 실입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그 재앙은 하나님께서 우리 에게 위협을 주시려고 의도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이 재앙은 경 고일 따름입니다. 사실상 이 재앙에 참예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또 그 재앙이 하나님의 의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성경은 계속적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서 다른 음성이 나서 가로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계 18:4).

죄 때문에 재앙은 불가피했습니다. 죄 때문에 역사에 대한 심판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시기 때문에 어느 역사 속에서 나 심판을 거두시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재앙이나 심판은 결 코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은 축복입니다.

 축복에 대한 언급으로 요한계시록이 끝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들에 게 얼마나 큰 위로와 격려가 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계 22:14).

축복에 대한 선포로 요한계시록 마지막 장은 닫힙니다.

 축복에 대한 선포로 요한계시록 첫 장이 열렸던 사실을 기억합니까?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 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 1:3).

요한계시록 1장의 첫머리에서 이미 축복이 선포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마지막 장이 다시 축복에 대한 선포로 닫히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사실입니까? 축복에 대한 선포는 요한계시록에 일곱 번 나옵니다.

 1장 3절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생활 가운데 적용하는 자에 대한 축복이 나옵니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 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 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 이 따름이라 하시더라(14:13).

이것은 성도의 죽음과 죽음 건너편에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안식의 축복입니다.

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 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 이 있도다(16:15).

이것은 성화의 축복입니다. 우리가 부끄러운 삶을 살지 아 니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그 자체가 축복인 것입니다.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 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 되신 말씀이라 하기로(19:9).

이것은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참예하는 축복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주님과 일종의 약혼 관계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주께서 다시 오실 때에 주님과 우리 사이에 정식 결혼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그분과 함께 영원의 잔치 속에 들어갈 것입니다. 지금도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과 교제하며 살지만 그 주님과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주님을 부분적으로가 아니라 온전히 만나면서 살아가는 축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젊은이들이 약혼 관계에 있을 때는 서 로 얼마나 감질나 합니까? 그러나 결혼한 후에는 온전한 관계를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 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 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 하리 라(20:6).

이것은 지상의 마지막 왕국인 천년왕국에서 주와 함께 왕 노릇 하 는 축복입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 이 있으리라 하시더라(22:7).

요한계시록 전체를 마감하면서 다시 한번, 말씀을 지키는 순종의 축복에 대해서 역설한 것입니다.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22:14).

이것은 영원한 나라, 곧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는 축복입니다 . 모든 부패와 죄악이 사라지고 하나님께서 질적으로 새롭게 하신 마지막 성에 들어가서 그곳에 있는 모든 것을 즐길 수 있는 특 권에 대한 약속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결코 재앙의 책이 아닙니다. 심판의 책이 아 닙니다. 물론 재앙과 심판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께 서 재앙을 의도하신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 저지르는 죄 때문에 하나님의 재앙과 심판은 불가피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받 고 그분과 올바른 관계 안에서 삶을 누리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주 께서는 역사의 마지막 날까지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거센 심판의 파도 속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축복 안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살아도 축복이요 죽어 도 축복입니다.

 창세기 1장도 축복으로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지 으시고 복을 주시면서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셨습니다.

창세기 12장에서는 흩어져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한 사람, 곧 아브라함을 불러내셨습니다. 그가 축복을 받아 이웃들과 축복을 나 눔으로써 다시 그가 복의 근원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 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천하 만민에게 복의 근원이 될 것이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아브라함의 복을 완성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삶, 이것도 포괄적인 의미에서는 축복입니다. 성경은 축복 으로 시작해서 축복으로 마칩니다. 창세기도, 요한계시록도 축복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삶을 너무 비관적으로 보지 마십시오. 우리 는 하나님의 축복 속에 지음을 받았고 그 축복 가운데 살다가 축 복 가운데 영원한 나라에 갈 것입니다.

 L.A.에 가면 로버트 슐러 목사님의 수정교회가 있습니다. 그 목사님의 신학이나 모든 설교에 제가 그대로 다 동의하는 것은 아 닙니다. 어떤 때는 지나치게 「적극적인 사고 방식」을 강조한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렇지만 참 귀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분은 몸이 거의 마비되는 일 년 동안의 투병 중에서도 책을 한 권 썼습니다. 책방에 가서 그 책의 제목을 보는 순간 따뜻한 느 낌을 받았습니다.

『인생은 불공평하지만 아직도 하나님은 좋으시다』(Life is unfair, but God is good).

일 년 동안 투병 생활을 하고 자기 생애의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 을 지나면서도 축복의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신뢰했던 그 분 의 삶의 자세는 대단히 감동적입니다.

 요한계시록의 메시지도 단순히 재앙의 메시지, 심판의 메시지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축복의 메시지입니다. 그러나 이 축복을 누리기 위한 한 가지 중요한 조건이 있습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12절).

주께서는 마지막에 상을 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각각의 그리스도 인들에게 상을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기준으로 상을 주신 다고 하셨습니까? 그의 일한 대로 주신다고 했습니다. 구원은 믿 음으로 값없이 받습니다. 행위를 통해서 구원을 얻을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의 죄값을 지불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값없이 죄사함을 받을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상급은 행위대로 받습니다. 주님 앞에서 상급 받을 자로 섭시다. 복음을 위해서 삶을 드리고 수고하고 땀을 흘린 사람과 주일 예배만 드리고 바람과 함께 사라지는 사람의 상급이 같다면 애쓴 사람은 억울하지 않습니까? 일한 대로 주님에게서 상급을 받 고 그 축복을 넉넉하게 누리는 삶이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약속이요 마지막 비전입니다.

 결국 요한계시록 전체의 계시는 단순한 심판의 계시, 재앙의 계시 가 아니라 심판받을 이 세상 속에서도 주의 백성들이 복된 자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한 축복의 계시입니다.

 완성의 계시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13절) .

이 말씀은 1장 8절에도 나옵니다. 기독교 신앙처럼 시작과 끝이 분명한 종교는 없습니다. 우주관이나 역사를 보는 관점에서 기독 교 신앙처럼 분명한 것은 없습니다.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에는 크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순환론적인 시간관 이것은 만물이 계속 돌고 돌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 불교나 회교의 윤회설은 순환론적인 시간관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 모든 것이 결국 제자리로 돌아오니까, 이런 순환론적인 시간관 을 갖게 되면 아무런 노력도 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삶에 대한 진지한 자세도 의욕도 생기지 않게 됩니다.

 둘째/변증법적인 시간관 이것은 정반합의 원리에 따라 하나의 세력과 그것을 반대 하는 또 하나의 세력이 서로 긴장과 갈등을 일으키면서 새로운 무 엇을 창출해 나간다는 것입니다. 엄격하게 말하면 이것 역시 옛 것이 반복된다는 식의 생각에 불과합니다.

 셋째/기독교의 시간관 이것은 분명한 시작과 끝이 있기 때문에 종말론적인 시간관이라고도 합니다. 오늘이라는 시간은 결코 다시 오지 않습니다. 우리의 생애는 결코 반복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심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결코 낭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시간관만의 독특 함입니다. 삶에 대해서 다른 어떤 종교인들보다도 그리스도인들이 더 의욕적이고 진지합니다. 저는 문화를 발전시키는 데에는 이런 기독교 시간관의 영향이 대단히 크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철학이나 사상, 종교는 기독교처럼 우주와 역사에 대해 처음 과 끝이 분명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종교나 사상에서 시간을 바 라보는 관점은 마치 화술이 부족한 사람들이 강단에 올라와서 이렇 게 말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제가 무슨 말씀으로 시작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또 그들은 끝 마무리는 이렇게 합니다.

무슨 말로 끝을 맺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시작이 분명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

요한계시록 22장에서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새로운 세계가 전개되 고 이 새 하늘과 새 땅을 가져오시기 위해서 주께서 재림하십니다 . 그 주님을 바라보면서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페이지는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끝을 맺습니다. 이처럼 기독교에는 분명 한 시작과 분명한 끝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이 주후 95년경에 기록되었다고 하는데 요한계시록이 포 함하고 있는 내용은 예수님의 재림과 심판과 새 하늘과 새 땅과 영원한 천국에 대한 소망입니다. 그 이상 더 보여 줄 것이 있겠 습니까? 그래서 엄격하게 말하면 성경 이외의 다른 계시는 없습니 다. 하나님이 역사에 대해서 보여 주고 싶어하시는 모든 계시는 요한계시록으로써 넉넉하고 충족하게 완성되었습니다. 신학자들은 정 경(Canon)으로 완성되었다고 해서 성경을 완성된 계시라고 합니다.

 더 이상의 계시가 필요 없습니다. 물론 우리가 절박한 위기 상황 속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출하기 위해서 어떠한 것을 보여 주실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엄격하게 말해서 계시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럴 때는 하나님의 비상한 인 도라고 하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계시는 요한계시록으로 완성되었습니다. 그 외의 다른 계시는 없습 니다. 성경 이외에 다른 계시를 말하는 사람은 일단 수상하게 생 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 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 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 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18,19절).

이것으로 모든 것은 완성되었습니다. 그리고 정경(Canon)은 닫혔습니다. 역사에 대해서 더 이상 중요한 계시는 없습니다. 지 정된 시일의 예수 재림에 대한 계시도 천만의 말씀입니다. 분명히 요한계시록으로 계시는 끝났습니다. 그 외의 다른 계시는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어떤 것을 더하거나 빼는 것이 바로 이단입니다.

대부분의 이단들은 성경만으로는 자기들의 교리가 합리화되지 않고 입증되지 않으니까 성경 이외의 다른 교리를 반드시 갖추고 있습 니다. 교묘한 이단의 경우에는 성경을 부인한다고 결코 말하지 않 습니다. 이단들은 깨어라/파수대 같은 것이나 몰몬경을 성경보 다 더 권위 있게 여기고 그것들에 더 의존합니다. 안식교회도 엘 렌 화이트 여사의 글들에 굉장한 비중을 둡니다. 심지어 가톨릭 같은 경우에도 성경 이외에 외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부분에서 사도 요한은 우리에게 한 가지 사실 을 힘 주어 강조합니다.

계시는 완성되었다(18절 참조).

 성취된 계시 ^ 요한계시록에 예언된 모든 내용들은 역사 안에서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요한계시록이 취급하고 있는 내용들이 예수님 재 림 직전에 대부분 이루어지는 것처럼 강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요한계시록이 예수 그리스도 재림 직전의 많은 사건들에 상당 한 비중을 두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예수 님 재림 직전의 7년 정도의 시간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초림부터 그리스도의 재림까지를 모두 다루고 있 습니다.

 요한계시록은 누구를 향해 씌어진 책입니까? 일차적으로는 그 당시 의 성도들에게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를 들어서 22장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께서 속히 오겠다고 하셨는데 , 그 속히 될 일이 사실은 이 천 년 후에 될 일이라면 그 당 시의 성도들에게 이 말씀은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요? 요한계시록이 취급하고 있는 내용이 예수님의 재림 직전에 많은 비 중을 두고 있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은 예수님 이 오시고 난 후의 사건부터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의 사건을 다루 고 있습니다. 말세라는 시간은 예수님이 오시고 나서 다시 오실 때까지의 기간입니다. 우리는 자기가 살고 있는 시간밖에는 보지 못하니까 저마다 자기 시간이 가장 절박하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처럼 급하지 않으십니다. 요한계시록의 계시 내용은 요 한계시록이 씌어지던 그 당시에서부터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당시 성도들에게도 요한계시록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졌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다시 오심으로 모든 계시가 다 성취될 것입니다.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 에게 있을지어다 아멘(20절).

여기서 진실로라는 말은 확실히라는 말입니다. 다시 오신다 는 내용에 대한 확실성을 마지막으로 보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다시 오신다는 사실 자체를 확실하게 보증하신 것이지 다 시 오시는 시간을 보증한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끝까지 그 시간 만은 비밀 속에 감추어 둡니다. 그것은 날마다 말세처럼 살아가도 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은 날마다 주님이 오실 것처럼 살아가 도록, 날마다 준비된 자로 살아가도록 시간을 감추어 두신 주님의 신묘하고도 놀라운 비밀입니다. 그러나 그 마지막 때가 가까워지 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루하루를 살아갈수록 역사의 마지막 때에 가까워 가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6절에서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새벽 별이 라고 불렀습니다. 새벽 별은 정말 깜깜한 밤에 나타납니다. 어두 운 밤은 새벽과 맞닿아 있습니다. 역사의 밤이 깊어져 갈 때, 그리고 죄악의 밤이 더 깊어져 갈 때 그 때가 바로 주님이 오실 때가 가까운 시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때가 바야흐로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그때가 1992년 10월일지 아닐지는 저도 모릅니다. 저는 그것 을 주장한 사람들이 무조건 틀렸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럴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을 말한 그 자체는 잘못입니다 . 그들은 성경이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른다고 했으니까 그 년과 그 달은 알 수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 해석 방법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 날과 그 때를 모른다는 것은 재림하는 때 자체를 비밀로 했다는 말입니다. 그들의 주장은 주님 의 영역을 넘어서려는 월권 행위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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