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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장애인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 (레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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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문둥 환자의 정결케 되는 날의 규례는 이러하니 곧 그 사람을 제사장에게로 데려갈 것이요 제사장은 진에서 나가서 진찰할지니 그 환자에게 있던 문둥병 환처가 나았으면 제사장은 그를 위하여 명하여 정한 산 새 두 마리와 백향목과 홍색실과 우슬초를 가져 오게 하고 제사장은 또 명하여 그 새 하나는 흐르는 물 위 질그릇 안에서 잡게 하고 다른 새는 산 대로 취하여 백향목과 홍색실과 우슬초와 함께 가져다가 흐르는 물 위에서 잡은 새 피를 찍어 문둥병에서 정결함을 받을 자에게 일곱 번 뿌려 정하다 하고 그 산 새는 들에 놓을지며 정결함을 받는 자는 그 옷을 빨고 모든 털을 밀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리니 그 후에 진에 들어올 것이나 자기 장막 밖에 칠 일을 거할 것이요 칠 일 만에 그 모든 털을 밀되 머리털과 수염과 눈썹을 다 밀고 그 옷을 빨고 몸을 물에 씻을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리라.

다시 장애인주일이 찾아왔습니다.

지난 20일은 장애인의 날이고 이를 전후로 해서 우리 교회는 해마다 장애인의 날을 지켜오면서 장애인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고 장애인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모으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참으로 감사한 것은 2년전 장애인의 주일을 맞이하면서 단순히 장애인에게 사랑을 보이자 하고 말만 할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작은 것이라도 구체적으로 한번 실천해 보자란 취지에서 장애보조기구 수집을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목발 20여개, 휠췌어 2개가 수집되어 적절하게 필요한 분들에게 전달하였습니다.

그리고 장애인을 돕기 위한 기금을 몇몇 교우들이 뜻있게 지속적으로 헌금해 주셔서 무려 222만여원을 확보한 상태입니다.

이 기금은 일부 이미 장애인들을 위해 휠체어를 산다든가 세탁기를 산다든가 하면서 쓰여졌고 남아 있는 기금도 조금 더 모이면 장애인들을 돕기 위한 아주 실질적인 사업에 쓰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부산지역사회선교협의회 회장직을 맡고 있는데 이 협의회는 총회 사회부와 부산노회와 부산동노회와 더불어 사회선교 전반을 연구하고 사업을 추진하는 대 사회봉사기구로서 지난해에는 특별히 장애인선교에 집중했습니다.

먼저 장애인 휠체어 모집 켐페인을 해서 현금 420만원 현물 2대를 마련하여 총 14명의 지체부자유장애인들에게 작년 12월 6일 기독교방송국 강당에서 휠체어 전달식을 했습니다.

오늘 그 중에 한 분이 우리 교회에 오셔서 찬양을 해 주십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장애인기금과 6여전도회 바자회 수익금에서 일부를 지원하여 참여하였습니다.

앞으로의 계획은 장애인 문화선교 차량을 운행할 계획으로 모금을 하고 있습니다.

장애인은 대부분 문화적 생활에서 소외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자유롭게 문화행사에 접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차량을 구입해서 이동도서관과 음악테이프, 교양테이프등을 구비하고 직접 장애인들을 찾아다니면서 그들의 문화적 삶을 도우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정신적, 신체적 장애를 가지신 분이 많이 있습니다. 약 37명 정도 있는데 작년에는 전혀 기금이 없어서 도울 수 없었지만 올 해는 다소 기금이 마련되었기 때문에 최소한 12명 정도에게는 작은 도움이라도 드리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장애인과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 여러분의 끊임없는 기도와 관심이 요청되고 지속적으로 이 도움을 계속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장애인주일을 맞이해서 다시 한번 성경을 통해 묵상하려고 합니다.
장애인들이 이 세상에서 겪는 어려움을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고 도로, 교통, 건물 등 모든 시설들이 사실 신체적으로 불편함이 없는 사람위주로 설계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이 겪는 불편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불편함 보다도 가장 가슴아픈 불편은 사회적 냉대입니다.

장애인은 정상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선입관으로 갖고 그들에 대한 따뜻한 마음은 커녕 피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종종 장애인들을 위한 시설물을 새로 건축한다고 하면 동네에서 들고 일어나 반대하는 것을 자주 보게 됩니다.

이런 반대 저변에는 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격리의식이 내재해 있는데 이것은 바로 장애인에 대한 냉대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의 말씀은 상당히 우리에게 다른 측면을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은 레위기의 말씀인데 이 레위기는 성경을 비교적 가까이 하는 분들도 읽기 어려운 부분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레위기에는 제사지내는 법과 규칙들이 많이 나오기 때문에 다소 지루한 면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러나 레위기 안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종교가 가신 제사, 즉 예배의 의미가 아주 깊이 있게 반영되어 있는 책입니다.

이 중에서 오늘 읽은 부분은 "정결예식"에 대한 규정의 일부입니다.

사실 이 "정결예식"은 11장에 정한 동물과 부정한 동물에 관한 이야기로부터 시작해서 12장에 아기를 낳은 산모에 대한 정결예식, 13장에 악성피부병, 즉, 요즈음 말로 하면 천형으로 일컬어지는 나병에 대한 분별방법과 대처방법, 그리고 15장에는 남자가 부정하게 되는 경우와 여자가 부정하게 되는 경우가 제시되어 있고 16장에 들어가면 여기에 대한 속죄규정이 나와 있습니다.

그러니까 레위기 중에서 정결예식은 11장부터 16장에 이르기까지 아주 중요한 부분으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이 정결예식은 한 마디로 말하면 이스라엘민족의 보건위생에 관한 규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것이 제사규정이라는 이름으로 되어 있지만 사실은 당시 유대나라의 기후나 위생상황에 비추어 보아서 엄격하게 전염병이 방지되고 전염병이 일단 발병하면 더욱 번지지 않도록 하는 아주 세심한 장치가 이 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11장에 나오는 부정한 동물과 정한 동물의 구분은 그 동물의 본질을 두고 하는 구별이 아니고 그 동물의 위생이 유대기후에 어떻게 적용되느냐에 따라 한 실생활적인 구분입니다.

이러한 음식구분법은 지금도 안식교에서는 그대로 지키고 있는데 상당한 부분은 일리도 있으나 우리 나라의 기후조건에 비추어볼 때 백페센트 일치한다고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상당히 타당한 부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12장에 들어가면 여성이 아기를 출산한 다음에 위생처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서 많은 산모가 죽고 아기까지 죽는 사태가 속출하기 때문에 이를 엄격히 처리했습니다.

이를테면 아기를 낳았을 때 일정기간동안 부정한 것으로 봅니다.

여기에서 부정하다는 말은 흔히 한국 무속에서 말하는 "부정탔다"란 말이 아니라 깨끗하지 못한 상태라는 뜻이며 그렇기 때문에 30일 혹은 60일 일정기간동안 집안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아들과 딸의 경우가 다른데 이것은 아마 당시 가부장제적 사고에서 그렇게 차별을 두지 않았나 싶고 아기를 낳은 여성이 성소에 드나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아마도 피의 부분이 당시에는 어떤 신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성소에로의 접근을 막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13장에는 악성 피부병에 관한 규정이 나오는데 이 때의 악성 피부병은 곧 나병입니다. 나병은 전염성이 엄청나게 강하고 한번 발병했다 하면 본인은 물론 온 동네가 희생되기 때문에 여기에 대해서는 아주 엄격하게 규정을 두었습니다.

발병하였을 경우, 그 증상을 보고 악성 피부병인지 아니면 단순한 병인지 구분하고 이 때 마치 의사가 환자의 증상을 보고 병을 판정하듯이 제사장이 환자의 상태를 살펴보고 그 병에 대한 판정을 내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때 제사장은 초기증상을 보고만 판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병의 발전상황까지 줄곳 지켜보면서 최종적인 판단을 아주 신중하게 하도록 규정되어 있습니다.

본문에는 악성 피부병에 대한 식별요령까지 자세히 언급이 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 14장에는 이제 만약 그런 악성 피부병에 걸렸던 사람이 다시 회복하게 되었을 때 그에게 베푸는 정결예식이 규정되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생각하고자 하는 부분은 바로 이 부분입니다. 우리는 이 레위기의 정결예식 부분을 읽으면서 아주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만약 악성피부병이 발병을 하면 반드시 제사장에게 가서 보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제사장이 판정하기 전까지는 누구도 그 병에 대한 판정을 할 수 없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당시 사람들은 이런 병을 엄청나게 무서워했고 만약 이웃 중에 누가 이런 병에 걸리면 천형을 받은 것으로 간주하고 그를 무자비하게 몰아내어 버립니다. 몰아버린다는 것은 곧 영화 벤허에서 보셨듯이 동네에서의 추방과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런 경우에 실제 그 병에 걸리지 않고 유사한 병에 걸린 사람들도 당할 수 있습니다. 병이 발병하면 반드시 제사장에게 가서 보이고 제사장도 함부로 판단하지 말고 경과를 세심하게 살펴보면서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 다음에 오늘 본문에서 병에 걸린 사람이 용케도 회복하였을 때 그를 다시 정결하게 되었다고 선언하고 사회로 복귀하는 절차가 제시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만약 이런 절차가 없으면 한번 병에 걸렸던 사람을 동네사람들은 좀처럼 믿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리 나았다고 해도 사람들이 믿지 않을 것이고 그러면 완전해 지고도 공동체에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을 공식적으로 누구도 의심할 수 없도록 복권시켜 주기 위해 제사장은 정결예식을 거쳐서 그들을 다시 공동체로 복귀하게 했던 것입니다.

여기에는 아주 중요한 동기 한 가지가 있는데 성경은 병에 걸린 사람을 부정하다고 판정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들의 권리를 최대한 지켜주고 오히려 그들의 회복에 촛점이 주어져 있음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종교란 것이 가끔 율법적인 것으로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흔히 사람들이 종교생활을 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도 깨끗지 못하면서 도덕적 잣대로 사람들을 평가하고 소외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당하는 병도 서러운데 그들이 소외되는 것은 더욱 서러운 것으로 인식하여 그들의 권리를 끝까지 지키기 위해 모든 가능한 일을 다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구원에서 한 사람이라도 떨어뜨리려기 보다는 멸망이 선고된 사람을 한 사람이라도 구원의 편으로 옮겨 오기 위한 필사적 노력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얼마전에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린 영화 "쉰들러스 리스트"란 영화를 보면 아우슈비티 죽음의 수용소로 가게 되어 있는 사람을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고 마지막에 자기의 자동차와 악세사리까지도 팔았다라면 10명의 목숨, 두 명의 목숨을 더 구할 수 있었을텐데 하고 탄식하는 장면에서 진한 감동을 느꼈습니다.

하나님도 이와 같습니다. 레위기는 부정하다고 정죄하려는 의도 보다는 부정한 것을 조심스럽게 판정하고 그리고 그들이 회복되었을 때는 완전하게 사회공동체에 복귀할 수 있는 장치를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 와서는 항상 구체적으로 실천되었습니다. 그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항상 죄인으로 판정한 사람을 구원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오늘 장애인의 문제도 같은 시각이라고 생각합니다. 장애인을 돕지 않는 문제는 별개입니다. 그들을 장애인으로 단정하고 차별하는데 근본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취업에서, 임용에서, 입학에서, 권리에서 자꾸 그들의 존재가 차단되고 차별되는 것은 바로 이런 인식의 문제가 그 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사회가 냉대하는 장애인에게 "정하다"고, 즉 "정상적이다."라고 선언하는 제의적인 활동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장애인에게 가져야 할 근본적인 복음적 시각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장애인으로서 오히려 건강한 사람보다더 훨씬 훌륭하게 살아가는 수많은 분들의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가장 깊은 영혼저변을 흔들고 감동을 준 음악의 성인 베토벤도 장애인이었고 루즈벨트 대통령도 장애인이었으며 얼마전에 한국을 찾은 세계적인 물리학자도 휠체어를 타고 강의를 한 천재 물리학자였습니다. 지난 해에 소개한 일본의 미즈노 겐죠란 시인은 그 영혼이 건강한 사람보다더 훨씬 맑고 상상력이 뛰어난 시인입니다. 일본에서는 그의 삶의 이야기를 영화화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장애인이 훨씬 더 영적으로 맑은 정신, 순수한 정신을 갖고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 사회를 어지럽히고 괴로움을 주는 사람들은 장애인들이 아니라 오히려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멀쩡한 사람들이 그럴 때가 적지않게 많음을 봅니다.
장애인에게 필요한 것은 작은 시덥잖은 도움보다도 그들에 대한 정상적인 시각, 오늘 레위기의 말씀대로 "그들은 장애인이 아니라 정상인이다"라는 정결선언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그들의 가슴을 열고 마음을 펴게 하는 그 어떤 도움보다더 큰 일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사람을 끝까지 선하게 보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이 마음을 배워서 장애인들을 더욱 따뜻하게 대하고 그들이 모든 사람과 똑 같은 인간의 권리를 누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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