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시 40:1-7)

첨부 1


시편 40편은 다윗이 읊었던 노래 가운데 하나입니다.본문 속에서 우리는 네가지 교훈을 찾을 수 있습니다.

1.응답은 인내후에 임한다는 것입니다.
1절을 보면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라고 했습니다.
시편 37:7을 보면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리라”고 했습니다.이상 두 구절이 주는 교훈은 기다리면 응답하시고 그 길이 형통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기다림은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기다림입니다.
베드로후서 3:9절을 보면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아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인내와 기다리심은 피조물인 인간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어느날 아브라함의 집에 노인 한사람이 찾아와 지나가는 길손이라며 식사를 요청했습니다.손님 대접을 잘하는 아브라함은 그를 기쁘게 맞아들여 정성껏 대접을 했습니다.밥상을 받은 그 노인이 식사 기도를 안하고 그냥 숟갈을 드는 것을 본 아브라함이 물었습니다.왜 감사기도를 하지 않느냐고.그의 대답은 우상을 믿기 때문에 기도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화가 난 아브라함이 그를 당장 내쫓으려고 하자 하나님께서 말리시는 것이었습니다.“아브라함아 참아라,그 노인을 내쫓지 마라.내가 그 노인이 회개하고 돌아오게 하기 위해 100년을 참았느니라”고.이 이야기는 구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50년 100년 그리고 2000년씩을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하나님은 즉결처분이나 즉결재판을 좋아하지 않으십니다.참고 기다리시기를 끝까지 하십니다.
둘째는 인간의 기다림입니다.
어떤 한학자는 한문 가운데 제일 쓰기 어려운 글자를 인(忍)이라고 했습니다.저는 그 말을 처음 들었을때는 글자의 구성이나 생김이 까다로워서 쓰기가 어렵다는 것으로 이해 했습니다만 그분의 본 뜻은 참고 기다린다는 행위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설명하는 것이었습니다.
말 한마디를 참지 못해 실수를 저지르고 싸움을 불러 일으킵니다.그 순간 그 격정을 참지 못해 인격 파탄자처럼 행동하게 됩니다.
그 순간,그 말 한마디,그 몸짓,그것만 참았더라면 하고 혀를 차고 땅을 칠때가 많습니다.
세계적인 설교가로 명성을 떨치던 레이먼 비처(Lyman beecher)가 어느날「하나님의 나라」라는 명설교를 했습니다.설교에 은혜를 받은 사람이 물었습니다.“이 유명한 설교를 완성하는데 얼마나 걸렸느냐”고.비처의 대답은“약 40년 걸렸다”는 것이었습니다.
인내없는 성공은 없습니다.인내하는 자만 성공합니다.지금으로부터 40여년전 대통령이 되겠다는 꿈을 꾸는 소년이 있었습니다.그는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20대 젊은 나이에 정치판에 뛰어 들었습니다.그로부터 40여년 동안 험난한 역사의 준령과 정치변동의 파도를 타면서도 그 꿈을 포기하지 않은채 도전과 인내의 연단을 거듭했습니다.그리고 마침내 1993년 2월 25일 목요인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으로 취임했습니다.
저는 대통령직 그 자체를 위대한 것으로 평가할 마음은 없습니다.경우에 따라선 환경 미화원만도 못하게 살다간 대통령도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다리고 참고 그리고 도전하는 그 용기는 배우고 또 닮아야 합니다.
새 가운데 가장 하늘 높이 비상하는 것은 독수리입니다.독수리는 밤에는 날지 않습니다.날이 밝기를 기다립니다.그리고 아침 공기가 상승하여 높아질 때를 기다립니다.
동녁에 아침해가 떠오르고 따뜻한 기류가 상승하기 시작하면 독수리는 날개를 펴 날기 시작합니다.위로 올라가는 온난 기류의 힘을 한껏 이용해 높이 날아 오릅니다.높은 하늘에 올라간 독수리는 자신의 날개를 넓게 펼치고 있기만 해도 급상승하는 기류의 영향으로 저 높은 하늘로 치솟아 올라간다는 것입니다.
우린 여기서 독수리의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자신의 힘만으로 저 높은 하늘에 올라 갈 수는 없습니다.독수리가 상승기류의 힘을 이용하는 것처럼 우리는 비행기의 힘을 이용합니다.그러면 하늘 높은 곳까지 올라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의 궁극적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은 상승기류나 우주선으로도 안됩니다.
시인의 고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기다리고 기다렸더니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라는 고백은 하나님을 바라고 기다리면 응답이 임한다는 것입니다.시인의 기다림은 막연한 기다림이 아닙니다.희망없는 기다림도 아닙니다.
그의 기다림은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이며 응답을 믿는 기다림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기다리다가 지치고 낙심하여 포기하게 될 것입니다.그러나 믿음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응답을 바라면서 기다리고 기다릴 것입니다.하나님의 응답은 기다릴 때 임합니다.

2.찬송은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3절을 보면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3절은 세가지를 교훈합니다.
첫째 찬송은 하나님께 올린다는 것입니다.예배와 찬송과 기도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찬송과 기도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천사도,목사도,대통령도 마리아도 경배나 찬송이나 기도를 받을 수는 없습니다.
둘째 하나님께 올릴 찬송은 새 노래라는 것입니다.유행가,대중가요,가곡이 아닙니다.하나님께 드리는 노래는 새 노래입니다.새 노래란 신령한 노래라는 뜻입니다.그러니까 새 노래는 새 마음과 새로운 자세와 태도로 불러야 합니다.새 노래는 새 사람이 부르는 노래입니다.새 사람이란 구습을 벗어버리고 거듭난 사람입니다.새 사람은 노래도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셋째 찬송은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하나님께 올리는 찬송을 듣고 보는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된다는 것이 본문 3절의 교훈입니다.
빌립보 옥중에서 불렀던 바울과 실라의 찬송은 빌립보 옥터를 움직였고 마침내 옥문을 열어 제쳤습니다.그리고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간수가 놀라 자결하려고 했고 마침내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기독교는 찬송의 종교입니다.그리스도인들이 모인 곳에는 찬송이 있습니다.우리가 찬송을 부를 때 취해야 될 바른 태도가 있습니다.

1.간절한 마음으로 불러야 합니다.

2.힘있게 불러야 합니다.

3.바르게 불러야 합니다.
음정이나 박자 그리고 태도도 바르게 불러야 합니다.
찬송가를 손에 쥐고 찬송을 부르는 태도도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두손으로 정중하게 받들고 부르는 사람
두손가락으로 쥐고 부르는 사람
책받침대에 올려 놓고 팔장끼고 부르는 사람
옆엣 사람 찬송가를 건너다 보고 부르는 사람
시인의 고백대로 찬송은 하나님께 올리는 노래입니다.
그 찬송을 듣는 사람들이 은혜받고 하나님을 의지할 마음이 일어나야 합니다.그런면에서 성가대의 역할과 책임은 중요하고 큽니다.성가대석에 앉는 태도,회중 찬송이나 찬양이 모범적이고 고백적이어야 합니다.

4.믿음으로 불러야 합니다.
이 찬송이 능력이 있어서 역사한다는 믿음으로 불러야 합니다.풍성한 신앙은 찬송과 기도가 풍성한 법입니다.믿음이 메마르면 찬송이 메마르게 됩니다.찬 송생활을 힘써야 합니다.

3.하나님은 우리를 깊이 생각하신다는 것입니다.
5절을 보면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관심과 배려가 크고 많다”는 것입니다.
관심밖으로 밀려나는 현상을 소외현상이라고 말합니다.
남편의 관심이 아내로부터 떠나는 것은 부부갈등의 적신호입니다.
자기가 속한 집단으로부터 소외받는 것은 고독의 원인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는 것은 비극의 원인이 됩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가시권안에 존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생각하시는 분입니다.
시편 92:5을 보면 “주의 생각이 심히 깊으시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시편 139:17에서는 “주의 생각이 어찌 그리 보배로운지요”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사야 55:8을 보면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의 생각과 다르다고 했습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생각은 많고 큽니다.깊고 보배롭습니다.그리고 내 생각과 다릅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하나님의 뜻을 말합니다.크고 깊고 보배로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하겠습니까 좁고 짧고 천박하고 제한받는 내 뜻과 내 고집을 따라 살아야 하겠습니까 어떤 선택이 현명한 선택이라고 생각하십니까

4.하나님은「나」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6절을 보면 하나님은 제사와 예물을 기뻐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치 아니하신다고 했습니다.그리고 7절을 보면 “내가 왔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 뜻은 하나님은 제사나 예물이나 번제나 속죄제사보다 나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그러기에 “주님 여기 제물이 있습니다”라고 말하지 않고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물건보다 사람을 좋아하십니다.그것은 창조의 순서와 질서에서도 드러납니다.창세기 1장과 2장을 보면 창조의 순서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째날 빛을 창조하셨습니다.
둘째날 궁창을 만드셨습니다.
셋째날 땅과 바다를 만드셨습니다.
넷째날 하늘의 별들을 만드셨습니다.
다섯째날 각종 짐승을 만드셨습니다.
여섯째날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다스리고 정복하라고 하셨고 식물도 주셨습니다.
창조의 순서만으로도 사람이 제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그 뿐입니까,숨쉬는 모든 것들 가운데 사람만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 넣어 만드셨습니다.그리고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도록 하셨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사람을 원하십니다.다시 말하면 나를 원하십니다.
주일마다 만나기를 원하십니다.몸은 딴데 가 있어도 마음은 교회에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그들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너를 원한다”고.
시인은 고백합니다.“내가 왔나이다”라고.집보다,돈보다 더 귀한 것은 사람입니다.주님은 내가 주께로 나오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증거는 주님 곁에 있는 것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주님을 사랑하는 증거는 주의 전에 나오기를 힘쓰는 것입니다.집에 들어가는 것이 두렵고 끔찍스럽다면 문제가 있는 것처럼 주님 곁에 나오기를 주저한다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주여 내가 왔나이다”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