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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의 용기 (마 26:3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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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원에벤에셀이라는 의류업체가 있습니다.이 회사는 최근에 급성장한 회사로 국가로 부터 많은 상을 받은 회사입니다.얼마전 사장인 박성철씨의 인터뷰내용을 본 일이 있습니다. 영어사전 한권만 가지고 서울에 올라와서 온갖 고생끝에 스웨터를 만드는 공장을 만들고 일을 하다가 한번은 과로로 쓰러진 일이 있었답니다. 병실에 누워서 이대로 죽는다면 어떻게 될것이며 또 주님앞에 가면 뭐라고 할것인가를 생각하다가 주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그 후로 부터 앞으로는 철저히 이 회사를 하나님의 기업으로 삼고 하나님중심으로 사업을 할것을 새롭게 결심 하게 되었답니다.
철저한 주일성수,십일조,기도생활,전 사원의 복음화등 모든 운영을 기도와 성경을 따라 했다는 것입니다.남은 소원이 있다면 무엇이냐는 질문에 자신의 마지막 소원은 회사가 안정되면 아프리카선교사로 떠나서 나를 사랑하신 주님의 은혜를 보답하기 위하여 남은 생애를 바치겠다고 했습니다.
사실 신앙생활 전부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의 동기에서 시작됩니다.예배출석도,물질봉사도,직분감당도 일꾼으로서의 헌신도 주님을 사랑하는 동기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저는 지난 주일에 주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주님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기전 마지막 밤을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에서 지새우며 고통스런 마음으로 기도하시던 심정을 함께 나누었습니다.우리가 꼭 기억해했던 사실은 주님은 분명히 우리와 같은 몸과 인격을 가진 인간이셨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도 그 사람과 똑같은 환경에 처하지 않고는 완전히 이해할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아무리 성경을 보며 그 때의 주님을 이해한다해도 똑같은 환경에 처해보지 않고는 완전히 이해할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주님을 더 깊이 알고 이해하면 할수록 우리 속에서 빛나는 사랑의 볼꽃은 더욱 더 환하게 빛난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지난주에 이어서 40절을 보십시다.주님의 기도는 죽음을 피하려는 비겁한 기도가 아니었습니다.죽음을 선택하기 위한 기도입니다.죽음을 피하려 했다면 다른 곳으로 피했을 것입니다.그러나 주님은 그 죽음으로 가기까지의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주님은 그 용기를 구한것입니다.
주님을 가장 사랑했던 제자 중의 하나인 요한은 그의 서신 요일서3:10에 이렇게 말씀합니다.“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죄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화목제란 무엇입니까.구약시대에 인간이 하나님께 죄를 범했을 때 그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하나님께 가지고 나가는 제물입니다.양이나 소인 그 제물은 제사장의 칼에 찢기어 그 피를 취하여 나아가는 것입니다.하나님은 죄를 범한 그 사람의 죄를 대신 짊어진 그 제물을 보고 그를 용서하시며 그와 화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바로 이 화목제물이 되셨다는 것입니다.우리와 하나님과의 막힌 죄의 담을 헐기 위한 화목의 제물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며 죽으셨다는 것입니다.이 제물은 완전히 죽어야 합니다.고통 속에서 피를 다 쏟아야만 합니다.
오늘밤 주님의 기도는 이 완전한 화목제물이 되시기 위한 기도인 것입니다.
한참 후에 주님은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오셨습니다.잠자는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나와 함께 잠시도 깨어있을 수 없더냐”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먼저는 제자들에 대한 걱정 때문일 것입니다.그 동안은 주님께서 그들과 늘 함께 계셨고 그들도 주님을 의지했지만 이제는 스스로 모든 어려운 고난과 역경을 혜쳐 나가야 합니다.때로는 핍박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주님께서 분부한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복음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그 길은 쉬운 길이 아닙니다.세상의 영광이 주어지는 길이 아닙니다.앞으로 얼마만큼의 핍박이 있을지 모릅니다.마치 양을 이리 가운데 두고 가는 것과 같은 상황인 것입니다.실제로 초대교회 시대에 많은 핍박을 감수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또 인간적인 연민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제 이 밤이 지나면 헤어져야 하는데 제자들과 좀 더 함께 이야기하고 싶고 주님의 입장을 이해받고 싶었을 것입니다.그래서 말씀하십니다.“나와 함께 한시도 깨어있지 못하느냐”앞으로 몇 시간 후에 다가올 푹풍의 그림자를 바라보며 안타까운 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말씀하셨습니다.“시험에 들지않게 깨어 기도하라.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가르치셨던 마지막 가르침이며 교훈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실제적으로 신앙생활 가운데 늘 경험하며 사는 말씀입니다.하나님의
뜻을 따르고자하는 마음과 육신의 갈등입니다.

특별히 이 말씀을 베드로에게 하신 것은 그에게 다가 올 시험을 예견하고 하신 말씀입니다.그것은 얼마후 사랑하는 제자에게 다가올 시험에 대한 주님의 중보기도였습니다.
바로 얼마전 주께서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할 것을 말씀하시자 베드로는 주님 앞과 모든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호언장담을 했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다 주님을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했습니다.죽는데까지라도 주님을 따라가겠다고 큰 소리를 쳤습니다.결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며 자신의 충성과 의리를 큰 소리로 과시했던 것입니다.그러나 주님은 그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그의 부인을 말씀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마음은 그가 주님을 부인한 하느냐 안 하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셨습니다.주님의 염려는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한 후에 자신의 말을 지키지 못하고 스스로 를 탓하며 자책감과 낙심에 빠지는 것을 염려하셨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마음은 오늘도 똑같습니다.우리는 주님 앞에서 말씀을 듣고 깨달을 때마다 수 없는 결심을 합니다.저 자신도 제가 그 동안 주님 앞에서 멩세하고 결심한 것을 나열해 놓는다면 누구 못지않게 많다고 시인할수 있습니다.열심히 노력하고 뛰었지만 돌아서보면 언제나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그 때마다 찾아오는 것이 무엇입니까.자책감입니다.“왜 나는 이렇게 연약할까”하는 나 자신 스스로에 대한 실망과 부끄러움입니다.이러한 생각이 자신을 사로 잡으면 결국 낙심에 빠지게 됩니다.힘과 용기를 잃어버립니다.주님께서 걱정하시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베드로가 자책감에 빠져 자신의 사명도 잊고 낙심하는 것입니다.실제로 베드로는 어떠했습니까.그는 주님을 모른다고 3번씩이나 했습니다.자신의 목숨을 지키기위하여 3년동안 자신을 가르치고 사랑해주었던 주님을 모른다고,예수와 나는 상관없는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마27:74절에는 저주까지 했다고 기록 했습니다.얼마나 비겁한 거짓말장이 입니까.드디어 주님의 말씀대로 새벽 닭이 울자마자 자신의 모습이 하도 부끄러워 통곡을 했다고 했습니다.그는 이제 제자들을 볼 면목조차도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그렇게 주님께서 아껴주었건만 그가 주님께 돌려 준 것은 냉정하고도 비겁한 눈초리 뿐이 었습니다.그 후 그는 주님의 예상대로 다시 그물을 들고 고기를 잡게 됩니다.자신의 사명을 잊었습니다.요한복음21장을 보면 이렇게 낙심하여 스스로에게 시험에 빠진 베드로에게 주님은 부활하신 몸으로 베드로를 찿아가십니다.
주님은 새 사람으로 살고자하는 우리의 결심을 기뻐하십니다.그러나 우리의 연약함을 잘 아시기에 우리가 낙심하여 스스로 시험에 빠질까봐 염려하시는 것입니다.그래서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권고하셨습니다.“베드로야 깨어 기도하라 육신의 연약함을 극복하기 위해서 나와 함께 기도해야 되지 않겠느냐 어떻게 너 자신이 육신의 소욕을 이길수 있겠느냐 나와 같이 이 밤에 아버지께 힘과 용기를 구하자.

이것이 주님의 애정어린 권고였습니다.
42절에 보니 쓴잔을 마시기 위한 주님의 기도는 계속되었습니다. 역시 같은 기도였습니다.주께서 [잔]이라고 하신 것에는 제사의미를 두고 하신 기도입니다.
구약시대의 제사법에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그 중에 전제라는 것이있습니다.민15:6-7에
보면 “수양이면 소제로 고운가루 한 에바 십분지 이에 기름 한 힌 십분지 일을 섞어 예비하고 전제로 포도주 한 힌의 십분지일을 드려 여호와 앞에 향기롭게하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잔에다 포도주를 부어 그 향기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전제라는 제사입니다.주님께서 기도하신 잔은 어떤 의미입니까.자신 스스로의 희생으로 그 잔에 속죄의 피가 담겨지는 것입니다.그 잔에 부어진 속죄의 피가 죄로 물든 인간을 멸망에서 구하는 것입니다.그 피의 잔은 하나님께 주어질 잔입니다.깨지고 부서진 포도에서 생기는 붉은 포도의주의 즙과 같이 주님의 온 몸은 찢지고 상하여 흘린 희생의 붉은 피가 향기로운 제물로서 채워져야 할 잔입니다.또 한 그 잔은 우리가 마셔야할 쓴잔 입니다.우리의 죄값으로 우리가 삼켜야하는 쓴잔,그 쓴잔은 영원히 쓴잔입니다.꺼지지않는 볼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서 쓰디쓴 형벌의 잔을 마셔야 합니다.주님은 우리대신 그 쓴잔을 마시기 위하여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원대로 하라고 하셨습니다.최후의 주권을 하니님께 맡기는 기도입니다.자신의 뜻과 의지를 꺽고 하나님께 복종하겠다는 기도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내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내 뜻을 이루기 위하여 살고 있습니다.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렇지 않습니다.내 뜻이 이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나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엊그제 꿈을 꾸었는데 제가 처음 신앙생활을 했던 시골교회의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그 분은 몇 년전까지만해도 고척동에 있는 대신교회라는 큰 교회에서 시무하시다가 50대가 되셨지만 브라질의 선교사로 떠났습니다.얼마전 신문에 선교보고서를 보았을 때 많은 은헤가 되었습니다.그 어려운 곳에서 낯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는 과정들을 볼 때 저 자신에게는 새로운 도전이 되었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그들의 눈에 비치는 믿는 사람의 삶은 대단히 초라하게 보일수가 있습니다.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땅에 이루기 위한 삶을 사는 위대한 사람들입니다.어떤 특별한 일을 해야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내가 있는 직장과 가장과 사회에서 내 뜻이 아나라 성경의 가치관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면 되는 것입니다.하나님께서 주신 사명과 직분이 크든 적든 최선을 다해 감당하며 섬기는 것입니다.세우신 교회를 섬기는 것입니다.
43절을 보십시다.주님은 이렇게 2번째 기도하셨습니다.그 때까지 제자들은 여전히 졸면서 자고 있었습니다.저들의 눈이 피곤했다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이 기도를 마치신 후에 주님은 제자들에게 오셨습니다.

44절에는 주님은 마지막 3번째기도를 하십니다.이 기도가 마치면 주님은 제자의 손에 팔리우게 될것입니다.드디어 하니님께서 예정하신 때와 시간이 다기오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때를 따라오셨고 때를 따라 사시고 죽으셨습니다.얼마후면 사탄의 권세가 깨질 것입니다.인간을 죄와 죽음으로 끌고가던 그의 행렬이 멈추게 될 것입니다.
어둡고 두터운 죄악의 담이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주님에게는 그 밤이 무척이나 짧은 밤이었습니다.고통의 시간은 지나갔습니다.겟세마네 동산에 점점 새벽이 가까와지고 있었습니다.45절에 보니 주님은 기도를 마치시고 제자들에게로 오셨습니다.
“이제는 자고 쉬라”는 뜻은 “아직도 자고 있느냐”는 헬라어의 역설법입니다.이제 때가 왔는데 아지도 너희는 잠을 자고 있느냐.깨어 너희에게 닥쳐올 시험과 환란을 준비하라는 것입니다.저쪽으로 부터 숲을 혜지고 오는 무리들의 발자욱 소리가 들리지 않느냐 그들은 이 새벽에 검과 몽치를 들고 우리를 잡으러 오는데 아직까지도 잠만자고 있느냐는 말씀입니다.내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게 되었는데도 잠을 자고 있느냐는 말씀입니다.이제는 잠에서 깨라는 것입니다.지금은 잠 잘때가 아니니 어서 깨어일어나라는 것입니다.육신의 달콤함에 젖어 있을 때가 아니니 깨어일어나라는 것입니다.
46절에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일어나 함께 가자 ”주님은 어쩌면 이 말씀을 하시기 의하여 밤새도록 기도하셨는지 모릅니다.어제밤에 고민으로 죽게된 주님의 지친 모습을 기억하고 계십니까.번민함으로 괴로와 하시던 주님,이 잔을 할수만 있으면 옮겨 달라는 기도하시던 주님.그러나 지금 새벽 빛을 받으며 당당하게 서계신 주님의 모습은 어제의 지친 모습이 아닙니다.“죽음이여 오라 너를 맞을 준비가 이제 끝났다”“가자 나를 잡으러 오는 저들에게로” 모든 각오와 결심이 되었다는 뜻입니다.인간으로서의 삶의 미련과 애착들을 정리하고 마음의 준비를 마쳤다는 것입니다.죽음을 향한 용기! 주님은 어디서부터 그런 용기를 가지셨습니까.주님의 용기는 어떤 용기입니까.무엇이 주님을 용기있게 만들었단 말입니까. 무엇이 자신있게 이 길을 선택하게 되었단 말입니까.주님의 용기는 사랑의 용기였습니다.
여러분 진정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위하여 죽을 수 있습니까.사랑은 죽음을 정복하는 위대한 힘이 있습니다.많은 애국자들이 조국을 사랑하기에 자기 생명을 버리고 죽음을 불사하고 자기를 던져졌습니다.임금을 사랑하는 많은 충신들이 죽음앞에서도 변절하지 않고 자기를 던졌습니다.참 사랑이야말로 죽음까지도 정복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죽음의 길을 선택하신 용기는 이 사랑의 용기입니다.인간을 사랑하기에 죄인을 사랑하기에 구원의 선물을 주시기위해서 단잔의 축복을 주시기 위한 선택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기의 생명을 바치신 것입니다.주님이 생명을 바치면서까지 사랑한 사람이 누구입니까.베드로입니까.요한입니까.그 사람은 바로 여러분과 저입니다.영원한 형벌에 처한 여러분과 저의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주님은 선택하신것입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죽는 것도 쉬운일은 아닙니다.주님은 얼마 후에 자기를 찌르고 조롱할 군중과 무리들을 위하여 자기를 배신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사랑의 선물을 주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주님의 가슴에 사랑의 이미 대상이되어 버린 여러분과 저를 위한 사라의 선택이며 용기인 것입니다.
얼마전 현재 중앙대학교 경제학 교수이신 최재선 교수님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그 분은 교수이지만 목사안수를 받고 학교에서 복음을 전하며 집회도 인도하며 정열적으로 주님을 위해 일하시는 분입니다.그 분은 20년전 미국에서 공부할때만해도 아내가 전도하기 위하여 책을 사서 주면 집어던졌던 분이었습니다.그러다 어느날 T.V에서 빌리그래함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며 3살 때부터 지은 죄를 그 자리에서 2시간 동안 눈물을 흘리며 회개했습니다.주님께서는 자기같은 죄인을 사랑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그는 그때 부터 주님을 삶의 수단으로 삼지 않고 인생의 목표로 삼기로 작정하고 성경공부를 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저는 지난 2주간 동안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한 가지 제 마음에 느끼는 것이있었습니다.저는 분명히 주님을 이해하고 사랑한다고 생각했지만 제가 주님에 대하여 알고 이해하는 것은 아주 적은 극히 일부분이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은 멀리있는 분이 아닙니다.우리 마음속에 성령의 인격으로 지금 살아계십니다.주님은 우리의 몸과 마음으로 오셨기에 우리를 이해 하실 수 있습니다.우리를 알고 계십니다.주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에 우리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사랑의 저편에는 위선이 있습니다.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사랑하는 모습을 하는 것이 위선입니다.사랑하지도 않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기도하는 것이 위선이며 사랑하지도 않으
면서 사랑하는척 찬송하는 것이 위선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 위선의 껍데기가 있다면 다 벗어버립시다.다시 주님을 이해하십시다.주님은 우리에게 내가 이렇게 했으니 나를 사랑하라고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다만 분명한 사실은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그날 밤 쓰디쓴 십자가의 죽음의 길을 택하셨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이유하나 만으로 죽음의 용기를 가질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그날밤 주님과 함께 갔던 제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그러나 그 후에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주님의 뒤를 따라 순교의 길을 갔습니다.주께서 인간을 사랑하기 때문에 죽음의 용기를 얻은 것처럼 그들도 역시 사랑하는 주님을 때문에 기꺼이 죽음을 향한 용기를 가질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신앙의 경력이나 연륜이 아닙니다.우리 안에 채워야할것은 신앙에 대한 지식이 아닙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살아계신 주님의 인격과 나와의 진실한 만남입니다.주께서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이 사랑을 부어 주실것을 축원합니다.이 사랑으로 충만케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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