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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의 특성(3) (고전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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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성내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기를 사랑은 성내지 아니한다고 하였습니 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소중한 선물을 많이 받았습니다(창1:27,28). 그중에 서 가장 귀한 것이라면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비록 땅에서 살고 있지마는 하나님을 생각하며 땅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며 사는 것 같지만 저 마음 깊은 곳에서는 하나님을 향하여 거룩하게 살고 자 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선물은 만물을 다스리는 특권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 런데 만물을 다스리는 특권안에는 마음을 다스리는 특권까지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긴가 하면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들어 놓으신 후 "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신 그 말씀속에는 " 네 마음을 네가 다스려라 그 리고 그에 따라오는 운명도 네가 책임지라" 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이것은 바 로 우리 마음을 다스릴 특권을 우리 자신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마음을 다스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마음을 다스린다고 할 때 사람에 따라 그 다스리는 방법이 차이가 있습 니다. 첫째는, 이성에 의하여 마음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이 이성이라는 말을 조금 다르게 표현하면 지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사 람을 가리켜 지성인, 또는 문화인 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지나치게 감정적인 사람을 비문화인 심하게 애기하면 야만인 이라고 합니다.

둘째는, 자기 양심에 의하여 마음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어떤 일이 나 사건이 있을 때마다 양심에 묻고 이것이 도덕적으로 선한 일인가 악한 일인가 남에게 해가 될 것인가 이익이 될 것인가 등 이런 것들을 먼저 생각하여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입니다. 이와같은 사람을 우리는 덕이 있는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세째는, 자기 의지에 의하여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이 의지 를 가지고 어떤 어려운 시련이 있어도 끝까지 참고 잘 견딥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람을 위대한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랑에 의하 여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들입니다. (예) 김 익두 목사님

생각해 봅시다. 누가 김 익두의 마음을 다스린 것이겠습니까 지성이겠습니 까 양심이겠습니까 교양이겠습니까 강한 의지이겠습니까 아니면 학벌입니 까 그것은 오직 하나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의 마음을 다스리게 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의하여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입니 다. 물론 지성이 있어야 됩니다. 의지도 있어야 됩니다. 양심도 있어야 됩니 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의하여 자기를 다스리는 사람이 참 그리스도인인줄 믿습니다.

 그렇다면 성을 낸다고 하는 것이 다 잘못된 것일까요 물론 아닙니다. 의로운 분노가 있을 수 있습니다. 성전에 가득한 장사꾼들을 향해서 분노를 보이셨던 주님의 분노가 그런 분노 아닙니까 또 아덴에 가득찬 우상을 보고 분노했던 바울의 분노가 그런 분노 아닙니까 그렇다면 또 이런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 다. 의로운 분노라고 자제함 없이 막 화를 내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분명히 말씀드립니다마는 이런 때에라도 우리의 분노는 하나님 의 능력으로 다스려져서 올바른 방법으로 표현 되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이 성전 에서 분노하실때 결코 그 행동이 이성을 잃어버리신 행동은 아니셨습니다. 요한 복음 2장 16절이하에 보면 양이나 소를 성전밖으로 몰아내시면서 비둘기장은 부 수지 않으시고 다만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고만 말씀 하셨습니다. 왜 ! 양이나 소는 주인들이 밖에서 찾아갈 수 있지만 비둘기는 일 단 날아가 버리면 주인이 찾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동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냥 그자리에서 그대로 뒤집어 엎기만 하셨지 내던져버리시지는 않으셨습니다.

뿐아니라 사람에게는 일체 손을 대지 않으셨습니다. 이 분노의 와중에서도 예수 님은 결코 냉정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을 내지 않는것도 사랑에 원리에 의해 다스려져야 하지만 의 로운 분노 역시 사랑의 원리에 의해 다스려져야 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 다.

 또 한가지 우리가 분노를 극복하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 니다.

남들이 나에게 잘못했을때 어떻게 반응 하느냐에 따라 두부류의 사람으로 나눌수 있는데 한 종류는 자기의 권리만을 생각하는 사람이고 또 한 종류는 자기의 의무 를 더 많이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권리에만 더 집착한다면 우리는 분명히 분노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떠한 처지에서도 우리의 의무를 더 생각한다면-특히 성도의 가장 큰의무인 사랑의 의무를 생각한다면-우리가 당한 억울한 일이야말로 성도의 사랑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로 받아들 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죄나 잘못과 상관없이 오해와 비난과 누명을 받을 때 어떻게 그 분노의 유혹에서부터 승리하실 수 있으셨을까 생각해봅시다. 그것은 단 한가 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그 길을 걸어야만 한다는 사랑에찬 일념-하 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맡기신 사명을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 우리도 우리의 잘못과 상관없이 이 세상에서 억울한 일을 당한다 해도 우리의 가장 큰 의무인 사랑의 의무를 생각하면서 우리의 마음을 다 스리도록 노력합시다.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않습니다.

여기에 사용된 <생각>이라는 말은 [로기조마이]인데 이 말의 원뜻은 '계산된 것을 보관한다'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악한 것을 생각한다"는 말은 남이 내게입힌 상처나 피해를 두고두고 또생각하고 생각한다는 뜻입니다.분노가 가득차서 상대방이 잘못되기를 바라는 악한 마음 자세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의 성품이나 행동에 대해 나쁘게 평가하고 항상 비판적이고 부정적인 관점에서 평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이 인간관계를 늘 선하게만 같는다는 것이 너무너무 어려운 일입니다만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고하는 성도라면 악한 것을 두고두고 기억한다든지 늘 부정적이고 비판적이라던지 하는 것들을 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의지적으로 할수있는데로 주위 사람들의 좋은 점과 밝은 점 만을 보려고 노력하며 될 수 있으면 인정해 주고 칭찬해 주려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왜요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전도할 때 나다나엘이 뭐라고 했습니까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라고할 때 오히려 주님은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로다 그속에 간사한것이 없도다> 라고 도리어 칭찬의 말씀을 하신 것을 기 억하실 것입니다.

더구나 십자가 위에서의 주님의 기도와 순교의 현장에서 부르짓는 스데반의 기도 는 우리가 왜 악한 것을 생각하면 안되는지를 가르쳐주지 않습니까 그것은 무 엇이죠 다름아닌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도 우리의 형제와 이웃의 허물을 잊어버립시다. 우리 머리속에 보관해둔 여러 상처의 기록들을 찢어버립 시다. 그때에 우리는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를 진정 거리낌없는 마음으로 기도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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