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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의 특성(2) (고전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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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에는 사랑은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한다고 하였습니다. 이 투기한 다는 헬라 원어"젤로이" 라는 말은 곧 "시기","질투"라는 뜻의 말입니다. 사랑 에는 세 가지 차원의 사랑이 있습니다. 그 하나가 위로 향해서 존경하며 높이는 존경적 사랑이요 그런가 하면 나보다 모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동정적 사랑, 그리고 나와 동등한 위치에서 친애하는 수평적인 사랑이 있습니다.

 1. 수직적인 사랑과 수평적 사랑의 관계

그런데 우리는 먼저 수직적인 관계, 곧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서지 못하면 수 평적인 관계가 무너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좋은 예는 아니지만 구체적인 한 예를 들어보자면 미국으로 이민간 교포들의 이야기입니다. 이민을 간지 1년도 채 못되는 교포들을 만나서 "얼마나 고생이 많으십니까" 하고 인사 를 하게되면 "아, 괜찮아요"하면서 이 서양 사람들이 친절하여 직장에서도 부족 한 점을 잘 도와주고, 여러 가지 불편을 덜어주며 모두가 다 사랑해 주기때문에 괜찮다는 것입니다. 그러길래 그 때에는 그런가보다 했습니다마는 3년 후에 같 은 사람을 만나 "요즈음은 어떻게 지내십니까 " 하고 물었더니 이번에는 그게 아니랍니다. 한 마디로 이 서양 사람들 못쓰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이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잘 합니다.

그래서 직업도 얻어 주고 물질로도 잘 도와주지만 그러나 일단 자기와 비슷히지 게 되면 그때에는 여지없이 내려친다는 것입니다. 자기보다 높아지려고 하면 용 서하지 않는 사랑! 이것을 그때에 가서야 깨닫고는 아차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이란 과연 어떤 것입니까 어쩌다 불쌍한 사람에게 돈 몇 푼 쥐어 주며 먹을 것, 입을 것을 챙겨 주었다고 그것이 사랑이려니 싱각할 것이 아닙니 다. 감상적인 그런 정도에서 사랑을 평가해서는 아니됩니다. 사랑이란 나와 같 이 여길 뿐만 아니라 내 몸, 내 마음과 같이 사랑하며 나아가서는 사도 바울의 권고처럼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입니다." (빌2:3) 그럴 때에 비로 소 사랑이라 할 수 있는 것이며, 거기에 사랑의 완전함이 있는 것입니다.

 2. 질투의 본질과 사랑 1) 질투에 대한 오해.

 그런데 이 질투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나 어떤 것을 빼앗기지 아니하려는 고통스러운 감정을 의미합니다. 빼앗기지 아니하려는, 그리고 독점하 고픈 욕망, 그러다가 자기의 힘이 미치지 못하여 빼앗기게 될 때에 가서는 마침 내 미워하게 되어 이것이 질투로 변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질투를 사랑의 한 표 현으로 싱각하는 것은 완전한 착각입니다. 질투란 어디까지나 질투일 뿐 결코 사랑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의 반대가 질투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질투로 변하는 순간, 그와 동시에 곧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사랑하므로 질투 한다는 말은 다 쓸데없는 소리입니다. 어디까지나 질투에 불타면서 사랑이라는 명목으로 자기도 죽이고 남도 죽이는 참으로 피곤하고 불편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입술에서는 항상 "사랑" 이라는 말이 플러나오고 있습니다마는 그 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아직 모르는 사람입니다. 질투를 사랑으로 착각하지 말라 는 것은 질투는 곧 미움이기 때문입니다.

 2) 질투의 근원

뿐만 아니라 이 질투는 자기 열등의식에서 오는 것입니다. 빼앗기지 않아야 하고 빼앗기지 않을려고 하는데 이것을 빼앗기게 되니 문제가 되는 것이란 말입 니다. 그 때문에 이런 유형의 사람은 자신이 높고 강한 사람을 사랑해야 할 경 우에 가서는 사랑하지 못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문제의 결국은 자기의 열등의식에 있고, 열등의식이 질투로, 증오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 여 자기의 위치가 위에서부터 아래로 바뀌는 날에는 적은 사랑도 하지 못하게 되 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사랑이라 불리워졌던 전자의 일도 결국은 자기 갈등의 발로였을 뿐 그 자체에 사랑이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충족, 자기 사랑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이 질투는 곧 사랑의 시금석이 됩니다. 따라서 이 질투하는 마음이 있는가 없는가를 보아 질투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으면 참 사랑이겠으나 그렇지 않고 질투가 살살 올라오면 지체없이 회개하여야 합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므 로 조금만 지나치면 어느 사이에 마귀가 시험을 걸어 넘어지게 합니다. 그래서 자신도 괴롭고 다른 사람도 괴롭히는 것이란 말입니다.

 3. 질투는 마귀의 최고 수단

한 수도사가 리비아의 어느 사막에서 수도를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 이 수도사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경건한 생활을 하기 위해 사막에서 금식을 하며 극기와 고행으로 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가 다가와서는 이 수도사를 시험합니다. 그래서는 육체적인 욕망을 비롯하여, 물질로, 의심으로, 공포로, 아무튼 갖은 수단을 다 동원하여 시험을 해 보았지만 전혀 통하지를 않습니다.

그렇게 되자 이 마귀도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그 때에 지나가던 친구마귀가 그 것을 보고서는 "내가 한번 해 볼께" 하고서 그 수도사에게로 가서 "당신 동생이 얄렉산드리아의 주교가 되었답니다." 라고 하였더니 그 자리에서 그 수도사의 얼 굴이 변하더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잘 이겨나가다가 마지막 이 질투에서 넘어 지고 말았습니다. 이는 특별히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 많이 볼 수 있는 경 우입니다. 선하게, 의롭게, 진실되게 잘 나가다가 마지막에 질투에서 넘어지고만 단 말입니다.

 이렇게 마귀의 최고 수단이 질투입니다. 우리는 그 예를 성경 속에서 얼마든 지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인간 역사의 시작인 에덴동산에서부터 질투 의 역사가 시작되었음을 보게 됩니다. 이에 창세기 3장을 보게 되면 뱀이 이브 를 시험하여 꼬이기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이 뱀은 하와로 하여금 시험에 빠지게 합니다. 그러고 보면 이는 실로 뿌리 깊은 죄입니다.

뿐만 아니라 인류 최초의 살인극인 저 유명한 가인과 아벧의 사건은 어떠합니 까 두 형제가 각각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으나 하나님께서는 동생의 제사는 받으시고 형인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자 하나님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형인 가인이 동생 아벧을 질투하여 죽여버리고 맙니다.

 이와같이 최초의 살인극, 그것도 동생을 죽이는 살인극이 바로 이 질투로 인하 여 나왔고 더구나 인간적인 평범한 일이 아닌 하나님께 드린 제사문제에서 비롯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될때 이 질투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죄인가를 알아야 합니 다. 흔히들 시기, 질투쯤이야 범인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이 상례이고 보면 이 정 도야 하고 쉽게 생각해 버릴수도 있습니다마는 그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것 이 바로 죄의 뿌리가 됩니다. 때문에 요셉의 형제들은 마땅히 사랑하여야 할 동 생을 멀리 애굽으로 팔아버리게 되었고, 그 결과 훗날 그 앞에 눈물로 무릎을 꿇 게 됩니다. 그런가 하면 제사장을 질투한 레위 족속들이 벌을 받았으며, 아론과 미리암은 모세를 질투하여 비방하다가 미리암이 문둥병에 걸리는 무서운 징벌을 받았던 것입니다.

 신약에 와서도 보면, 예를 들어 바울이 여러 곳에서 특별히 유대 사람들에 의 해 많은 핍박을 받게 됩니다. 그리하여 매를 맞기도 하고 쫓겨도 다니며 감옥에 갇히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성경이 규명하는 그 원인에는 유대인들이 시기하였다는 것이 전제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다름아닌 질투가 사도 바 울을 핍박했던 것입니다. 더구나 두렵고 놀라운 것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한 대제사장 가야바와 바리세인들의 행위도 예수님에 대한 시기와 질투에서 나온 것임을 빌라도는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옥합을 깨뜨려 귀한 값진 향유로 예수님의 머리에 붓고 발을 씻기는 장면들에서도 보면 그 가득한 향기와 예수님 의 만족해하시는 마음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마귀의 시험을 받아서 가롯 유다 같은 경우는 마치 자기 자신이 위대한 자선가이기라고 한 것처럼 "이 향유 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며 역정을 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질투를 하고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받는 영광까지를 질투하며, 하나님의 의를 질투했고 하나님의 사역을 시기했습니 다. 그러던 그가 마침내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팔아 넘기게 됩니다. 질투는 눈 을 어둡게 합니다. 그 때문에 영적인 장님이 되어서는 성경은 물론 하나님도 보 이지 않고 믿음에도 상관없는 자가 되고 맙니다. 이제는 자기 자신도, 사랑도,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주신 바 하나님의 은사도 보지를 못합니다. 그러면서도 보아야 할 것 대신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들어야 할 것 대신 듣지 말아야 할 것 에만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바로 이러한 현상이 질투하는 자의 마음에 있는 시 험인 것입니다.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른다운 목소리를 가진 꾀꼬리와 아름다 운 깃털을 가진 공작새가 서로 질투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 동기가 뭐냐하면 목 소리가 아름답다지만 생김새는 별로인 꾀꼬리가 볼 때 자기에게 없는 저 공작새 의 깃털이 부럽기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꾸만 부러워하고 시기하다보니 공작 새가 미워지고 마침내는 자기가 가진 아름다운 목소리의 소중함마져도 잊어버린 채 원망만 하더라는 것입니다. 또한 공작새 역시 자기에게 없는 고운 목소리를 부러워하고 질투하다가 그 아름답고 위풍당당한 깃털의 고마움을 잊어버리고는 원망만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질투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모든 은 사를 저버리게 되고 원망과 저주 속에 스스로 빠져들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어려운 일을 당한 형제들을 보게 되면 내자신이 당한 것처럼 안 타까운 마음으로 위해서 기도를 합니다. 이는 물론 잘하는 일이요 좋은 일입니 다. 그러나 내형제가 잘 되고 성공하여 영광스러워졌을 때에 그를 위하여 진정으 로 함께 기뻐하며, 내가 받은 축복인 것처럼 마음으로부터 감사할 마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여기에서 질투하고 말았으니 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는 분 명히 알아야 합니다. 진정한 사랑 아가페는 질투하는 마음을 극복합니다. 그리하 여 고난당하는 자와 함께 슬퍼함은 물론, 기뻐하는 자와 함께 기뻐하며 다른 사 람의 축복을 나의 것인 양 감사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사랑인 것입니다. 그러므 로 영광이 나타나며, 거룩한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는 내 마음에 벅찬 감격 과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15장 13절 말씀에 보면 "사랑이 친구를 위하 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두고 왜 하필이면 친구를 위해서냐며 오래 전 젊었을 때부터 계속 생각을 해 봅니다. 나라를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의를 위하여, 진 리를 위하여 죽을 수도 있겠거늘 그것은 왜 큰 사랑으로 칭찬하지 않으시고 한 개인에 불과한 친구라 했느냐는 것입니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나라를 위하여 죽는다는 것은 결국 공명스러운 일이 되기 때문에 그런대로 명예를 위해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친구를 위하여 죽는다는 것은 그런 것도 아닌데다가 오히려 질투의 대상이기 때문에 가장 위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를 위하여 죽기까지 한다면 그것은 진정 가장 큰 사랑이요 가장 위대한 사랑이 아니 겠습니까 숙명과도 같은 질투의 대상으로부터 질투를 극복하고 사랑으로 자기 를 주는 거기에 가장 큰 사랑됨이 있음을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참 사랑을 가지고 질투를 극복한 두사람의 예를 생각해보고 마치겠 습니다.

 4. 실례

(1) 한 사람은 요나단입니다.

 그는 일국의 왕자입니다. 얼마만 있으면 왕위에 오를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의 친구 다윗은 보잘 것 없는 서민 출신이면서 민중의 폭발적 인기를 얻으며 자기의 경쟁자로 등장합니다. 그러나 요나단의 사적에서 다윗을 향한 일체의 투기의 흔 적이 없습니다. 어떻게 이 일이 가능했을까요 그 대답은 사무엘상 20장 17절에서 발견됩니다. " 요나단이 자기 생명을 사랑함 같이 다윗을 사랑함이었더라." 진정한 사랑은 투기하지 않습니다.

 (2) 또 한 사람 요한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의 사역의 절정을 묘사하는 마가복음 1장 5절에 보면 "온 유대지방과 예루살 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등장하여 사역을 시작하자 요한을 따르던 군중 들은 모두 나사렛 예수에게 발걸음을 돌이키게 되었습니다. 요한의 심정이 어떠 하였을까요" 요한의 대답을 들어보십시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 은 자라고 한것을 증거할 자는 너희니라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 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 (요 3:28-30) 92 , 4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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